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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암스트롱, 영원의 바다로 떠난 달의 영웅




“내가 내딛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That i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지구를 벗어나 다른 천체(달)에 첫발을 내딘 사람의 유명한 명언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69년 7월 20일(한국시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Apollo)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했던 3명의 우주인 중 선장이자 주인공이었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지난 8월 25일, 82세로 타계했다.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인을 기리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이주희 박사와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글을 보내왔다.
 

 


6·25전쟁에서 78번의 전투 참여

3닐 암스트롱은 1930년 8월 5일 미국 오하이오 주의 와파코네타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퍼듀대에서 항공공학 학사 학위를 받고, 남캘리포니아대에서 항공우주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서 1952년까지는 해군 비행사로 근무했는데, 1950년 우리민족의 깊은 상처인 6·25전쟁에도 참여해 78번의 전투를 치렀다. 주로 북한 지역 동해와 원산항 근처를 중심으로 임무를 수행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 우주인이었다.

전역한 뒤 그는 1955년 NASA의 전신인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의 클리블랜드 루이스 연구소에 연구조종사로 합류하게 된다. 암스트롱은 이후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 기지에 있는 NACA의 고속비행연구소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프로젝트 조종사로서, X-15 등 시속 약 6437km로 비행하는 다양한 고속 항공기 개발에 참여한다. 이때 그는 제트엔진과 로켓엔진 비행기, 헬리콥터, 글라이더 등 200여 대가 넘는 항공기를 조종했다.

암스트롱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인 앨런 셰퍼드가 1961년 5월 첫 우주비행에 성공한 이듬해인 1962년 NASA의 우주인으로 선발됐다. 그의 첫 우주비행은 그가 조종한 제미니(Gemini) 8호를 통해 이뤄졌으며 미국에서는 우주선을 조종한 최초의 민간인이기도 했다.

지금도 우주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암스트롱은 동료 우주인 데이비드 스콧과 함께 ‘아제나’라는 인공위성과 우주에서 첫 도킹을 시도했다. 그런데 도킹 뒤 1시간도 되지 않아 제미니 우주선은 예상치 못한 회전운동을 시작했다. 도킹을 해제한 뒤에도 제미니 우주선은 16개 추력기 중 1개가 전기합선으로 열려 1초에 1회씩 회전수가 증가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암스트롱은 침착하게 우주선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결국 지구 재진입용 추력기를 사용하는 등 30여 분간의 사투 끝에 암스트롱은 결국 우주선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했다.

그러나 지구 재진입에 쓸 추력기를 이미 썼다는 게 문제였다.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그들은 제미니 우주선의 역추진 로켓을 사용했고 대서양의 비상착륙 지역으로 무사히 착륙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 서로 협력한 암스트롱과 동료 우주인의 지혜와 침착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암스트롱은 1966년 3월 16일 드디어 10시간 41분의 우주비행 기록을 갖게 되었으며 달 탐사를 위한 적임자로 성장하게 된다.

 


인류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딛다

마침내 아폴로 11호가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를 태우고 1969년 7월 16일 달을 향해 출발했다. 약 4일간의 여정 끝에 달 궤도에 도착한 뒤 각자 임무에 따라 콜린스는 달 궤도의 사령선에 머물렀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이글호라는 이름의 착륙선을 이용해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안착했다. 착륙 후 암스트롱은 “휴스턴, 여기는 고요의 바다! 이글호가 착륙했다!”며 인류가 마침내 달 표면에 도착해 지구로부터 회신을 기다린다고 긴장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지진계, 반사경 등의 과학장비를 설치하고 약 23kg 이상의 달 암석을 수집하며 탐사하느라 약 2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다음날까지 달 표면에서 21시간 37분을 머무르며 임무를 수행했고 이글 호 착륙선을 타고 무사히 궤도선으로 귀환했다. 우주인에게 필요한 강한 책임감과 신뢰와 배려에 기반한 협업을 통해 성공적인 달 탐사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우주인들의 이러한 정신은 사회생활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등 3명의 우주인은 8일간의 달 탐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태평양에 있는 ‘USS 호넷’ 항공모함 근처에 무사히 착륙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직접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항공모함에서 기다렸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주일”이라고 3명의 우주인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혹시 모를 달의 유입물질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귀환 뒤 약 16일간 격리돼 회복기간을 거쳤다. 이후에는 달 여행을 알리기 위한 국제 여행에 나섰다.

 


영웅이기를 거부한 진정한 영웅

암스트롱은 1971년 NASA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항공분야 부책임자로 근무했으며 1979년까지는 신시내티대 교수로 옮겨 연구와 후학을 양성했다. 또 10여 년 정도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우주인들에 비하면 암스트롱은 비교적 조용하게 지낸 것이 사실이다. 말년에 우주인과 관련된 활동 외에는 대부분 조용하게 지냈던 암스트롱의 타계 소식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 NASA의 볼든 국장, 그리고 동료 우주인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애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남들 앞에 스스로 나서지 않았으나 미국과 세계인 모두가 그를 유인 우주탐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

암스트롱 스스로는 자신이 영웅으로 불리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닐 암스트롱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는 달이 아닌 다른 행성에서 인류에게 꿈과 희망, 감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주인의 두 번째 명언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한국 우주인이 또렷한 우리나라 말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에 뜬 달에게 윙크를

8월 25일 점심 때쯤, 전화기에서 “삐릭~” 소리가 났다. 새로운 이메일이 왔다는 소리인데,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 새롭게 학생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면서 엄청난 이메일에 허우적 대고 있는터라 그리 새로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직후 점심시간이라 “뭐지?”

하고 확인을 바로 하게 되었다. 우주인 모임에서 행사 기획이나 많은 활동들을 담당하는 앤디의 메일이었는데, 그가 평소에 보내오는 뉴스레터라고 하기엔 제목이 좀 달랐다.

“Neil Armstrong”.

사실 열어보기 전엔 ‘닐 암스트롱 할아버지께서 무슨 활동을 하셨나? 아님 뭐 전달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셨나’란 생각만 했을 뿐 절대로 그 내용을 추측하지 못했다. 바로 몇 달 전 국제 우주대학교에서 워싱턴대 명예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닐 암스트롱 이야기가 나왔고, 내게 언젠가 만날날이 있을 거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메일을 열어 내용을 보며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앤디는 항상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자기가 하는 가장 힘든 일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닐 암스트롱의 슬픈 소식과 장례식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을 위한 정보를 안내하고 있었다. 혹시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바로 트위터를 켜고 소식이 없나 찾아보는데 아직 너무 조용했다. 처음에는 인터넷이나 트위터가 잠잠한 것이 우주인 모임의 일원으로 소식을 빨리 들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져서이길 바랐다. 그러나 두어 시간 지나고 나니 온통 트위터 타임라인이 닐 암스트롱의 소식으로 꽉 채워졌다.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사망이 널리 알려지면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가 닐 암스트롱 서거에 대해서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내가 감히 어떻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와 닐 암스트롱 사이에는 많은 우주인들이 있고, 그들은 나에게는 하늘 같은 선배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직접은 아니더라도 텔레비전을 통해서라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을 보기도 했던 분들이다. 반면에 난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던 그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은 ‘대한늬우스’에나 나올법한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왠지 나무틀에 들어있는 뚱뚱한 브라운관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볼 법한 그런 옛날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주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후에는 그래도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처음하는 사람의 불안함과 어려움. 그 이후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마주 대하면서 힘들 때마다 ‘과연 유리 가가린은, 닐 암스트롱은, 한 나라의 처음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리 가가린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닐암스트롱 할아버지는 우주인 모임의 일원이시니 언젠가 한번쯤은 뵙고 이야기 나눌 날이 오겠지’라는 바람도 살짝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닐 암스트롱 할아버지는 내가 잘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과 가깝게 알고 지내는 분이라는 생각에 만난 적도 없으면서도 괜히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작에 조금 더 서두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뵙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를 이제 와서 하는 내가 참 어리석어 보인다.




한국전 참전용사로서, 우주인 대선배로, 그리고 우주와 과학을 가까이 느끼는 공학도로서 영웅 닐 암스트롱에게는 참 많은 빚을 졌다. 비록 직접 뵙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전할 수 없고, 조언을 구할 수도 없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그 빚을 갚을 방법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 본인에게 갚기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 하는 것으로 빚을 탕감해 주시리라.

닐 암스트롱의 장례식이 있던 날, 하늘에는 블루문이 떴다고 한다. 우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닐 암스트롱을 잃은 우리 맘을 블루문이 위로하는 듯 하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NASA에서 구글 블로그에 올린 그의 가족 이야기다.

“어떻게 암스트롱을 예우해야 할지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그의 헌신과 업적, 겸손을 영예롭게 하는 것은 하늘이 맑은 날 바깥을 걸을 때 여러분에게 미소 짓는 달을 보면서 닐 암스트롱을 생각하고 그에게 윙크 한 번 해주시는 거예요.”

오늘 밤 맑은 하늘에 뜬 달이 날 보고 웃는다면, 나도 윙크 한 번 날려드려야겠다.



 

2012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오가희 | 글 이주희, 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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