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공학연구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대 4학년 1994년 봄, 학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대학원 실험실을 소개받고 선택하는 자리였다. 전공필수 과목인 기계공작법에 대한 주종남 교수님의 명강의가 인상 깊었다. 게다가 직접 가공기계를 꾸미거나 공작기계(일반기계 및 설비를 가공하는 기계)를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해서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해법에 접근하는 문제해결 방식은 몸으로 체험하고 확인하는 것을 즐기는 필자의 성격과 잘 부합했다.
실험실에서는 공작기계 이상진단과 미세가공 분야를 주로 연구했다. 공작기계 이상진단은 공작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공구가 심하게 마모되진 않았는지, 파손이 발생했는지 등을 실시간으로 진단하는 기술이다. 각종 센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진동, 소음, 절삭부하, 모터 전류, 재료 탄성파 등과 같은 다양한 신호들을 수집하고 적절한 신호처리 기법을 적용해 기계 상태를 확인한다. 공작기계를 진단하는 것은 가공 라인의 자동화 및 무인화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노즐용 미세홀(구멍), 반도체 정밀 지그(기계를 가공할 때 가공위치를 정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기구) 등 전자, 자동차 산업 등에서 핵심 부품 제작에 쓰는 미세가공은 방전가공, 초음파가공, 전해가공, 레이저가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한다. 머리카락보다 조금 굵은 정도의 절삭공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그만 실수를 해도 공구가 쉽게 부러졌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밤을 새워 실험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필자는 정밀공학연구실에서 보낸 기간 동안 학문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한가지, 사회로 나와 연구하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문제해결 능력을 배우고 평생을 함께할 후원자들을 얻은 것은 무엇보다 값진 수확이다. 실험실에서 연구할 때 교수님은 논문 주제를 정해주지 않았다. “논문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가 연구의 첫 걸음이다. 사회에서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다방면으로 세밀하게 검토해 문제를 정의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 대학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생긴, 논문 주제와 그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조그만 현상이라도 호기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피는 습관은 지금도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필자는 9년의 연구원 생활을 거친 후 이 연구소의 전략기획팀에서 근무한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엔지니어’라는 옷을 벗고 기술전략과 차세대 성장 엔진 지원 전략을 수립하고, R&D 포트폴리오 전략을 수립하는 등 다소 생소한 업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배운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실히 업무를 할 수 있다. 정밀가공분야는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모든 산업의 주춧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