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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 그러나 숱한 우여곡절이 그속에 있다.


노벨재단이 위치한 노벨하우스(오른쪽에서 두번째 건물)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세계의 과학계는 노벨상을 둘러싼 화제로 들끊게 된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수한 학생을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시키기도 하고 매스컴을 통해 집중적인 보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처럼 각광을 받고있는 노벨상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져진 것이 없는 형편이다. 이글에서는 노벨상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노벨상의 실상과 허상을 분명히 밝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을 보다 구체화하고자 한다.

수상자, 어떻게 선정되나

잘 알려진대로 노벨상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 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상으로, 과학분야에는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3개 분야에 시상된다. 이 상은 그해에 인류의 복리증진과 과학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최근의 '발견' '발명' 혹은 '개선'등을 해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노벨은 그의 유언에서 노벨상의 선정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스웨덴의 왕립 과학아카데미와 왕립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 위임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첫수상자를 내기까지에는 5년이 걸렸다. 1901년 처음 수여된 노벨상은 최초에는 약4만2천달러 씩을 상금으로 지급하였는데, 그후 노벨재단의 수익사업으로 상금은 계속 변화하여 3만달러에서 34만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노벨상은 국적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수상자는 추천을 받을 당시 뿐만 아니라 상을 수여받는 그 순간에도 살아있어야 한다. 여태가지 노벨상을 죽은 사람에게 추서하여 수여한 경우는 없었다.

매년 스웨덴의 과학아카데미는 노벨상 수상자의 선정을 위한 추천권자의 선정과 추천된 후보자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각각 5명으로 구성된 노벨물리학상 위원회와 노벨화학상 위원회의 위원들을 임명한다. 마찬가지로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는 노벨생리·의학상위원회의 위원들을 임명한다. 각 위원회의 위원들은 통상 3년내지 5년마다 갱신되는데, 지금까지 노벨상선정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벨상 수상자의 최종적인 결정은 왕립 과학아카데미의 총회와 칼로린스카의학연구소의 전문 스탭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벨상의 운용자금을 관리하는 노벨재단은 기금의 경제적인 관리에만 권한과 책임이 있을 뿐, 수상자의 선정과정에는 결코 개입할 수 없다. 즉 노벨상의 상금 액수는 노벨재단이 정하지만 수상자의 선정은 전적으로 스웨덴의 왕립 과학아카데미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의 권한으로 되어 있다.

문서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불문율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추천자들은 종신 지명권이 있는 사람들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하도록 초빙되는 사람들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과학 아카데미의 경우, 고문서가 부분적으로 공개되고 있는 1901~1931년 동안의 종신 지명권자들은 스웨덴과 외국의 과학아카데미 회원,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위원회 위원들,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스웨덴과 그외 북구지역의 대학과 그와 유사한 연구소에 있는 종신 또는 현직 교수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해마다 노벨상위원회로부터 추천을 의뢰받은 지명권자들은 적어도 6개이상의 외국대학의 물리학 화학과장들, 그리고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후보자의 지명에 초빙되는 불특정의 과학자들로 구성되었다. 1900년 최초의 후보자 지명의뢰 때에는 물리학 화학분야에서 약 3백개의 추천의뢰서가 보내졌다. 물론 그후 후보자 지명을 의뢰받은 기관이나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의 경우, 종신지명권자들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 전문스탭진, 과학아카데미의 의학분과 회원, 과거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웁살라 룬트 코펜하겐 오슬로 헬싱키 대학의 의학부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특별 초빙 지명권자들은 앞에서 열거되지 않은 적어도 6개이상의 대학 의학부 멤버들과 그밖의 불특정 다수의 과학자들로 이루어졌다.

노벨상 후보의 지명에 대한 모든 사항은 그해 2월 1일 이전까지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상위원회에 도착하여야한다. 후보자 지명에 대한 모든 사항이 도착하면 노벨상위원회는 규정에 따라서 추천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심사하게 된다. 봄철에 개최되는 몇번의 회합을 통해 노벨위원회는 추천된 후보자들 중에서 좀더 자세한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몇몇 후보들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때 노벨생리·의학상에 대한 토의는 해부학·조직학, 일반생물학·생리학 및 생리화학, 병리학, 의학·외과학 및 안과학, 세균학·위생학·병원학, 면역학 등 6개 분야로 나누어 진행된다. 종합적으로 평가되는 물리학상, 화학상과는 다른방식이다.

이렇게 하여 노벨상위원회는 과학아카데미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 노벨상후보자들에 대한 추천장과 그해의 전체추천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반보고서'와 후보로 추천된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탈락된 주요 경쟁자들에 대한 의견이 포함되어 있는 '특별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결국 10월 초나 중순 쯤에 개최되는 과학아카데미의 총회에서 그해의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며,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는 종신 전문스탭진들이 노벨생리·의학상 위원회의 추천서를 심의한 후 투표를 거쳐 11월중에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명문화된 규정에 따라 최종 수상자의 선정과정에서 제기된 어떤 의견이나 어떤 투표결과도 문서나 기록으로 남길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노벨상 수상자들은 노벨의 기일(忌日)인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국왕에 의해서 노벨상을 수여받게 된다.

초기 노벨상과 「아레니우스」의 영향력

모든 과학상의 시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상자의 선정에 얼마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과학상의 선정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의 판단 기준과 그 태도가 어떠한 형태로든 그 과학상의 성격을 크게 죄우한다는 것은 충분히 근거있는 이야기다. 실제로 가장 공신력이 있다는 노벨상의 경우도 노벨상 위원회의 위원들과 과학아카데미의 물리학 화학 분과의 임원들의 과학에 대한 태도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초기 노벨 화학상 수상자 중에서 물리화학(physical chemistry) 분야에 수상자가 많은 것은 노벨상 위원회의 위원회의 위원 중의 한 사람인 아레니우스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1880년대 이후 소위 '이온주의자' 들로 불리우는 반트 호프, 아레니우스, 오스트발트 등은 열역학적인 방법론을 화학에 적용하여 물리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아레니우스는 자신이 노벨상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포함한 이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하게 하여 물리화학이라는 분야를 확고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스웨덴인인 아레니우스가 맨처음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노벨상의 국제적인 지위를 실추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카데미는 반트 호프를 최초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한편 아레니우스 자신도 최초의 노벨화학상을 받지 않으려 하였는데, 그것은 물리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물리화학 분야를 기존의 유기화학 등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 분야로 정립시키려는 그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레니우스는 노벨 물리화학상을 타려는 자신의 의도는 성취하지 못했지만 1903년 전해질 속에서의 이온화 해리 이론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자신이 노벨상을 타고난 후 원래 소위 '이온주의'의 삼두마차 중 마지막 사람인 오스트발트의 수상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마침내 1909년 오스트발트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물리, 화락 분야의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의 아레니우스의 영향력은 1921년 네른스트(W.Nernst)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론보다는 실험을 중시

한편 초기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의 위원 5명 중 하셀베르그(K. Hasselberg), 탈렌(R. Thalen), 옹스트롱(K. Angstron)등 3명은 당시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실험 물리학적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1차 대전 이후까지도 초기 노벨 물리학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즉 초기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실험물리학에서의 공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뢴트겐(W.K.Röntgen) 이 1901년 X선의 발견으로 첫 노벨상을 받은 것을 필두로 하여 베크렐(A.H.Becquerel)과 퀴리 부부는 1903년 방사선의 발견과 우라늄의 연구로, 레일리(Rayleigh)는 1904년 아르곤의 발견으로, 레나드(P.Lenard)는 1906년 양극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그리고 온네스(H.K.Onnes)는 1913년 극저온 현상의 연구로 각각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많은 경우 이들은 당시 '광선물리학'(ray physics)이라고 하여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X선 양극선 방사 현상 등을 연구하던 실험물리학자들이었다.

이렇게 초기 노벨 물리학상이 실험물리학 분야에 치중하여 수여된 것은 당시 스웨덴의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의 의식적인 계획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하셀베드그는 그 무렵 국제도량형 위원회 스웨덴 대표였는데, 그는 실험 과학에 있어서 측정 정밀도의 향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이켈슨을 노벨상 후보로 열렬히 지지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마이켈슨이 간섭계를 발명하여 물리량의 측정 기술에 있어서 놀라운 진보를 가져왔고 이것이 그의 관심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이켈슨을 평가하는 그의 보고서에는 마이켈슨의 간섭계가 가져온 물리상수에 있어서의 정밀도의 향상에 대해서는 아주 장황하게 언급되고 있는 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관계가 있는 마이켈슨·모울리의 실험에 대해서는 단 한 문장밖에 나오지 않는데, 이것으로도 그의 선정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년 후보였던 「막스 플랑크」

한편 플랑크(M.Planck)가 어떻게 하여 그 오랜 동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노벨 물리학상을 그토록 늦게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되어 왔다. 이것은 당시 스웨덴 과학의 맥락에서 초기 노벨상의 수상 성격을 살펴볼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플랑크는 1900년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양자에 관한 그의 획기적인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인의 주목을 거의 받지못했고 적어도 1906년까지는 제창자인 플랑크 자신조차도 그 이론이 가지느 혁명적 성격에 관하여 확실한 이해가 없이 우유부단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08년 이후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 당시 로렌츠는 이전의 그 누구 보다도 훌륭하게 레일리·진즈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한 후 로마에서 행해진 일련의 강연에서 빈·를랑크의 복사식과 레일리·진즈의 복사식을 비교하면서 레일리·진즈의 이론이 훨씬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었다. 이 주장은 과학계에 널리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그때 레일리·진즈 법칙이 실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실험물리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로렌츠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플랑크는 처음으로 자신의 에너지 양자 불연속 개념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이후 점차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양자 불연속 개념이 인정되기 시작하여 1912년경에는 상당히 많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양자 불연속 개념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가 1907년부터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계속 지명되고 있던 플랑크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도록 작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11년에 실험물리학자인 빈(Wien)만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플랑크에 대한 거센 지명 압력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위원회는 계속 주의깊게 양자물리학의 진전을 주시하는 한편, 양자 불연속 개념의 문제점이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아래 계속 플랑크에 대한 시상을 연기시켜왔던 것이다.

1913년 보아(N.Bohr)의 원자 모델에서 플랑크의 가설이 이용되었고 그 후 스펙트럼 분야에서 양자론이 광점위하게 이용되고 있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양자론에 대해서만은 거의 선입관적인 회의를 표명하였다. 1918년에 아레니우스에 의해서 제출된 보고서에서 조차도 그 결론은 "양자론은 아직도 만족스러울만한 정도의 완성 상태에 이르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1917년에 와서야 노벨상 위원회는 플랑크에게 "에너지 양자의 발견에 의한 물리학의 진보에 공헌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노벨상 위원회는 플랑크의 업적이 가지는 이론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원회는 원자들의 특성 연구에 있어서 플랑크 상수(h)가 지니는 보편 상수적 성질을 특히 강조하여 양자 불연속 개념이 지니는 이론적 의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심쩍개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성이론 평가 못받은 아인슈타인

이렇게 새로운 과학 이론에 대해 보수적인 스웨덴 과학계의 태도는 플랑크의 수상과정 뿐만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1910년 오스트발트에 의해서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처음 지명된후,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계속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또한 추천 분야에 있어서도 상대론을 비롯, 브라운 운동 고체의 비열양자 이론 등 여러 분야로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더구나 1919년 일식 관측 실험 이후에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후보 추천이 더욱 쇄도하였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이후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는 여전히 종래의 보수적인 실험물리학자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결정적 실험'(critical experiment)으로서 중력에 의한 빛의 휘어짐을 확인하기 위해 행한 1919년의 일식 관측 실험을 거의 믿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20년 아레니우스는 그 관측의 정확도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관측이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성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는 191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서 생리의학상 부분에서 그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지 않았을 경우 기하광학에 관한 공로로 물리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수상하였을 굴스트란트(Gullstrand)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초점을 맞춘 특별 보고서를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50쪽에 달하는 보고서에서 일반상대론도 특수상대론도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22년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상대성 이론의 수용은 단순한 믿음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아인슈타인은 결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견을 표명하였다.

한편 1920년 아인슈타인은 그의 광전효과에 대한 업적으로는 처음으로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곧 이어 1921년은 노벨상 위원회에 의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우선 아레니우스에 의해서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에 대한 긍정적인 첫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1922년에는 물리학 내에서의 최근의 발달과정에 친숙하였고 보아의 학생이었던 오젠(Oseen)-그는 1923년 부터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의 위원이 된다-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오젠은 여기서 이미 노벨상을 수상한 플랑크를 언급하면서 플랑크 상수 h의 해석과 관련되어 있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오젠의 이러한 평가는 그가 보아의 학생이었고 보아의 원자 모델이 아인슈타인이 광전효과에 사용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만한 것이었다. 노벨상 위원회는 오젠의 이러한 평가를 상당히 받아들인 것같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는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이런 평가가 모태갸 되어 아인슈타인은 이월된 1921년분의 노벨 물리학상을 1922년에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수상의 근거는 그의 주업적인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이론 물리학 특히 광전효과의 발견에 대한 기여"이었다.

천문학 지구과학 경시한 이유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수상과정에서 우리는 노벨상 위원회가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취급할 때 보여주었던 의사결정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모든 새로운 발견이나 현상은 어느 정도 이론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어떠한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관측이나 실험이 전혀 다른 식의 결론을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위원회는 계속 전통적인 물리학의 이론적 근거로만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보아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론물리학이 취약하였던 스웨덴의 물리학적 상황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문제는 새로운 이론물리학의 기수인 오젠이 노벨상 위원회의 위원이 된후에야 극복되게 되었다.

한편 노벨상이 물리학 화학 등의 분야 규정을 하는데 너무 경직돼 있어 천체물리학이나 지구물리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노벨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초기 노벨상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벌어진 스웨덴 과학계의 변화과정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애초에 노벨 물리학상의 수상 범위는 천문학은 제외되어 있었지만 천체물리학 지구물리학은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상연구소 소장인 힐덴부란트슨(Hildenbrandsson)이 초기의 노벨 물리학상 위원이었던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탄 직후 스웨덴의 물리학계의 상황과 노벨상위원회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하셀베르그와 그란크비스트가 죽은 후 오젠이 그후임으로 1923년 노벨 물리학상의 위원이 되었고 여기에 웁살라 대학의 원자 물리학자인 지그반(Manne Siegbahn)이 가세하였다. 이들에 의해서 노벨상선정 과정에서 이론과 실험을 동시에 다루는 원자물리학이 강조되었고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는 실험 물리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여태까지의 편견에서 크게 벗어 날 수 있었다.

이와 아울러 이들은 굴스트란트, 아레니우스와 함께 아카데미 내에 물리학 분과에서 물리학의 범위를 크게 제한하고 싶어했고, 마찬가지로 노벨 물리학상의 선정에 있어서도 그들의 이런 의도를 관철시키려 했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우선 노벨 물리학상 위원회의 위원 중 나머지 한 사람인 천체물리학자 칼하임-귈렌스쾰드(Carlheim-Gyllenskold)를 위원회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노력으로 아카데미에서 지지를 얻고 있던 칼하임을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아카데미의 물리학 분야에서 천체물리학자, 기상학자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 이후 1920년대의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 장악된 노벨상 위원회는 노벨 물리학상의 범위에서 기상학, 천체물리학, 지구물리학의 영향을 크게 제한 할 수 있게 되었다.


(표 1) 노벨상 수상자들의 스승-제자 계보
 

좋은 스승 만나야 노벨상 탄다

1901년에서 1972년까지 미국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92명의 수상자들 가운데 절반이상인 48명이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그후에 노벨상을 타게되는 수상자들 밑에서 공부한 학생 내지 포스트닥터 혹은 공동연구원이었다. 더구나 이 4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불과 71명의 노벨상 수상자인 스승 밑에서 연구를 하였다. 이것은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 스승과 제자가 같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경향이 아주 큼을 드러낸다. 즉 노벨상은 혈연관계에 의한 계승이라기 보다는 스승-제자 관계라는 강한 사회적 계승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엘리트(ultra-elite)들은 그들끼리의 스승-제자 관계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에 스승-제자 관계가 두드러지는 것은 엘리트를 후원하는 사회적 환경과도 중요한 관련이 있다. 즉 우수한 연구자가 많은 대학이나 연구소로 가려는 과학연구에서의 경쟁적 구조 아래에서는 대개의 경우 우수한 스승밑에 높은 경쟁을 똟고 들어온 우수한 인재가 모이기 마련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앞서 언급한 92명의 수상자들 중에서 하버드(13명) 콜롬비아(9명) 버클리(8명) 록펠러연구소(8명) 시카고(7명) 워싱턴(6명) 칼텍(5명) 벨연구소(4명) 스탠퍼드(4명) 코넬(3명) 일리노이(3명) 국립보건원(3명) 등 12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전체의 80%에 해당하는 수상자가 나왔으며, 수상자 전체도 불과 30개의 연구소에서 나왔다.

수상자에 관한 통계를 보면 노벨상 수상자들의 부모직업은 전문직종이 가장 많았다. 또한 스승과 제자간의 나이 차이가 16세에서 25세 사이인 경우가 많았다. 노벨상 수상자의 연령은 1901~1925년 사이에는 평균 46.6세, 1926~1950년 사이에는 51.6세, 1951~1972년 사이에는 54.2세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유명세 치르느라 연구에 지장받기도

노벨의 유언과는 달리 노벨상이 일단 사회 속에서 제도화되자 과학자들의 업적에 대한 인정의 차원을 넘어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노벨상 수상자들은 갑작스럽게 높아진 사회적 지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노벨상 상징적 권위를 가지고 과학정책이나 일반 정치문제에 개입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들의 발언은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이나 폴링처럼 이것을 이용해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등 인류를 위해 공헌했던 수상자들도 없지 않지만,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수상후 대중연설 인터뷰 TV출연 자서전 집필 학술회의 및 그밖의 여러 정치 사회집회 참가 자선사업 등 급증하는 사회적 요구로 말미암아 대개의 경우 연구업적이 그 이전에 비해서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또한 공동연구과정에서 한 사람만이 노벨상을  받을 경우에는 지금까지 공동 연구를 하던 동료와의 연구가 종결되는 일이 많다. 이미 서먹서먹해진 그들의 관계 때문에 더이상 공동연구를 하는데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한편 노벨상의 엄밀한 선정과정에도 불구하고 그 선정 성향 자체에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수상자의 선정에 있어서 이론적 업적보다는 과학적 '발견'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또한 가장 최근에 행해진 '발견'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주기율표를 발견한 멘델레프는 이미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너무 오래된 발견이란 이유로 노벨상 수상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상 당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수여하다보니 DNA가 유전에 관계되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힌 에이버리(1877~1955)는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다윈도 노벨상 못받았을 것

생리·의학상의 경우는 의학에 직접적으로 응용되는 분야의 업적만을 중시한 나머지 생물학의 이론적 진보에 기여한 업적들은 제외되는 경향이 짙었다. 만약 찰스 다윈이 20세기에 태어났다고 해도 그의 진화론은 결코 노벨상 수상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상 분야에도 문제가 있다. 수학분야가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리학과 화학분야가 명시되는 바람에 지구화학 천문학 등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과학연구 자체가 공동연구의 형태를 띠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 과학상은 계속 개인에 대한 수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연구자 중 어느 한 사람을 선정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노벨상 선정의 문제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그들의 인터뷰에서 많은 경우 수상내용이 자신의 최고 업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자주 대답하기 때문에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노벨상을 탈만한 정도의 인물이 노벨상을 타지 못한 예가 수두룩하다.


(표 2) 노벨상 못탄 노벨상급 과학자
 

과학수준의 전반적 향상이 관건

지금까지 언급했던 노벨상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들은 노벨상에 대해서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곤한다. 그러나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은 다른 상들에 비해서 상당히 엄정한 선정절차를 바탕으로 운이 좋게도 20세기의 중요한 과학자들을 커다란 실수없이 선택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아직도 노벨상은 전세계 모든 과학자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벨상 자체를 지극히 맹종적으로 우상화하는 풍토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노벨상 올림픽의 금메달쯤으로 간주하는 토양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노벨상 수상자는 고도로 집약된 초엘리트들의 집단과 그들 사이의 스승-제자적 계승관계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따라서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인 리나 양 등의 물리학자들도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혈연적 우수성 때문에 노벨상을 수상했다기 보다는 페르미를 중심으로 한 고도로 집약된 미국의 연구퐁토와 훌륭한 스승-제자간의 관계속에서 얻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한국인이 미국에서 노벨상에 도전한다는 식의 선전은 우리나라 과학발전에 별 도움이 못 된다. 그들은 미국의 과학연구풍토의 우수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지 결코 한국인의 혈연적 우수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노벨상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한국과학의 전반적 수준향상과 그 속에서 얻어지는 경쟁적 연구풍토, 그에 따른 초엘리트들의 집중화, 결과적으로 과학연구의 합리화 체계화 고도화를 꾸준히 추진하여 세계적인 과학연구의 중심지가 한국으로 옮겨지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것도 한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승-제자 관계라는 연쇄작용을 통해서 계속 배출될 것이다.

노벨상은 매스컴의 대대적인 선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연구를 지원하는 사회경제적인 제반여건과 풍토조성, 재능있는 인재들의 과학계 투신, 연구실내의 연구활동의 경쟁적인 고도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연에 대한 질서있고 체계적인 지식의 확대를 통하여 노벨상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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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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