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카토르가 1569년 발표한 동상 두 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이 든 남자요, 다른 하나는 어린 소년이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사람이다. 이름은 헤라르뒤스 메르카토르. 누구냐고? 이름은 처음 들을지 몰라도 이 세계지도. 총 18장의 지도로 돼 있으며, 이 사진은 18장을 모두 합친 모습이다.]
벨기에 북부 안트베르펜 근처의 루펠몬드라는 마을 광장에 가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메르카토르가 1569년 발표한 동상 두 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이 든 남자요, 다른 하나는 어린 소년이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사람이다. 이름은 헤라르뒤스 메르카토르. 누구냐고? 이름은 처음 들을지 몰라도 이 세계지도. 총 18장의 지도로 돼 있으며, 이 사진은 18장을 모두 합친 모습이다. 사람이 세상에 남긴 흔적을 못 봤을 리는 없다.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한 번쯤은 눈여겨보게 마련인 ‘지도’가 바로 메르카토르의 작품이다.
지난 7월 5일 브뤼셀에서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중간에 미셸린이라는 역에서 내려 열차를 갈아탄 뒤 템페스라는 작은 역에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를 타야 했다. 역무원에게 정류장 위치를 물어서 찾아갔다. 버스 기사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수첩에 ‘Rupelmonde’라고 써서 보여줬다. 옆에 서 있던 승객과 수다를 떨며 운전하던 기사가 마침내 어느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손짓했다. 내리고 보니 주위에 사람도 없는 게 분위기가 이상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가이드 개비 데푸이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로 잘 안되는 영어로 주위 풍경을 열심히 묘사하자 마을 광장에서 한 정거장 전에 내린 것 같다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가뜩이나 약속 시각에 늦어 미안한 마음으로 잠시 기다리자 길 위쪽에서 우산을 든 중년 여성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메르카토르가 태어난 곳에는 현재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M자가 표시된 빨간색 화살표는 메르카토르와 관련된 장소를 가리킨다.]
“미안합니다. 갈아타는 데서 꼬여서 늦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마침 잘 됐네요.”
푸근한 미소로 맞아준 데푸이트 씨는 광장 쪽으로 기자를 이끌던 도중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메르카토르가 태어난 곳이에요. 1512년 메르카토르가 태어났을 때는 수도원이 있었어요. 메르카토르의 아버지는 생활고 때문에 삼촌이 가톨릭교회 사제로 있는 이곳 루펠몬드로 이사를 와서 신발을 만들어 팔았어요.”
광장은 멀지 않았다. 비도 그쳐 어느덧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걷자 교회와 시장이 있는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교회 앞에는 어른 모습의 메르카토르 동상이 있었고, 길 건너편에 이를 마주 보고 어린이 모습의 동상이 있었다. 어린이 동상은 올해 3월 메르카토르 탄생 500주년을 맞아 새로 만든 것이다. 같은 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방앗간과 작은 성채가 나왔다.
“지금은 막아 놓았지만, 예전에는 배가 들어와 정박하던 곳이었어요. 메르카토르도 어린 시절, 이 방앗간에서 뛰어다니며 놀았을 거예요. 32살 때는 이단으로 몰려 저 성채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감옥을 복원해 놓았어요.”
데푸이트 씨를 따라 성채 옥상에 올라가 마을을 둘러봤다. 높지도 않은 성채였는데, 주요 장소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데푸이트 씨는 “메르카토르는 넓은 자연 속에 있는 작은 마을과 방앗간을 뛰어다니면서 놀았을 것”이라며 “고향을 사랑해서 나중에 ‘헤라뒤스 메르카토르 루펠몬다누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 붙였다”라고 설명했다.
지구가 둥그니까 문제
성장기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메르카토르는 벨기에 루뱅대에서 고등 교육을 받으며 지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16세기 초의 유럽인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고, 1522년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완수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빙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개척했다. 이런 시대에 정확한 지도는 학문적으로도 가치가 높았고, 엄청난 부도 좌지우지했다.
메르카토르는 수학자이자 지도제작자인 헤마 프리우스, 동판기술자인 가스파르 미리카 밑에서 지도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지구본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고, 25살이 되자 독립해 자기만의 정교한 지도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538년에는 처음으로 세계 지도를 만들었다.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지는 못했던 메르카토르는 세계의 여러 탐험가로부터 흘러나온 정보를 이용했다. 다른 지도 제작자도 마찬가지였다. 탐험을 후원한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정보 누설을 막으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항해가 중요했던 만큼 지도 역시 항해에 유용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지구 표면을 따라 곡선으로 움직이는 항로를 지도에 직선으로 그릴 수 있다면 항해는 더욱 편해질 터였다.
망망대해에서 항해할 때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서 배가 제대로 된 경로로 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과거에는 경선과 일정한 각을 유지하면서 움직이는 항로를 이용했다. 이 항로를 항정선이라고 한다. 항정선은 두 지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아니었지만, 조금 돌아가더라도 일정한 방향만 유지하면 돼 편리했다. 항정선을 지도에 직선으로 그리는 게 바로 메르카토르의 목표였다.
메르카토르는 당시 쓰던 원통도법을 변형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원통도법은 지구의를 원통으로 둘러싼 뒤 그 원통을 펼쳐 세계지도를 만드는 방법이다. 지도가 직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에 책으로 만들거나 벽에 걸기 편리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지도에 위선과 경선은 평행을 그리며 각각 수직으로 교차한다. 위선과 경선 사이의 간격은 모두 똑같다. 실제로는 경선이 남극과 북극에서 한 점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무시한 지도였다.
그런데 위선과 경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평행하게 나타난 지도에는 항정선이 직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지구 표면에서는 경선이 극점으로 갈수록 가까워지다가 한점에 모이기 때문이다. 극점에 가까워질수록 경선 사이의 거리가 짧아지는데, 지도를 만들 때 일정한 간격이 되도록 경선 사이를 좌우로 늘려 놓으면 항정선 또한 왜곡된다.
메르카토르가 내놓은 해결책은 단순했다. 극점에 가까울수록 좁아지는 경선을 좌우로 늘린 만큼 위선 사이의 간격도 늘린 것이다. 메르카토르는 위선 사이의 간격을 얼마나 늘려야 하는지 정교하게 계산했다. 극점에 가까워질수록 위선 사이의 간격이 커진다. 이 방법으로 정사각형 모양의 지도 모양을 유지하면서 항정선을 직선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다만, 극지방으로 갈수록 경선과 위선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 넓이는 왜곡된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린 지도에서는 극지방으로 갈수록 넓이가 커진다. 아프리카 대륙의 14분의 1에 불과한 그린란드가 거의 같은 크기로 나온다. 극점에 가까워질수록 위선 사이의 거리가 무한대로 증가하기 때문에 북극점과 남극점은 아예 지도에 표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극지방에서는 메르카토르 지도를 쓸수 없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든 지도.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위선 사이의 거리가 늘어난다.]
500년을 살아남은 지도
루펠몬드를 방문하고 며칠 뒤 이번에는 독일의 뒤스부르크로 향했다. 메르카토르는 1552년 뒤스부르크로 거처를 옮겨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메르카토르의 무덤이 있는 살바토레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앞작은 광장에는 커다란 메르카토르의 동상이 서 있었다. 예배당 안에는 메르카토르를 기리는 묘비가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분위기 있는 교회 묘지는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메르카토르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며 무작정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자료를 좀 더 자세히 찾아보고 올 걸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을 때 관광안내소가 눈에 띄었다. 들어가서 직원에게 문의했다.
“교회에 메르카토르의 무덤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때 교회가 심하게 폭격을 받아서 어떤 게 누구의 유골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덤이 파괴됐어요. 그래서 그냥 무덤을 덮고 그 위에 교회를 재건했지요.”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 직원은 뒤스부르크의 지역 박물관에 메르카토르 전시관이 있다고 알려줬다. 직원이 일러준 대로 다시 교회를 지나 강가에 자리 잡은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도 메르카토르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작은 전시관이었지
만, 메르카토르가 만든 지도와 지구의, 손수 쓴 편지 등을 볼 수 있었다. 메르카토르의 손 글씨는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 메르카토르의 이름을 딴 공연장을 발견했다. 뒤스부르크뿐 아니라 고향인 루펠몬드에서도, 그리고 현재 메르카토르 박물관이 있는 벨기에의 신트-니클라스에서도 메르카토르의 이름이 들어간 지명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메르카토르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벨기에의 신트-니클라스에서 메르카토르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 메르카토르의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볼 수 있었다.]
항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었지만, 메르카토르의 지도는 지난 500년 동안 지도의 대명사가 됐다. 항해에 유리했기 때문에 점차 널리 퍼지다가 관성적으로 쓰인 덕분이었다. 이상일 서울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후발 주자의 경우 자료가 모자라 선진국의 지도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고, 메르카토르 도법은 자기나라를 가운데 높고 싶을 때 단순히 양 옆의 위치만 바꾸면 되기 때문에 각 나라가 자기 입맛대로 만들기 쉬웠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왜곡이 적은 적도 가까운 곳을 나타낼 때는 여전히 메르카토르 도법이 널리 쓰인다. 물론 변화도 겪었다. 원통의 축을 가로로 놓은 횡축 메르카토르도법이나 축을 45° 기울이는 도법처럼 필요에 따라 변화를 가한 도법도 등장했다. 횡축 메르카토르 도법은 좁은 지역을 면적 왜곡이 적게 나타낼 수 있어 대축척지도(좁은 지역을 자세하게 나타낸 지도)에 유용하게 쓰인다. 구글 맵과 같은 온라인 지도 서비스에도 아직 메르카토르 도법을 활용한다.
거센 비판도 있었다. 메르카토르 도법이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주장이었다. 메르카토르의 지도에서 유럽은 상대적으로 넓이가 커 보이며, 그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실제 넓이보다 작게 나타난다. 유럽인이 더 안전하고 빠르게 항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제국주의를 도운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67년 독일의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는 19세기 중반 제임스 골이 발표했던 도법을 빌어 오늘날 골-페터스 도법이라고 불리는 방식을 만들었다. 골-페터스 지도는 각 나라의 실제 넓이를 반영했다. 페터스는 이 방법이 메르카토르 도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뒤스부르크에 있는 메르카토르 상.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메르카토르가 묻힌 살바토레 교회다.]
[골-페터스 지도. 극지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왜곡되는 것을 바로잡아 각국의 실제 면적을 반영했다. 흔히 보던 메르카토르 지도와 달라 어색하게 보인다.]
지도는 과학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은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지만, 표준 세계지도를 그리는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오늘날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원래 항해를 목적으로 만든 도법이니만큼 틀린 생각이 아니다. 메르카토르 도법뿐 아니라 골-페터스도법처럼 원통도법에 속하는 도법이 모두 해당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에 대한 평가가 깎이는 건 아니다. 메르카토르는 근대적인 도법을 고안하고 지도책을 편찬해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지구의, 과학·수학 기구를 만드는 장인이기도 했다. 여러 지도를 모은 지도책을 ‘아틀라스(Atlas)’라고 처음 부른 사람도 메르카토르였다. 캘리그래피(서체)에 대해 책을 쓰기도 했고, 수학이나 천문학 같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깊었다.
여전히 지도하면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떠오를 정도지만,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지도에 대해 배울 때 한 번쯤 들어 보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메르카토르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상상이 가미된 그림에 가까웠던 지도를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꿔 놓은 혁신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