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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체가 전기가 나가는 대정전이 올 여름 찾아올까. 이렇게 극단적인 정전이 장기간 일어날 확률은 낮다.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가 찾아올 확률도 있다. 예기치 못하게 전력사용량이 치솟거나, 사소한 사고로 한두 개의 발전소나 대용량 송전시스템이 운전을 멈춘다면 갑자기 모든 전력시스템이 정지하는 ‘블랙아웃’이 찾아올 수 있다.

대표적인 경고 사례가 지난해 9월 15일 일어난 전국적인 정전사고다. 9.15 정전사고는 블랙아웃 직전까지 간 전력부족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전력거래소에서 고의로 전국 각 지역의 전기를 돌아가면서 차단해 더 큰 사고를 막은 사건이다.

대정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양하다. ‘자연재해’, 또는 ‘우연찮은 사고’도 원인이 될 수 있다. 발전소 1~2곳이 갑작스럽게 멈추거나, 전력거래소에서 실수로 전력수요를 잘못 계산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고압전선이 차단되는 경우 등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대정전이 생기는 근원적인 이유는 ‘전기가 부족한 상황’이다.

블랙아웃의 무서운 점은 멀쩡한 지역까지 함께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마치 암덩어리가 온 몸에 퍼져 나가는 것과 같다. 국가적으로는 전기에너지가 충분해도 한 지역전력망에서 전기가 부족하면 일단 그곳에서 블랙아웃이 일어난다. 그리고 주변에 영향을 미쳐 차례로 전력망이 사망한다. 그리고 정전지역이 점점 넓게 퍼져나간다.

사상 최악의 대정전 사건으로 불리는 2003년 미국 동부 정전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초고압 송전선로가 나무에 접촉하면서 누전이 일어났고, 결국 그 지역 전기가 부족해 졌다. 초기에는 일부 설비만이 고장나며 작은 지역에 정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지역의 전력망을 재빨리 차단하지 못하면서 정전이 자꾸 퍼져 결국 뉴욕 등 동부 지역 전체를 멈추게 한 대규모 정전사고로 커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전기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쓰면 되지 않을까. 가전제품 출력이 약해지거나 일부에서만 전기가 끊어지면 되지 않나. 왜 전기가 부족하다고 전체가 전기를 아예 쓸 수 없게 되는 걸까.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거래소에서 직원들이 ‘전력 일일 부하 현황’ 등 수시로 변동하는 그래프를 주시하고 있다. 에어컨 사용이 잦아지는 혹서기, 전열기기 사용이 많아지는 혹한기는 전력예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거래소 직원들도 바빠진다.]

[2003년 8월 미국 동부에서 벌어진 대정전 현장. 자동차 운행이 중단되고 모든 도시가 암흑으로 변했다. 더 짙은 어둠이 깔리기 전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블랙아웃 왜 일어날까

일상생활에서는 건전지 같은 ‘직류전기’가 아니라 플러그와 전선을 통해 들어오는 ‘교류전기’를 쓴다. 교류전기는 일정한 주파수에 맞춰 전기가 파도처럼 흐름을 타고 움직인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가정으로 전기를 보낼 때 220V의 전압을 초당 60번의 리듬(60Hz의 주파수)에 맞춰 실어 보낸다. 만약 어떤 원인 때문에 전기공급이 부족해진다면, 전기는 그 특성상 전체 전력량을 유지하기 위해 저절로 주파수가 떨어지게 된다.

한국에서 팔리는 전자제품은 모두 이 전압과 주파수에 맞춰 움직인다. 그리고 ‘최저 작동전압’이나 ‘최저 작동주파수’가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장비는 보통 규격 전압이나 주파수보다 10~20% 이상 차이가 나면 동작을 멈춘다. 정밀기기는 그보다 더 작은 차이가 나도 정지하거나 고장나버린다.

만약 이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전기가 가정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가끔 과학상식에 등장하는, ‘참새가 고압선에 앉아 있어도 감전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전기란 흐름이다. 한 쪽에서 전기를 소비하는 부하회로(저항)가 있어야 전압이 발생하고 전기가 흐른다. 전기를 쓰는 장치가 없다면 아무리 전기를 보내도 전기는 흐르지 않는다.

일반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정의 전력망을 유지해주는 장치와 전자제품이 모두 멈춰버린다면 다시 정상적인 전기를 보내도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물론 일반 가정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먼저 ‘차단기’가 작동할 것이다. 잠시 후 전기가 안정화된 뒤 차단기를 다시 켜 주면 별다른 문제없이 바로 복구가 된다. 가끔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가 차단기를 다시 켜고 온 기억이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우리 집’이 아니라 전력망 전체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블랙아웃은 전력망에서 전압과 주파수가 심하게 변하면서 발생한다. 일부지역이라도 전기 사용량이 공급량보다 많아지면 전력망 전체의 전압과 주파수가 크게 떨어진다. 그 결과 전력망을 관리하는 시스템마저 정지해 버리면 결국 전력망 전체가 ‘사망’한다. 마지막엔 모든 발전기마저 전기를 공급받지 못해 전기를 만들지 못하면서 정지되고, 결국 완전한 암흑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블랙아웃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정체다. 한국전기연구원 윤재영 책임연구원은 “전압과 주파수는 전력망에서 사람의 혈압과 심장박동수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전기를 공급하는 고압 송전선도 블랙아웃을 일으킬 수 있는 큰 변수다. 전기 사용량이 공급량을 초과하면 초고압 송전선 내부에서 전압이 급격히 저하되며, 송전능력도 떨어진다. 만약 일부 고압 송전선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다른 송전선으로 전력수송량이 몰리다 보니 그 송전선 내부의 전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낮아진 전압은 송전능력을 더 낮추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블랙아웃 현상은 더 빨리 진행된다.

문제는 앞서 지적한 대로 블랙아웃을 그대로 방치하면 한 지역(하나의 전력망)에서 그치지 않고 정전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전력망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산 시내가 블랙아웃이 될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을 방치하면 부산시내와 전력망이 연결돼 있는, 고리원전 1, 2호기가 있는 기장 지역도 덩달아 전기가 부족해질 것이다. 한 집에서 수돗물을 대량으로 쓰면 마을 전체가 수도 공급량이 부족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파수나 전압상태가 급격히 저하되면 급기야 주변 발전기, 예를 들어 부산 인근의 고리원전 1, 2호기의 정상운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고리원전에서 전력을 공급받던 대구 창원 지역 일대도 전기 공급이 부족해진다. 공급전력이 부족하니 고압송전선도 하나둘씩 기능이 마비된다. 결국 정전지역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다가 마지막엔 온 나라가 정전에 빠져들게 된다.





대정전 어떻게 복구하나

블랙아웃을 예방하는 방법은 발전소를 충분히 짓고, 지역에 따라 전력예비량에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안전한 전력관리시스템을 갖추는 것뿐이다. 더불어 국민이 함께 전기 낭비를 줄여야 한다. 만약 국가전체의 전기공급량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할까. 일부러 전기공급을 끊어 사용량을 강제로라도 줄여야 한다. 전기 사용이 가장 많은 오후 2~4시에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제한송전’을 하거나, 전국을 수십 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한 곳씩 돌아가면서 전기를 차단하는 지역순환정전도 방법 중 하나다. 지난해 9.15 정전사태도 블랙아웃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과감하게 지역순환정전을 한 결과였다.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국가 전체의 대정전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암 조직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블랙아웃은 충분한 발전량을 확보하고 있어도 발생할 수 있다. 천재지변으로 고압송전선이 끊어지거나, 전력관리시스템이 고장나도 전기 부족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즉시 문제가 생긴 전력망을 외부 전력망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하면 일부 지역의 정전만으로 끝낼 수 있다. 최신 전력관리시스템에선 전력망 연결과 차단을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할 수 있다. 전력망을 정비한 뒤 다시 연결하면 된다.

만일 우리나라 전체가 블랙아웃에 빠져든다면 어떻게 될까. 완전복구에 최소 3일 이상, 길게는 10일 이상 걸릴 수 있다. ‘발전기만 다시 켜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전기가 있어야 발전기도 다시 켤 수 있는데, 이미 전력망이 죽어 있다. 그러니 우선 ‘발전기를 켤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지능형전력망을 유지하려면 가장 먼저 ‘대용량 전기저장장치(ESS)’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진창수 책임연구원이 신개념 ESS인 ‘레독스 플로 배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배터리는 전기저장 공간과 전압방출 부분이 분리돼 있기 때문에 액체 탱크만 추가로 연결하면 충전량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이 때는 블랙아웃이 벌어지는 것과 반대의 순서로 전력망을 조금씩 살려 나가야 한다. 우선 발전소와 연결된 외부 전력망을 모두 차단한다. 그리고 소형 자가발전기 등을 이용해 발전기 내부 시설 중, 전기생산에 꼭 필요한 시설부터 자체 전기 공급을 시작한다. 그 다음 다시 발전기를 가동시킨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중소형 발전소와 변전소, 전력거래소 등 전기를 만들고 나눠주는 시설부터 전기 공급을 시작한다. 인근의 전기 생산 시설이 모두 살아나면, 다시 인근 주변 지역부터 전기를 공급한다. 물론 전체 전력망과 분리하고 ‘우리 동네’부터 살린다.

이렇게 지역 전기가 살아나면, 일부 전기를 가까운 대형발전소로 먼저 보내 준다. 전기를 받아 살아난 대형 발전소는 다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고, 주변 지역부터 전기를 공급한다. 이렇게 발전이 가능한 지역을 하나둘씩 넓혀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3~4일, 길게는 10일 정도가 걸린다. 만일 전국의 전력망이 죽어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각종 문제로 복구조차 늦어진다면 전국적인 대정전이 며칠이고 계속될 수 있다. 물론 전력회사도 비상대비책을 세워두고 있긴 하다. 대정전 사태에 대비해 발 빠르게 자체기동이 가능한 발전소를 전국 곳곳에 미리 지정해 뒀다. 이런 작업은 빠른 시간 안에 발전기를 켤 수 있는 가스터빈 발전소 등이 주로 담당한다. 전력회사는 전국적인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각 지역별로 ‘A라는 발전소를 가장 먼저 살린다, B지역의 전력거래소를 두 번째로 살린다’는 복구시나리오를 준비해 놓고 있다.

이 절차에 따라 복구를 진행하면 재가동 시간이 빠른 발전소는 최소 몇 시간 안에 다시 전력공급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전체를 며칠 만에 완전히 복구하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윤재영 박사는 “원전은 한 번 중단되면 철저한 안전점검 등을 거쳐야 하므로 재가동에 적어도 며칠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전에는 화력발전소, 가스터빈발전소 등을 최대한 활용해 제한송전, 순환송전을 하며 견뎌야 한다.

 


2012년 여름 무사히 넘어가려면

올 여름 우리나라는 안전할까. 우선 대정전 사태까지 갈 우려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력관리시스템은 전압과 주파수 유지율이나 정전시간 등 전기품질면에서 꽤 뛰어나다. 우수한 관리시스템도 갖추고 있어서, 전기가 어느 정도로 부족하고, 어느 지역에 얼마만큼 전기가 필요한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지난해와 같은 순환정전 사태가 벌어질 수는 있지만, 전국 전력망이 꺼지는 ‘블랙아웃’ 사태는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올여름을 무탈하게 넘기는 게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전력 공급은 줄고 있는데 사용량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 예비전력량이 400만kW 이하로 떨어지면 전국 각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거래소엔 비상이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대규모 공장 몇 개가 가동을 시작하거나, 발전소 한두 개가 정지하면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전력은 최근 예비전력이 부족할 것 같으면 미리 그 지역 주민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전기 절약을 권장하고 있다.

올해 국내 전기의 공급이 줄어든 까닭은 가동이 중단된 발전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5월 현재 고리 1호기(60만kW), 울진 4호기(100만kW), 신월성 1호기(100만kW) 등 세 곳의 원자력발전기와 보령 1, 2호기 화력발전기(100만kW)가 고장과 화재로 멈췄다. 이들의 전력생산량은 360만kW에 달한다. 현재 전국의 전력공급량은 지난해 5월에 비해 9% 정도 줄어든 6341만kW다. 하지만 전력소비량은 지난해보다 173만kW나 늘어났다. 지난해보다 더위가 빨리 찾아오면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가동하는 등 냉방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력생산이 중단된 발전소의 정비, 수리를 6월 말까지 마칠 예정이다. 하지만 지난해에 비해 신설된 발전소는 아직 한 기도 없다. 더구나 8월 12일까지는 전력 수요가 많은 여수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최근엔 전기사용량이 공급량을 위협하는 전력피크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첨단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대용량 전기저장장치(ESS)를 설치해 밤에 전기를 충전하고, 낮에 전기를 공급하는 방법 등이다. 또 비상 상황에서는 전기사용이 많은 기업체, 공공기관을 골라 우선 전기를 차단하는 기법도 있다.

한국전기연구원 이창호 전력산업연구센터장은 “우리나라는 석유화학, 철강 등 전기 다소비 산업 비율이 높아 전력소비가 많은 구조”라며 “전력관리 기술 개발과 함께, 산업체도 일반 가정처럼 ‘차등누진세(전기 사용량이 많을수록 점점 더 비싼 요금을 받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 예비전력량 추이. 2010년부터 예비율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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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안산=전승민 기자 | 도움말 윤재영 한국전기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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