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야,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세미-22(Semi-22) 행성에 으리으리한 고가도로가 들어선대. 애들 난리났잖아. 고가도로가 세워지면 자기가 제일 먼저 빛의 속도로 건너갈 거라는 둥 자랑이 아주 가관이야.”

“그래? 2년마다 도로 길이를 줄이더니 이제 아예 고가도로를 만들었구만. 매일 수백 억, 수천 억 번씩 왔다갔다 하는 게 지겨웠는데 고가도로라 스릴은 더 있겠네.”

“응. 나도 한번 세미-22 행성에 가보려고. 은근히 기대되는걸.”


이곳은 인간이 실리콘 덩어리로 만든 반도체 행성이다. 반도체 행성은 사실 수억 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뤄진 전자회로다. 이곳 주민이 바로 전자다. 인간이 반도체를 만든 게 수십 년 전이니 전자도 반도체 행성에 수십 년동안 살아온 셈이다.

트랜지스터 하나 안에는 전자들이 평생 왕복해야 하는 도로가 있다. 전문용어로는 공핍 영역 또는 채널이라고 부른다. 진짜 도로 위에 신호등이 있듯이 전자들의 도로 위에도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장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게이트(Gate)’다. 게이트에서 전압을 보내면 채널(도로)이 열리며 전자가 흐른다. 전류가 흐르는 셈이다. 반대로 전압을 끊으면 채널이 닫히며 전류가 차단된다. 반도체 행성에서는 전자들이
이런 동작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런데 반도체 행성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평면이었던 도로가 입체인 고가도로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3D 반도체’. 웅성웅성… 수군수군…, 행성에 사는 모든 전자들이 고가도로 때문에 난리다. 길이라고 해봤자 몇십 나노미터(nm)에 불과한 도로가 수억 개 이상 모여 있는 반도체 행성.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노미터(nm) : 10억분의 1m. 이 글에서는 ‘나노’로 표현한다.


딴길로 새는 무법자 전자 막아라

“가뜩이나 비좁은데 세미-22 행성에 고가도로를 몇 개나 놓는대?”

“글쎄, 우리 행성은 약 10억 개 가량이니까 비슷할 것 같은데?”

“아냐. 세미-22 행성은 우리 행성과 크기가 같지만 도로는 14억 개나 넣을 수 있대. 우리 행성은 도로 길이가 32나노미터(nm)지만 세미-22는 22nm에 불과하거든.”

“그나저나 시끄러울 것 같아 큰일이야. 더 많은 도로가 들어서야 된다며 인간들이 도로 길이를 계속 줄이고 있잖아. 2년마다 한 번씩 하는 대공사도 시끄러운데 옆 동네에서 고가도로까지 만들면… 아휴, 끔찍하다.”

“그러게 말이야. 작년에 세미-22에서 도로 길이를 22nm로 줄이면서 얼마나 시끄러웠어.”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도로를 고가도로로 바꾸는 거래?”

“다른 길로 새는 전자 녀석들 잡으려는 거래. 우리 행성에서도 그 녀석들 잡으려고 실리콘에 전자가 지나지 못하는 다른 물질 집어넣는다고 한바탕 소란이 있었잖아.”


세미-32 행성은 지난 2009년 상용화됐던 32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진 반도체다. 이를 더 줄여 22나노 공정으로 만든 세미-22 행성이 지난해 등장했다. 첨단 반도체를 개발했다는 뉴스에는 32나노, 22나노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이 말은 트랜지스터에서 전자가 흐르는 채널의 길이다. 4월 말 같은 22나노 공정이지만 채널을 3D 입체로 만든 반도체가 처음으로 시장에 나왔다. 인텔이 선보이는 ‘아이비브릿지’라는 CPU 반도체다. 130나노, 90나노, 65나노, 45나노, 32나노, 22나노로 채널 길이를 줄여오던 반도체가 이제 근본적인 형태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반도체 행성에 고가도로를 세우려는 걸까. 반도체 행성은 끊임없이 도로 길이를 줄여왔다. 더 많은 전자가 흐르게 하기 위해서인데 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하자. 그런데 도로 길이를 줄이고 줄이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다. 도로를 벗어난 전자들이 신호가 없는 상태에서도 도로를 건너가는 것이다. 워낙 도로가 짧아졌기 때문이다. 이를 누설 전류(Leakage Current)라 한다. 이는 반도체 행성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호를 지켜야 명령을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데 누설 전류는 신호를 무시해 오작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류는 왜 지금까지 도로(채널) 길이를 줄여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반도체에 집적시켜 왔을까. 왜 22나노에서 10나노 공정으로 가지 않고 3D 반도체라는 해결책을 내놓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 보자.







반도체 행성의 탄생과 피할 수 없는 운명

반도체에는 중앙처리장치로 불리는 CPU와 저장장치인 메모리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트랜지스터를 기본 단위로 만들어진다. 트랜지스터는 일반적으로 모래에서 순도가 높은 실리콘 결정을 뽑아내 만든다. 원통 형태로 만들어진 실리콘을 얇게 잘라 웨이퍼를 만들고 웨이퍼에 회로를 그린다. 회로 위에 몇 십 나노미터 크기의 트랜지스터를 구성한다. 트랜지스터 하나는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 게이트로 구성된다. 이렇게 만든 트랜지스터를 웨이퍼에서 잘라 별도로 만든 칩셋에 집적시킨 것이 반도체다.

트랜지스터의 핵심 기능은 ‘스위칭’이다. 말 그대로 전류를 흐르게 했다가 끊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전류가 흐를 땐 1, 끊을 땐 0이라는 디지털 신호를 갖는다. 무수한 0과 1의 조합에 맞춰 트랜지스터가 전류를 흐르게 했다 끊었다가 하며 복잡한 계산을 하는 장치가 바로 반도체다. 반도체 행성에 사는 전자는 평생 동안 게이트 신호에 따라 흘렀다 끊어졌다를 반복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반도체의 필연적인 운명은 집적도와 성능을 높이는 것이다. 1971년 최초의 386 CPU 칩셋이었던 ‘인텔 4004’에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가 있었다. 트랜지스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다. 때문에 반도체 성능을 개선하려면 집적도를 어떻게 올리느냐가 관건이 된다.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또다른 운명은 전력 소모를 줄이는 것이다. 반도체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트랜지스터 개수가 늘어날수록 증가한다. 요약하자면 집적도를 높이고 트랜지스터를 작동시키는 전력을 줄이는 것. 과학자들의 오랜 숙제이자 반도체의 운명이다.



도로 줄이고 줄이다 반도체 행성 난리났네

이번엔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있는 세미-22 행성으로 가보자.

“우리 행성은 도로 길이가 다른 행성에 비해 심하게 짧잖아. 그러다보니 도로가 아닌 다른 길로 다니는 애들을 막으려고 지난해 대대적인 공사를 했지 아마.”

“맞어. 우리 전자들이 다니지 못하는 물질로 도로 아래를 메우는 공사였잖아. 돈 많이 깨졌대. 그나저나 내년쯤 도로 길이를 22나노에
서 더 짧게 줄이는 줄 알았더니 고가도로를 만들 줄은 예상 못했네.”

“그러게 말이야. 들리는 얘기로는 고가도로 아래는 위험하니까 다른 길로 새는 애들도 줄어든다고 해. 또 입체 고가도로니까 도로 윗면은 물론이고 양 옆면으로 한번에 많은 전자들이 움직일 수 있어서 이래저래 유리한 모양이야.”

“좀 더 좋아진다고 하니 일단 지켜보자구. 공사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그려.”


반도체가 22나노 공정까지 발전하면서 문제점이 두 가지 생겼다. 전류의 누설과 스위칭 속도 저하다. 우선 전류가 새는 것은 트랜지스터 구조상 도로가 아닌 부분도 같은 실리콘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도로 길이가 길었을 때, 즉 전류가 흐르는 부분이 길어지면 저항도 커져 누설 전류가 적절히 차단됐다. 하지만 채널이 점점 짧아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누설전류는 오작동을 발생시킨다. 오작동을 메모리 반도체에 대입해 보면 저장했던 주소록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를 막기 위한 것이 절연체로 불리는 ‘실리콘온인슐레이터(SOI)’라는 기술이다. 세미-22 행성에서 지난해 도로 아래를 다른 물질로 메우는 공사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웨이퍼를 만들 때 실리콘 기판 표면과 그 아래에 있는 실리콘 사이에 절연체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제조비용이 10% 올라간다는 단점이 있다.

두 번째로 전류를 흐르게 하거나 차단하는 스위칭이 너무 느려지는 문제가 생겼다. 채널이 짧으면 저전력 설계가 가능해진다. 길이가 짧아진 만큼 상대적으로 적은 전압으로 전류를 흘러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널 길이가 짧아지면 한번에 전류가 많이 흐르기 어렵다. 원하는 시점에 전류가 빠르게 흘려서 디지털 신호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채널이 짧으면 스위칭 속도가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트랜지스터의 채널 길이를 22나노 공정에서 더 줄이면 어떻게 될까. 이인구 인텔코리아 상무는 “공정을 더 줄이면 누설 전류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이고 저전력 설계도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결론적으로 트랜지스터에 사용되는 물질을 바꾸거나 설계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물질을 바꾸면 비용이 더 들게 돼 기업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설계 구조를 바꾸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텔이라는 굴지의 반도체 기업이 내린 해결책도 반도체 구조를 3D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가 도로가 많아지면

도로 설계자가 고가도로를 만들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듯 인텔이 내놓는 3D 반도체, 즉 3D 트랜지스터도 공간을 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존 트랜지스터는 채널이 평면이어서 전자가 지나는 길도 한가지였다. 3D 트랜지스터는 양쪽 옆과 상단을 합해 3면으로 전류를 흘려 보낸다.

전류가 흐르는 채널이 고가도로처럼 솟아오르면서 실리콘 웨이퍼 아래로 새는 전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채널이 짧은 동시에 전류가 흐르는 면적이 늘어나면서 더욱 적은 전압으로 전류를 흘러보낼 수 있어 전력 사용도 적다.

특히 전류가 처음 흐르게 만들기 위한 임계전압도 낮출 수 있다. 임계전압은 수도꼭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물이 나오게 하려면 수도꼭지를 돌려야 하는데 처음에 물이 나오게 돌리는 힘이 임계전압이다. 인텔 연구진의 실험 결과 3D 트랜지스터의 임계전압은 평면형 트랜지스터에 비해 약 30% 이상 줄어들었다. 이종호 서울대 전기·정보 공학부 교수는 “3D 반도체는 누설전류가 줄어들고 스위칭 속도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특징이 가져다 주는 이점은 명백하다. 태블릿PC, 스마트폰, 울트라북, 전자책 리더기 등 다양한 모바일 기기가 소모하는 전력이 줄어들며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소모하는 전력이 줄어들면 더 오래 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 전력을 적게 소모하면 열도 줄어든다. 보통 노트북이 쓰는 전력은 30W다. 30W의 전구를 직접 만져 본 사람은 어느 정도 뜨거운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전력으로 설계된 3D 반도체는 이런 발열도 줄일 수 있다.

반도체는 얼마나 더 발전할까. 오래전 반도체의 한계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반도체 기술자들은 나노 공정에 진입하며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22나노 공정이라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자 설계 구조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3D 트랜지스터 다음은 무엇일까. 어떤 구조가 등장할지, 아예 반도체 물질을 바꿀지 지금으로선 예상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반도체 행성의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정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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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과학동아 정보

  •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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