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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도전하는 허준의 후예

한의학이 세계의학으로 발돋움하려면 여러 자연과학분야와의 교류가 필요하다.
 

경희대 한의학과 4학년 최호영학생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말이 있다.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잎으로 가을이 온 것을 안다는 뜻으로 자연의 변화는 이렇게 낙엽 하나의 움직임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의 감정변화나 질병도 역시 꼭 물어보거나 검사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얼굴표정이나 자세와 행동의 변화, 말씨만으로도 그 사람의 감정을 충분히 알 수 있을진대 만약 인간에 대한 경험이 많은 의사라면 그의 병들음(물론 서양의학의 질병개념은 아니다)까지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인간에 대한 많은 관찰과 숙고가 필요하겠다.

서양에선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지만, 동양에서는 이렇게 떨어지는 낙엽 한 잎으로 가을을 알고, 달이 차면 기우는 이치를 소화해 이 섭리를 인간에 적용하게 됐다. 자연계의 변화는 인간에 영향을 주고, 그에 의한 인간의 반응은 상응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천인상응사상(天人相應思想)으로 동양의학의 기본정신이다. 따라서 자연계의 변화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분석이 한의사에게는 필요하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대립과 통일을 거듭한다는 음양론(陰陽論)과 각각의 변화가 서로 생성하고 억제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오행론(五行論), 기후의 변화가 인체 생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도 동양의학의 철학적 바탕이다.

대부분 동양권의 나라들이 그렇듯이 우리의 한의학도 본래 우리민족의 자생적인 의학이 중국의학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의 약초서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중국의학의 수용은 아니어서 고려시대에 이르면 많은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약제, 즉 향약(鄕藥)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됐고, 조선시대에는 허준(許浚)이라는 걸출한 학자가 이제까지의 의학을 집대성했다.

임진왜란기에는 사암도인(舍岩道人)이란 무명인이 체계적인 오행침법(五行鍼法)을 만들었고, 조선말에는 이제마(李濟馬)가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우리민족만의 독창적인 의학이론 체계를 정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의학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일제(日帝)의 민족의학 핍박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의 한의학은 근근히 그 명맥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야 비로소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져 동양의학대학으로 출발한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필두로 길지않은 근대식 대학교육의 역사 속에 최근까지 전국에 아홉개의 한의과대학이 생겨났다.

●- 자연계의 섭리를 인간에 적용

나의 한의과대학 11학기동안의 생활은 피곤함의 연속이었다(한의과 대학은 의과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과 2년 본과 4년의 과정을 갖고 있다). 숱한 수시시험과 구술시험에 시달리며 '하루는 왜 24시간 뿐일까' 안타까워 했고 심지어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우둔할까 한탄하기도 했었다.

고3시간표와 비슷했던 아니 더 과중했던 1학년 1학기의 시간표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고, 감초 인삼 대추 생강 녹용 정도의 단어밖에 몰랐던 내게 한의학의 새로운 이론과 거의 한문으로 된 교과서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이전에 압박감을 주고 말았다.

그래서 그 탈출구로 나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됐다. 아니 한의학이 내게 새로운 관심거리를 준 셈인데 다 보지도 못할 책을 무조건 사 모으는 취미가 생긴 것이다.

입학당시의 나는 전공에 관한 한 가히 문맹자였고, 또 특별히 공부에 대한 조언을 얻을만한 분도 교수님을 제외하고는 없었기에, 자연히 한의학에 도움이 되리라는 책들을 하나둘씩 모으게 됐다. 그렇게 모은 책들이 이제는 방바닥에 깔린 돗자리만한 벽을 두군데나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부한 과목을 살펴보면 처음 3학기동안에는 교양과목과 한의학개론 의사학 의학한문 생리학 중국어 해부학 발생학 생활학 의학통계 등이 주요과목이었다. 이런 과목을 통해서 전공에 대한 기초를 다지게 되는데, 특히 학사(學史) 공부를 통해 인간을 직접 대상으로 한 수십만년의 임상실험의 토대 위에 합리적이고 전체성과 균형을 중시하는 이론을 세운 과학이 바로 한의학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부학은 입학 당시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과목이었다. 설마 한의대에서 해부학을 공부하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비록 힘은 들었지만 나로선 귀중한 경험을 한 것같다. 직접 인체를 해부할 때의 그 설레임 진지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생명에 대해 경외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 다음 4학기 동안에는 본초학(本草學) 방제학(方劑學) 경혈학(經六學) 병리학원전 진단학 조직학 미생물학 양방생리학 양방병리학 예방의학 약리학 등을 공부했다. 모두가 전공필수 과목으로 한약재와 처방구성법에 대해 배웠고, 침을 놓는 자리인 경혈과 인체의 기(氣)가 흐르는 길인 유주 등 침구학의 기초원리를 익혔다.

그 중에서도 본과 3학년 2학기에서 본과 4학년 1학기까지 병원에서 환자를 직접 관찰하며 공부했던 임상실습은 부족한 공부에 대한 반성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도전 의욕을 갖게 해 주었다.

●- 국공립대학·연구소 하나도 없어

한의학은 한의학자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유사이래로 민중과 함께 호흡했고, 그 유효성으로 현재까지도 국민보건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민족'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역대의 고전들이 아직 잘 정리되지 않았고, 학술이론과 용어가 어려워 20세기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여러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한의학하면 보약 사주팔자 관상 할아버지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 같다.

서양의학이 의학자들만의 힘으로 현재의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닌 것처럼, 한의학도 여러 자연과학 공학분야와의 교류가 필요하다. 생물학 물리학 생화학 의공학 약리학 약제학 전기전자공학 등은 한의학이론을 실증하고 객관성을 부여하여 한의학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한의학의 신비로운 베일을 걷어 버리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의학이 세계의학으로 발돋움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것이다.

또 한의학의 풍부한 경험과 아이디어는 다른 학문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자료를 제공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족의학 말살을 기도한 일제시대의 핍박 이후 한의학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단 한개의 국공립한의학연구소나 병원, 국공립한의과대학도 갖지 못한 실정이다. 지원과 투자의 부족은 한의학자들의 연구 의욕을 꺾고 있으나,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도 발전해 온 것은 선배들의 노력과 땀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21세기에 사는 젊은 한의학도로서 도전의 꿈을 키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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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최호영 4학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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