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나주 전라남도농업기술원 근처 논에 위치한 자연 둠벙. 논과 논 사이에 마련된 작은 물 웅덩이다. 겨울이지만 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어, 논과 함께 농촌 생태계의 허브를 이룬다.]
지난 1월 6일 전남 나주시 산포면. 전라남도농업기술원에서 차로 5분쯤 더 가자 길 옆으로 작은 논이 펼쳐졌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오후였지만 논 위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이랑을 따라 호랑이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무늬가 끊어지며 마치 태극을 그리듯 어긋나는 부분이 보였다. 주변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생태연못 ‘둠벙’입니다.”
김도익 전라남도농업기술원 친환경연구소 작물보호 실장이 말했다. 둠벙은 농촌에서 논 옆 또는 사이에 만든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여름 내내 물에 잠겨 있어야 하는 논에 물을 안정적으로 대기 위해 만들었다. 예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곳도 있고 최근에 새로 만든 곳도 있다. 이 곳은 예전부터 있었던 곳이다. 흔히 생태연못이라고도 부르지만 지름이 4~5m, 깊이가 40~50cm 정도로 연못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작다. 물론 규모가 큰 둠벙도 없지는 않다.
김 실장과 작물보호실 최덕수, 고숙주 박사와 함께 논안에 들어가 봤다. 지름이 7~8m 정도 되는 원형 모양의 웅덩이가 나타났다. 겨울이지만 안에는 물도 제법 고여 있었다.
논의 물과 전통 생태계
“자연적으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모든 둠벙이 겨울에 물이 차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김 실장이 말했다. 물 웅덩이인 둠벙이 겨울이라고 마른다는 사실이 얼핏 이상하게 들렸다.
“사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농사를 위해 만든 웅덩이라 겨울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논에서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2주 전부터 물을 빼야 하거든요.”
또다른 이유는 이모작이다. 최근에는 농촌에서도 겨울에 논을 놀리지 않고 다른 작물을 심는데, 이 때 심는 작물들이 물과 친하지 않다. 며칠 뒤 서울에서 만난 오충현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는 “이모작 작물로 보리와 마늘이 대표적”이라며 “특히 요즘 남부지방에서는 대부분 마늘을 심는데, 물을 뺀 상태에서 심어야 잘 자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취재와 자료수집을 위해 찾은 나주와 해남의 논에는 연두빛 마늘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흙은 1월인데도 붉은 황토빛이었고, 물기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유 말고도 농촌에서 물 자체가 귀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저서 ‘흐르는 강물따라’에서 “땅속으로 스며드는 물이 아까워 시골 도랑에는 차츰 콘크리트가 놓이고 있다”며 “이런 변화는 여름에 더 많은 물을 논에 공급할지 몰라도 지하로 들어가는 양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수가 돼 논까지 흘러야 하는 물이 콘크리트 수로 때문에 논과 분리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부러 물을 대지 않으면 논은 마른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겨울철 논에서 물을 빼는 게 과연 정답일까. 논은 작물을 생산하는 곳이지만 생태학적으로는 엄연히 습지다. 다른 곳에서 키운 모를 옮겨 심는 5월부터 수확을 2주 앞둔 초가을까지 여름 내내 논에는 물이 차 있다(실제로는 모를 옮겨 심은 뒤 45일쯤 지난 뒤 잠시 물을 모두 빼는 ‘중간 물떼기’ 과정이 있기 때문에 계속 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논은 다양한 습지 동물이 사는 공간이 된다. 이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포식자도 찾아온다. 여름 푸른 논에 하얀 백로가 앉아 있는 익숙한 광경은 논이 농촌 생태계에서 중요한 허브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둠벙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직접 보여 드리죠.”
김 실장과 최 박사가 큰 잠자리채처럼 생긴 채취도구와 시료병을 들고 나섰다. 채취도구로 수생 식물이 있는 곳 부근의 물을 긁듯이 퍼 올리자 그물에 민물새우와 잠자리 유충 등 손톱보다 작은 동물들이 딸려 올라왔다. 둠벙 바닥 쪽에서 채취하자 더 많은 동물이 올라왔다. 식물도 여럿 보였다. 추운 겨울에 이렇게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니 놀라웠다.
“이 동물들을 하나하나 시료 병에 담아 동정(종을 구분하는 작업)합니다. 그런 뒤 종의 수와 개체수를 바탕으로 다양성을 비교합니다.”

사라진 둠벙 다시 만든다
김 실장이 하는 연구는 사라진 둠벙을 대신해 만들어주는 ‘인공 둠벙’의 생태다. 오늘날 농촌에서 둠벙을 찾기가 쉽지 않다. 농지 구획정리를 하면서 많이 메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둠벙이 지닌 생태적 가치가 다시 주목 받자 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전라남도와 전남농업기술원 역시 일찍부터 둠벙 복원과 연구에 나섰다.
전남도청은 2007년부터 인공 둠벙을 만드는 농가에게 지원금을 주며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2007년 강진, 담양 등 8개 시군에서 12개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던 인공 둠벙이 2009년 이후 매년 수십 개씩 늘어났다. 2010년까지 모두 177개가 새로 생겼다.

농업기술원에서는 인공 둠벙이 자연 둠벙에 비해 생물의 종다양성과 수질이 얼마나 다른지를 조사했다. 이미 2009년에 한 차례 연구를 끝냈고, 작년 5월과 8월, 11월 세 차례에 걸쳐 다시 한번 조사했다. 수질은 큰 차이가 없었다. 김병호 연구사는 “수질 측면에서는 인공과 자연 둠벙에 특별히 장점도 단점도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생물은 차이가 났다. 인공 둠벙에서 채집된 개체수가 2009년에 비해 1.5배가 늘었다. 특히 2009년에 비해 기온이 1.7~4.5℃ 낮아 자연 둠벙마저 개체수가 줄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김 실장은 “생물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 둠벙처럼 안정적이 될지 등을 계속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논 또는 논 주변에 겨울에도 물이 있을 경우 어떤 장점이 있을지도 연구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겨울철에도 논 주변 웅덩이에서 물을 빼지 않는다(이것을 ‘동계담수’라고 부른다). 이런 농법이 농사 또는 생태학적으로 이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을까 해서다.
이를 위해 작년 한 해 동안 전남에서 일본과 비슷한 방법으로 겨울 웅덩이에 물을 대놓는 농가를 찾아 영향을 조사했다. 대상지가 워낙 적은데다 웅덩이의 조건이 모두 달라 정확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웠지만, 조사 결과 생태계 변화를 일부 발견할 수 있었다. 생물 개체수와 다양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약간 높아졌다. 실지렁이 수가 많아졌고 관찰 되는 종 수도 늘었다. 겨울철에 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농사 측면에서는 아직 이점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농민들은 ‘논이 죽이 된다’며 싫어하더라구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논에서는 웅덩이에 받아둔 물이 서서히 흙에 스며들며 섞여 이웃한 논을 질퍽하게 만들었다. 김 실장은 “일본과 우리나라는 흙의 성질이 다르다”며 “우리나라의 흙은 물과 흙이 더 잘 섞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그 이유를 좀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겨울철 둠벙에 물을 받거나 나아가 논에 물대기를 해서 농촌 생태계를 살리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농사에도 도움이 되는 상생의 방안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