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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학생들이 유학 오는 대학으로 발전할 것”

특별기획 II | 포스텍 25주년 세계로 비상하다



지난 1986년 ‘한국 최초 연구중심대학’을 내세우며 포항공대로 문을 연 포스텍(POSTECH)이 지난해 12월 3일 25주년을 맞았다. 포스텍은 이날 열린 25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천명했다. 외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 오고 싶을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교가 되겠다는 것이다.




4세대방사광가속기, 포스텍 철학 담겨

찬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12월 중순 포스텍 25년 성과와 앞으로의 비전을 듣기 위해 포항을 찾았다. 먼저 소개받은 곳은 단연 포항방사광가속기. 1995년 개방 이후 총 7127건의 연구 과제가 수행될 정도로 기초 과학기술 연구의 핵심 시설로 자리잡은 곳이다.

‘빛공장’으로 불리는 포항방사광가속기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전자를 원운동시켜 발생하는 전자기파를 이용해 물질의 구조와 광화학 반응 등을 분석한다.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 연구를 비롯해 의학, 생명공학, 기계/전자공학, 반도체, 화학공학, 재료공학, 철강 등 쓰임새가 팔방미인이다. 방문 당시에는 성능 개선 작업 여파로 가동이 되지 않았지만 링 모양의 가속기 내부에 꽉 들어차 있는 빔라인(각 목적에 맞게 구축된 연구실험실) 30개는 과학자들을 손님으로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방사광가속기 설립에 대한 일화는 포스텍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당시 김호길 초대 학장은 최근 타계한 박태준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에게 방사광가속기 건립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김호길 박사를 초대 학장으로 낙점한 박 이사장에게 김 박사는 방사광가속기만 건립해주면 초대학장이든 총장이든 뭐든 하겠다고 한 것이다. 도대체 방사광가속기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느냐는 박 이사장의 물음에 김 박사는 ‘노벨상 제조기’라는 답을 내놨다. 이 답을 들은 박 이사장이 흔쾌히 방사광가속기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5년이 된 포스텍이 비교적 설립 초기에 방사광가속기 건립을 결정한 것은 포스텍 졸업생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바라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방사광가속기 옆으로 가속기가 있는 부지보다 훨씬 넓은 공터로 굴삭기가 바삐 움직였다. 제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 현장이다. 현재 운용중인 제3세대 가속기와는 전자기파 이동속도가 차원이 다르다. 4세대 방사광은 수십억분의 1초보다 빠른 광원으로 화학촉매반응, 분자결합 반응, 생체 반응과 같은 현상을 분석할 수 있다. 10억분의 1m 규모의 매우 짧은 파장으로 나노 및 펨토 크기의 물질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구축중이다.

현장을 소개한 진숙현 홍보팀장은 방사광가속기의 존재 의의를 한 사례로 설명했다. 재작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신종플루 치료약인 ‘타미플루’가 단기간 내에 개발돼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방사광가속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종플루에 감염된 세포 구조를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빠르게 확인한 덕분에 그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의 구조와 부작용 원리를 밝혀내 ‘네이처(Nature)’ 표지논문으로 게재된 사례는 유명하다. 삼성 휴대전화 역시 잦은 고장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포항방사광가속기를 활용했다. 구조 분석을 의뢰한 결과 휴대전화 LCD 창과 회로 연결부위의 접촉불량을 밝혀내 통화품질을 개선하는 데 공을 세웠다.

4세대방사광가속기에는 더욱 수준 높은 기초과학 연구를 위한 포스텍의 전략이 묻어난다. 필요성과 효율성, 예산 조달 등 다양한 논란이 있었지만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기초과학 연구중심대학으로서 시너지효과를 노린 포스텍의 미래 지향점을 담고 있다.




‘기초과학 세계 최강’ 막스플랑크 한국연구소 설립

25년간 기초과학 분야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해 온 포스텍은 2011년 10월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리는 세계 최고 연구기관인 독일 막스플랑크 재단과 한국 포스텍 연구소를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한 것. 아토초과학연구센터와 복합물질연구센터가 이미 만들어져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지난 25년과 앞으로 25년의 비전을 들어보기 위해 포스텍에서 만난 김승환 연구처장은 “복합물질연구센터의 경우 방사광가속기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빔라인을 공동으로 지을 예정”이라며 “가속기 성능 개선이 완료되면 막스플랑크재단과 함께 세계 최고의 빔라인을 건설해 복합물질을 근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막스플랑크라는 이름값만 내세우는 것이 아닌 실제 아시아 연구기관들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허브가 포스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막스플랑크 재단이 포스텍과 공동으로 한국연구소를 설립한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녹아 있는 포스텍의 위상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바로 막스플랑크연구재단이 포스텍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함께 연구할 만한 수준이 되고 질적 수준이 높은 연구를 공동으로 할 수 있는 파트너로 평가받은 데 포스텍 측은 고무됐다.

막스플랑크 한국연구소 설립 논의의 시작은 4년전인 지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터 그루스 당시 막스플랑크재단 총재의 포스텍 방문이 이뤄졌다. 당시 총재는 2박3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차 방한했다. 아시아 지역에 연구 허브를 만드려고 했던 총재는 포스텍이 헬기까지 준비하는 성의를 보이자 2시간 짬을 내 포스텍을 전격 방문했다. 당시 피터 그루스 총재는 “20여년 전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눈앞에 보이는 과학과 대학, 시설, 연구환경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스피릿(spirit)’이 막스플랑크가 추구하는 연구의 높은 질적 수준과 수월성을 함께 추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4년전 피터 그루스 총재 발언은 2010년 현실화됐다. 막스플랑크 한국·포스텍연구소 설립 MOU를 교환한 것이다. 세계적인 기초과학 연구중심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포스텍의 미래가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고스란히 담겼다.




점수에 연연 않고 선발된 학생이 미래 25주년 이끌 것

한국연구재단 발표에 따르면 포스텍의 피인용 상위 1% 논문은 109편이다. 대학교에서 발표한 전체 SCI 논문 대비 상위 1% 논문 비중이 1.64%로 1.58%인 일본 도쿄대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주저자로 참여한 논문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도 포스텍 김기문 교수의 2000년 ‘네이처’ 논문으로 총 1656회 인용된 바 있다. 단순한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을 추구, 대한민국 기초과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개교 당시 재미과학자 귀국 장려로 60여명의 해외 석학들이 국내로 복귀한 일이나 연구의 효율적 수행과 연구비 집행에 대한 신뢰성, 투명성 제고를 위해 모든 연구비를 대학이 관리하는 ‘연구비 중앙관리제’를 시행한 것도 포스텍만의 신선한 시도였다.

포스텍의 이러한 변화는 학생 선발에서도 돋보였다. 현재 입학사정관제도와 유사한 고교장 추천전형제도를 14년전인 1997년에 시행했다. 수학능력시험 제도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다. 1999년부터는 수시모집 정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입학사정관제도를 시행하기 바로 직전에는 정원 300명 중에 230명을 수시로 뽑을 정도였다.

현재 포스텍은 학부생 정원 300명 전원을 입학사정관제도로 뽑는다. 90년대 후반부터 수시 모집 인원을 늘려왔기 때문에 그간 쌓인 노하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손성익 포스텍 입학사정관실장은 “어차피 포스텍을 지원하는 학생들은 성적만 놓고 보면 최상위권 학생들인데 굳이 이들을 소수점 몇째자리까지 확인해야 하는 점수로 뽑을 이유가 없었다”며 “수능에서 실수로 한두개 틀린 것이 당락을 결정하는 것보다 실수에 도전할 줄 아는 학생을 뽑는 게 포스텍의 미래 비전과 합당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 전원 입학사정관제도 선발을 결정한 당시 우려도 많았다. 수능 점수와 지원대학 커트라인 목록에서 포스텍이 없어지는 데 대한 걱정이다. 수능점수 커트라인으로 상위권 대학을 구분짓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나올 법한 우려였다.

그러나 포스텍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지향점을 실현시켜 줄 주인공들이 바로 포스텍에 꿈을 품고 들어오는 인재들이다.

손성익 실장은 “입학사정관제도 시행 전후를 비교 분석한 자료를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 학업 성적은 비슷하지만 입학사정관제도 이전 학생들이 대체로 내성적, 분석적인 경향을 보여준 반면 이후 학생들은 외향적, 적극적인 경향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분석은 학생들의 심리검사, 성적 분석, 교수들 설문 등을 통해 객관적으로 도출됐다. 결국 포스텍은 미래의 노벨상 후보 한명만이라도 골라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설립 초기에 제시됐던 기초과학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평가 ‘몇위’보다 ‘클래스’가 되겠다

포스텍은 지난 2010년 영국 더타임즈와 세계적인 연구평가기관 톰슨-로이터사가 공동으로 실시한 2010년 세계대학평가에서 28위를 차지했다. 30위권 내에 진입한 첫 사례다. 포스텍은 그러나 이제 국내외 기관이나 언론사의 대학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선발하듯 대학평가 순위 ‘몇위’보다 기초과학 분야 연구중심대학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다. 특히 아프리카, 아시아 등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모델을 과학기술에서 찾고 성공 사례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포스텍의 이러한 지향점은 ‘기초과학은 국경이 없다’는 철학에서 비롯됐다. 지금까지 갖춰온 ‘수월성’ ‘소수정예’ ‘퀄리티’ 라는 틀에서 한단계 더 올라서기 위해 세계 최고 연구 기관들과 협업하는 전략을 구상중이다. 4세대방사광가속기와 같은 글로벌 수준의 연구장비는 과학기술의 젊은 리더를 도전적으로 키워낼 수 있는 연구 몰입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다.

한단계 더나아가 기초과학을 응용과학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비즈니스화하는 산학협력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모델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포스텍은 국내 경쟁 대학인 서울대 공대나 카이스트 등에 비해 규모가 작다. 때문에 유연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글로벌 기관들과 공격적인 협업을 할 수 있는 민첩성을 갖췄다. 굉장한 장점이다.

지난 25년을 반추하고 새로운 25년을 준비하고 있는 포스텍을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학생·학부모를 비롯해 연구자, 과학자, 기관, 정부, 기업 등 헤아릴 수 없다. 대학평가 ‘몇위’는 순간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기초과학 분야 ‘클래스’가 되는 미래의 포스텍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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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과학동아 정보

  •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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