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일이던 10월 2일 오전, ‘미토콘드리아 이브’ 연구로 유명한 레베카 칸 미국 하와이대 교수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다는 최초의 인류에 붙은 별명. 모계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분석해 ‘족보’를 밝혔기 때문에 이브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연구는 ‘문과’로 인식되던 고고학과 인류학에 ‘과학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사진기를 들고 연천으로 달려갔다.

“수업시간에 종종 듣는 질문인데….”
고고학 연구에 유전학을 도입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계기를 묻는 질문에 칸 교수는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다. 의외로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전공 외에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에요. 당시에는 생물학이 모든 곳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던 시기거든요. 제겐 그게 인류의 기원이었죠.”
인류 기원 밝힌 ‘미토콘드리아 이브’
25년 전인 1986년, 칸 교수가 미국 UC 버클리 유전학과에 재직할 때였다. 인류의 친척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연구가 한창 인기였다. 팀 화이트, 오웬 러브조이 등 쟁쟁한 인류학자들이 30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지형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뼈화석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생인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었다. 칸 교수는 미국인이지만, 미국 인디언들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현생인류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고학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전 유전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 지식을 이용해 보기로 했고요.”
칸 교수는 아프리카, 아시아, 뉴기니, 호주, 유럽 등 5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 145명의 태반 세포와 2개의 세포주를 얻어 유전자(DNA) 변이를 비교해 보기로 했다. 유전자 변이는 유전학자들이 생물의 진화를 연구할 때 많이 쓰던 방식이다. 진화 계통상 오래된 생물일수록 유전자에 변이가 많기 때문에 이를 알면 생물의 연대를 역추적할 수 있다. 칸 교수 이전에도 인류학에서 이 방법을 시도한 학자가 있었지만, 주로 세포핵 유전자를 썼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세포핵 유전자는 배우자의 유전자와 서로 섞이기 때문에 유전자 재조합 현상이 자주 일어났고, 어떤 변이가 얼마나 일어났는지 연구하기가 대단히 까다로웠다.
칸 교수는 크기가 작고 어머니에게 서 유전돼 재조합이 일어나지 않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mtDNA)를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뚜렷했다. 모두 133개의 서로 다른 mtDNA 유형이 나왔는데, 아프리카 계통과 그 외의 계통으로 진화 경로가 뚜렷이 나뉘었다. 아프리카에서 첫 ‘조상’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 조상은 약 29만 년 전~14만 년 전 사이에 살았다. 다른 대륙에 인류가 나타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듬해(1987년) 1월 이 연구 결과가 ‘네이처’에 소개됐다. 현생인류가 세계 각지에서 각각 진화했다는 ‘다지역연계론’을 주장해온 인류학과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한중일 ‘같이 또 따로’
“연구의 의의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의 인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전 세계 인류의 유전자 중 지역별로 차이가 나는 유전자는 겨우 7.4%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공통 형질을 지닌 유전자예요. 유럽인, 호주인 등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한국인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중국인, 일본인과 같은 것 등 무척 복잡합니다. 하나의 유전자 집단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한국, 중국, 일본인을 구분하는 것도 유전학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적인 구분일 뿐이에요.”
칸 교수의 연구 결과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지역별로 인종 차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후속 연구들 역시 칸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유전체(게놈) 연구에서는 다른 흥미로운 결론도 나오고 있습니다. 배성곤 하와이대 인류학과 교수와 한국의 게놈연구소(PGI)가 한국인 게놈으로 기원을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 다른 게놈과 맞지 않는 유전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인과 어떤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요. 환경이나 문화적인 요인을 반영한 변이로 보입니다.”
칸 교수는 지난 25년 동안 이 분야에 더 많은 사람과 연구소가 참여하고 있고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연구소나 지역에 편중되는 경향도 심해졌다고 비판했다. 유전체 연구를 위해 생체 시료를 마음대로 빼 가는 연구 풍토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우스갯소리로 헬리콥터를 타고 지역에 가 시료를 채취한 뒤 도로 헬리콥터를 타고 나가버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시료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지역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를 수밖에 없어요. 인류학을 연구하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지요.”
올해 60세가 된 칸 교수는 최근 다시 한번 ‘옆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언어와 뇌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다. 유전학 기술을 이용해 언어의 기원을 밝히겠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뇌는 진화 과정에서 두 번의 팽창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언어입니다. 이것을 뇌의 유전자 발현을 연구해 밝힐 계획입니다. 언어와 뇌과학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