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현상의 비밀을 간직한 유전자. 그러나 유전자는 정보일 뿐 진짜 일꾼은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세계인간프로테옴기구(HUPO)’ 총회가 9월 4~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이번 총회에서는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이어 사람의 모든 단백질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HUPO 2011 학회장에 모인 인파는 그야말로 출근시간 서울 신도림역을 떠올리게 했다. 양떼가 뛰노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스위스에서 즐길 ‘유러피언 라이프’를 꿈꿨던 기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파를 헤치고 학회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도대체 앞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아 사람들 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➊ 많은 사람들이 모인 학회장 전경.
➋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에 참가한 과학자들의 모습.
➌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의 의장인 백융기 교수(왼쪽). 오른쪽은 도시히데 니시무라 일본 도쿄대 교수.]
24개 염색체 먼저 잡아라
“1번 염색체는 중국이 맡겠습니다.”
중국 베이징대의 푸추 허 교수는 “중국에서는 해마다 약 35만 명이 간암에 걸린다”며 “전 세계 간암 환자의 절반을 넘는 수치”라고 설명했다. 중국에는 ‘간 은행’이 있을 정도로 간 질환 연구에 관심이 많다. 간암에 관련된 유전자가 많은 1번 염색체를 중국이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폐암 치료에 관심이 높은 일본은 폐암 유전자가 많은 3번 염색체를 맡았다. 면역 유전자가 많은 6번 염색체는 자가면역질환환자가 많은 캐나다가 연구하기로 했다. 이처럼 HUPO 총회에서는 인간 염색체를 차지하려는 각 나라들의 신경전이 뜨거웠다. 각 나라마다 관심 있는 질병과 관련된 염색체를 맡다 보니 24개 염색체(상염색체 22개와 성염색체 X, Y) 중 15개가 벌써 짝을 만났다.
국가마다 염색체를 하나씩 고르는 이유는 이번 총회부터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c-HPP)’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처음 생각한 사람은 백융기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다. 백 교수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염색체 별로 어떤 유전자가 있는지 연구해 지도를 완성했듯 단백질도 염색체를 중심으로 연구하자”며 이 사업을 추진했다.
프랑스 대체에너지및 원자력 위원회(CEA)의 피에르 레그란 박사도 “지금은 그동안 찾은 단백질을 가지런히 정리할 시점”이라며 이 사업을 지지했다. 레그란 박사는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단백질 연구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을 걱정했는데 이제는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이 단백질 연구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백 교수는 이 사업을 지난해 9월 총회에서 처음 선언했다. 당시 HUPO 회장이던 백 교수는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은 사람 염색체 24개에 새겨진 유전자 속 모든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혀 거대한 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당시만 해도 기자는 사실 단백질 백과사전을 완성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단백질은 유전자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같은 유전자에서 종류가 다른 단백질이 발현될 수도 있고, 단백질이 완성된 후에도 변형되거나 수정이 일어나 각자 다른 기능을 갖는다. 과학자들은 현재 단백질의 종류를 무려 10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유전자 2만 300개를 분석해 유전자지도를 만드는 것도 10년 넘게 걸렸는데 50배가 넘는 데이터를 다룬다는 게 무모한 일은 아닐까. 단백질 백과사전 안에는 유전자에서 발현된 대표 단백질 뿐 아니라 변형을 거친 단백질과 유전자변형(SNP)으로 만들어진 질병단백질도 다 포함한다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학회장에 모인 연구자들의 열의를 직접 보니, 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1,13번 염색체 한국이 맡는다
아직 인간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들어오지 못한 연구자들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심지어 이미 염색체를 맡은 국가도 다른 염색체를 더 연구하고 싶어 한다. 1번 염색체를 맡은 중국이 8번 염색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사업에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는 기관도 많다. 캐나다 대표 연구지원기관인 ‘게놈 퀘벡’에서는 캐나다가 맡은 6번, 21번 염색체를 연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모두 지원할 예정이다. 또 유럽연합(EU)의 연구지원기관인 ‘유로피안 코미션(EC)’은 현재 과학자들에게 연구비 지원신청을 받고 있다. 이렇게 서로 염색체를 차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여기서 나오는 단백질이 질병을 진단하는 바이오 마커나 치료제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백질 연구는 유전자 연구보다 국가 간 이권대립이 더 첨예하다. 이런 갈등을 줄이고 연구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어떤 연구방법을 쓸 것인지, 연구결과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등 연구의 가이드라인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 이번 학회에서 이 가이드라인이 통과됐다. 사업의 의장도 백 교수가 맡았다. 그리고 사업의 로고를 만들고 총괄본부를 백 교수가 있는 ‘연세 프로테옴 연구원’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전체운영 틀을 확실히 잡았기 때문에 내년 9월 9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HUPO 총회부터는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마침 루디 에버솔드 스위스 취리히공대 교수가 이끄는 ‘생물학/질병 기반 단백질사업’도 같이 추진하기로 돼 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은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될 전망이다.
한국은 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의 유종신 박사팀이 11번 염색체를 맡고, 백 교수팀이 13번 염색체를 연구하기로 했다. 두 염색체는 고혈압, 당뇨 같은 각종 성인병과 관련된 유전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박영목 박사는 “한국이 지난 인간게놈프로젝트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데는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HUPO회장인 캐서린 카스텔로 미국 보스턴대 의대 교수는 “인간게놈프로젝트로 밝힌 유전자 2만 300개 중 30~40%는 아직 기능이 무엇인지 모른다”며 “‘미완성 작품’인 유전자지도는 단백질 연구로 완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카스텔로 교수는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 초사업 연구는 몸속 모든 단백질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회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레만호수와 마주쳤다. 둘레가 100km를 넘는 거대한 호수로 유럽(러시아 제외)에서 가장 큰 규모다. 에메랄드 색 맑은 물빛은 한낮의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며 자태를 뽐냈다. 멀리 보이는 알프스에서 내려온 바람도 호수 빛을 닮아 싱그러웠다.


[➊ 프랑스 대체에너지 및 원자력위원회(CEA)의 피에르 레그란 박사.
➋ 캐서린 카스텔로 HUPO 회장의 모습.
➌ 마이클 스나이더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외에도 이 분야에서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석학들이 염색체 기반 인간단백질기초사업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단백질은 질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치료제로 쓰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단백질 의약품은 인슐린으로, 지금도 많은 당뇨환자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인체의 신비를 한눈에 보다
“레만 호수의 물은 알프스 산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 내려온 거래요. 호수 밑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죠.”
동행한 권호정 연세대 생명공학과 교수(한국 HUPO 회장)가 말했다.
“제네바 시내에서 볼 때는 엄청 더러운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보인 걸까요?”
“수상택시를 타고 보면 또 다르게 보여요. 호수의 모습을 가장 제대로 보는 방법은 저기 셀레브 산에 올라가서 보는 거예요. 레만 호수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답니다.”
권 교수는 이어 “높은 산에서 봐야 호수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생명현상을 공부할 때도 구성 물질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이들 구성물질이 아우러져 있는 전체를 보는 눈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한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생물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같은 여러 성분이 복합적으로 구조를 이루고 이 물질끼리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전체를 알아야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단백질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도 생명현상 전체를 보려는 노력의 일부다. 전체 단백질을 정리하면 단백질끼리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연히 왜 병에 걸리는지 원인과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다. 단백질 백과사전은 앞으로 또 어떤 생명의 비밀을 인류에게 알려주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