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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미국의 한 병원에서는 의학사에 남을 시술이 행해졌다. 미국의 바이오기업 제론사가 척추가 손상된 환자에게 인간배아줄기세포에서 분화시킨 신경전구세포를 주사하는 임상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7월 14일 역시 미국의 바이오기업인 어드밴스드셀테크놀로지(ACT)사가 배아줄기세포로 만든 망막색소상피세포를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안구에 주입하는 임상에 들어갔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의료 혁명이 임박하다며 사람들을 애태우던 배아줄기세포치료가 드디어 현실로 접어들고 있다.
전분화능을 지녀 어떤 유형의 세포로도 분화할 수 있다는 배아줄기세포. 인간 배아줄기세포가 처음 확립된 건 1998년이지만 그 토대가 되는 생쥐의 배아줄기세포가 처음 만들어진 건 1981년이다. 올해는 배아줄기세포 확립 30주년이 되는 해다.
배아암종세포에서 영감 얻어
1981년 생쥐 배아줄기세포 확립은 영국과 미국에서 불과 수개월 사이에(논문 발표 기준) 각각 독립적으로 성공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유전학과의 마틴 에번스 교수팀이 ‘네이처’ 7월 9일자에 먼저 발표했고 미국 캘리포니아대(샌프란시스코) 해부학과 게일 마틴 교수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12월호에 발표했다. 흥미롭게도 정작 배아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s)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마틴 교수의 논문이다. 아무튼 오리지널 논문이니까 먼저 발표한 에번스 교수 쪽으로 초점을 맞춘다.
1941년 새해 첫날 태어난 에번스 교수는 어린 시절 집에서 화학 실험을 할 정도로 화학에 관심이 많았다. 케임브리지대에 들어가서 화학, 동물학, 식물학 등 여러 과목을 들었는데 생명현상을 화학적으로 해석하는 생화학에 가장 흥미를 느꼈다. 어느날 효소학 권위자인 말콤 딕슨 교수의 수업시간에 늦은 그는 별수없이 맨 앞줄에서 수업을 들었는데(학생들이 맨 앞자리에 앉기를 꺼리는 건 당시 영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때 바로 눈앞에서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최신 논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딕슨 교수의 강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0년대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이 막 규명되기 시작하고 유전자의 작동 원리가 밝혀지던 ‘분자유전학’의 여명기였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려는 의욕에 불타고 있던 에번스 교수는 불운하게도 시험기간에 큰 병에 걸려 대학원을 진학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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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런던대 엘리자베스 듀처 교수의 조교로 들어갔는데 이게 결국은 전화위복이 됐다. 듀처 교수는 실험실원들을 격려하면서도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상적인 지도교수였기 때문이다. 에번스 교수는 이곳에서 다양한 테크닉을 배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을 조절하는 메신저RNA(mRNA)를 분리하는 연구를 했는데 당시 생명과학 수준으로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무엇보다도 분석하는 데 쓸 시료를 충분히 얻을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을 듣던 동료가 그에게 생쥐의 기형암종(teratocarcinoma)을 갖고 연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기형암종이란 발달초기 생식세포에서 유래한 종양인데 특이하게도 암덩어리 안에는 잡다한 형태의 세포가 뒤엉켜 있다. 이 가운데는 미분화된 상태의 세포도 있는데 이를 배아암종(embryonal carcinoma, 줄여서 EC) 세포라고 부른다.
배아암종세포는 일종의 줄기세포로 외부 조건에 따라 다양한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형암종에서 분리한 배아암종세포를 배아에 넣어줄 경우 자연스럽게 배아의 일원이 되면서 정상 개체로 발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흰 털 생쥐의 배아에 검은 털 생쥐의 배아암종세포를 넣어주면 줄무늬 털이 나는 생쥐, 즉 키메라(chimera)가 태어난다.
따라서 배아암종세포에 유전적 조작을 한 뒤 배아에 넣어줘 키메라 생쥐를 얻은 뒤 이를 다시 교배하면 유전자 조작이 된 생쥐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배아암종세포 자체가 정상세포가 아니라는 점. 만일 정상세포 가운데 배아암종세포처럼 미분화된, 즉 전분화능을 갖고 있는 세포를 확보할 수 있으면 생물학이나 의학에서 매우 쓸모가 많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배아의 초기 발생단계에서 배아 내부에 있는 ‘안쪽 세포덩어리(inner cell mass, 줄여서 ICM)’도 분리해 다른 배아에 넣어주면 키메라 동물을 얻을 수 있고 기형암종을 유도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에번스 교수는 1978년 케임브리지대 유전학과에 자리를 잡은 뒤 발생학자인 해부학과 매튜 카우프먼 박사와 손잡고 연구에 뛰어든다. 이들은 ICM과 배아암종이 전분화능이라는 특성을 공유하므로 ICM을 시험관에서 미분화된 상태로 배양해 세포주를 확립한다면 배아암종을 대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을 얻는 셈이다.
닭 대신 꿩 얻은 셈
물론 이전에도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배아에서 전분화능 세포를 배양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에번스 교수팀은 배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가정했다. 즉 배아에서 ICM을 분리하는 타이밍과 충분한 수의 세포를 얻는 일, 그리고 세포가 분화하지 않은 채 증식하는 배양조건을 찾는 일이다.
이들은 배아가 자궁에 착상할 무렵의 세포 특성이 배아 암종 세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착상된 배아에서는 ICM을 꺼내기도 어렵고 세포 수도 얼마 안 된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배아가 착상하지 못하면 자궁에서 분화 신호가 오지 않기 때문에 세포는 미분화된 상태로 몇 차례 더 분열을 한다.
연구자들은 배아가 착상하지 못하게 호르몬 처리를 한 뒤 배아를 꺼내 그 자체를 페트리접시에서 4일간 배양했다. 그리고 충분히 숫자가 늘어난 ICM을 분리해 지지세포(섬유세포) 위에 놓아주고 태아 송아지와 갓 태어난 송아지의 혈장이 포함된 배양액을 공급했다. 지지세포나 배양액은 ICM세포의 분화를 억제하면서 증식을 돕는 역할을 한다.
다행히 세포는 미분화된 상태로 왕성하게 분열해 증식했고 연구자들은 이 세포의 특성이 배아암종세포와 비슷함을 확인했다. 에번스 교수팀은 이렇게 배아에서 얻은 세포를 배아암종(EC)세포와 구별하기 위해 EK세포라고 불렀는데, 이때 K는 karyotype(핵형)의 k다. 핵형은 염색체의 숫자나 형태를 나타내는 말로 배아암종세포의 경우 핵형이 비정상인 반면 배아에서 확립한 세포는 정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에번스 교수가 논문을 쓸 때 배아줄기(embryonic stem, 줄여서 ES)세포라는 쉽고 명쾌한 용어를 생각해내지 못한 게 다소 의아하다.
에번스 교수는 이렇게 확립된 배아줄기세포에서 유전자를 조작한 뒤 배아에 넣어 키메라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1984년) 특정 유전자가 없거나 돌연변이를 유전자를 지닌 질병 모델 생쥐를 여럿 만들었다. 에번스 교수는 이 업적으로 200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자세한 내용은 ‘과학동아’ 2007년 11월호 90쪽 ‘줄기세포로 사람 살리는 맞춤형 쥐’ 참조)
1998년 인간배아줄기세포 확립
쥐에서 배아줄기세포주가 확립됨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배아줄기세포로 넘어갔다. 그러나 설치류와 영장류는 발생학적으로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먼저 원숭이의 배아 줄기세포를 연구했다. 미국 위스콘신대 제임스 톰슨 교수팀은 1995년 붉은털원숭이의 배아줄기세포주를 확립하는데 성공했고 3년 뒤인 1998년 마침내 인간배아줄기세포주를 만들었다.
인간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가 꿈에서 현실이 되는 토대가 마련되자 수많은 생명과학자들이 줄기세포연구에 뛰어들었고 배아를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비윤리적이라는 논란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한편 1996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복제양 돌리를 만든 영국 에든버러로슬린연구소 이언 월머트 박사팀의 핵치환 기술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의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즉 환자의 체세포 핵(2n)을, 핵(n)을 뺀 난자에 넣어 수정란(2n)으로 착각하게 외부에서 자극을 줘 발생을 유도해 배아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아줄기세포를 얻고 이를 분화시켜 치료에 사용한다면 면역거부반응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01년 10월 미국의 ACT사는 인간복제배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배아는 세포가 6개까지 분열된 뒤 멈춰 줄기세포를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2004년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인간복제배아줄기세포주를 확립했다는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하면서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러나 2005년 말 연구조작 의혹이 일어나고 얼마 뒤 진상이 밝혀지면서 우리나라는 최악의 과학스캔들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 사이 2006년 일본 연구진들이 배아줄기세포를 대신할 수 있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 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현재 줄기세포연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럼에도 배아줄기세포는 여전히 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많은 장점이 있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임상에 들어간 상태다. 임상시험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수년 내에 배아줄기세포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될지도 모른다. 에번스 교수의 2007년 노벨상은 ‘맞춤형 쥐(유전자 적중 쥐)’를 만든 업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줄기세포치료에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생쥐이긴 하지만 배아줄기세포주를 처음 확립한 에번스 교수가 포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과연 에번스 교수가 두 번째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