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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보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게보린의 주성분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식약청은 15세 미만 소아에게 투여를 금지시키고 제약회사에 안전성을 입증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TV에서는 여전히 이들 상품에 대한 광고가 나와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게보린이 문제가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지적하는데…….



“게보린이요? 저희 게보린 안 갖다 놔요. 찾는 사람이 없어서….”

약사 이 모씨가 근무하는 경기도 오산의 약국에는 게보린이 없다. 최근 부작용 논란이 일면서 게보린을 찾는 손님의 수가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아무 진통제나 좋지만 게보린만 아니면 된다고 말하는 고객이 있을 정도”라며 “특히 인터넷으로 부작용 소식을 접한 20, 30대들이 멀리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두통약’이라 불리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던 게보린. 그 게보린의 위상이 이처럼 땅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엔이 선정한 위험약물”

논란은 2008년 10월 10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가 정기간행물인 ‘의약품 적색경보 6호’를 통해 진통 성분제인 이소프로필안티피린(IPA)의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시작했다. 삼진제약의 게보린과 한국바이엘의 사리돈에이의 주성분이 IPA다. 건약은 해외에서 IPA가 골수억제작용에 의한 과립구감소증과 재생불량성빈혈, 의식장애, 혼수상태 등을 일으킨 사례가 발견됐다며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 안전성 검사를 실시해줄 것을 요구했다.

건약이 이런 주장을 펼치게 된 근거는 유엔이 2005년에 발표한 ‘통합 약물(Consolidated List of Products)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위험성이 높은 약물들이 각 국가에서 어떤 역사로 퇴출되고 규제를 받았는지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IPA가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또 비영리 기구인 국제건강운동(HAI)이 최소 5개국 이상에서 시판이 금지된 약물들의 사용 현황을 밝힌 자료에도 IPA가 들어가 있다. 독일 독성정보센터는 1983년 “IPA에서 나타난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혈액질환과 의식장애 등 부작용이 이미 퇴출된 아미노피린이나 설피린과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아미노피린은 IPA와 구조적으로 매우 비슷한 피린계 약물이다. 아미노피린도 100년 넘게 사용됐지만 1970~1980년대에 발암성, 혈액질환 유발 등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전 세계 시장 에서 퇴출됐다. 비슷한 계열의 약물인 설피린도 치명적인 혈액 질환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1970년대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라졌다.

IPA는 아일랜드와 터키에서 치명적인 재생불량성빈혈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시판이 금지됐다. 재생불량성빈혈은 혈구를 만드는 골수가 망가져 피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혈구가 너무 많아져서 생기는 백혈병과 정반대다. 재생불량성빈혈은 적혈구의 수가 적기 때문에 빈혈이 나타나고 백혈구 역시 부족해 면역력이 떨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장기간 사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1989년 심각한 통증이나 발열의 단기 치료제로만 IPA를 승인됐다. 캐나다와 미국, 뉴질랜드 등에서는 아예 시판이 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안 팔면 우리도 안 판다?
하지만 특정 국가에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도 쓰지 말란 법은 없다. 반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성 여부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나라마다 안전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나름의 관리 체계로 약물의 위해성을 조사하는 게 우선이다.

식약청 청장을 지낸 심창구 서울대 약대 교수는 “안전하다는 말이 굉장히 과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사회적인 용어에 더 가깝다”며 “한 국가에서 약물이 통용되고 금지되는 데는 과학적인 근거뿐 아니라 국민의 정서, 정치 등 사회적인 기준이 크게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과거 다이어트용 식욕억제제와 코 막힘 완화용 감기약으로 주로 쓰였던 페닐프로판올아민(PPA)은 국내 역학조사 결과 출혈성 뇌중풍(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2004년에 가장 강력한 조치인 ‘판매 금지’가 내려졌다. 미국에서는 2000년부터 판매가 금지됐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적은 양은 괜찮다’며 사용 제한을 뒀을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PPA에 대해 조치한 곳은 13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PPA 사용 금지 조치를 빨리 수용하지 않았다며 식약청장이 사퇴하는 소동까지 일어난 것에 비교하면 너무도 조용한 반응이다. 심 교수는 “같은 약을 두고도 나라마다 기준이 달라 논란이 되고 있다”며 “국제화 시대에 맞게 여러 나라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공동 규약이나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IPA 부작용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혈액질환이다. 재생불량성빈혈은 적혈구와 백혈구를 만들지
못해 빈혈이 나타나고 면역력이 떨어진다.]
 

 
사실 국내에서는 IPA가 의약 선진국인 미국에서 시판되지 않는다며 ‘문제 있는 약물’로 취급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조사 결과 IPA는 미국에서 허가신청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삼진제약의 박재심 부장은 “미국에서 IPA가 시판되지 않았던 것은 유럽에서 만든 약을 생산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단순히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뒤늦게 부작용이 나타나는 사례에 대해서도 약학 전문가들은 “제약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대한약물역학위해 관리학회장을 역임한 박병주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지금보다 약물의 독성이나 부작용을 검출하는 기술이 부족해 과거에 통용된 약물이 근래에 와서 기준과 맞지 않아 폐기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또 임상 시험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부작용이 제품으로 판매된 뒤에 나타나기도 한다.

심 교수는 “임상시험은 제한된 조건에서 일부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하기 때문에 시판 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약물을 접하고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제약회사가 부작용을 알면서도 감췄을 가능성은 없냐는 질문 약학 관계자들 대부분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안전을 위해 과거부터 사용한 모든 약물을 재평가해야할까. 심 교수는 “만일 모든 약물을 현대 기준으로 재평가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뿐더러 상당수의 약을 포기해야할 것”이라며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약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사실 100% 안전한 약물은 없다. 약물은 치료효과를 내는 동시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만일 부작용보다 효과가 더 크면 약물을 쓰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다. 16세기 스위스의 의화학자 파라셀수스는 “모든 물질에는 독성이 있으며, 독이 아닌 것은 없다. 독이냐 약이냐는 단지 적은가, 많은가의 차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정확한 용량을 지키지 않으면 약물과 독은 차이가 없으며 약물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IPA 논란에 대해서 박 교수는 “좀 더 면밀한 조사가 이뤄져야겠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은 만큼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약물의 이중성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5세 미만 사용 금지
하지만 사람들의 불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IPA 성분을 포함한 제품이 약 40여 개나 팔리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은 일반의약품으로 분리돼 처방전 없이 누구나 쉽게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다. 건약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엔 보고서에 등록된 성분 중에서 7가지 성분이 시판되고 있는데, 이중 IPA는 일반인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돼 더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국내 한 제약사는 해당 성분이 들어 있는 제품을 리콜했다. 종근당은 자사 제품인 ‘펜잘’에서 IPA 성분을 제거해 ‘펜잘큐’라는 새로운 제제를 출시하기도 했다. 안전성 여부가 결정난 것은 아니지만 IPA를 대체할 제제가 많은 만큼 소비자들의 기호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식약청도 2009년 3월 2일 IPA에 대한 1차 공식 입장을 밝혔다. 식약청은 의약, 약학, 공무원 등 최고 전문가 12명으로 구성된 중앙약사심의위원회와 자문회의를 연 결과 ‘IPA 성분이 사용과 판매를 중지할 정도로 안전성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식약청은 최근 보고된 부작용 사례는 2005년 1건, 2006년 1건, 2007년 1건 등 세 개에 불과한데다 대중에 알려진 두통약들은 IPA를 단일 성분으로 쓰지 않고 3가지 정도의 복합성분으로 구성돼 있어 부작용의 원인을 꼭 IPA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했다. 단 국민들의 감정과 불안을 고려해 ‘IPA 함유 의약품의 효능과 효과를 ‘진통 및 해열 시 단기 치료’로 제한하고, 15세 미만 소아는 투여를 금지하며, 수회(5~6회) 복용해도 나아지지 않으면 복용을 중지하고 의사 또는 약사와 상의해야 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IPA 제제를 12세 미만에게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민 정서를 고려해 이보다 강력한 15세 미만으로 격상했다.

 
[일반의약품으로 분리된 해열진통제는 처방전 없이 누구나 쉽게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다. 적당한 용량을 바른 용도로 먹는 것이 안전하다.]

게보린이 ‘조퇴하는 약’?
식약청의 조치로 논란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사고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학교에 등교하지 않거나 조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보린을 수십 알씩 한 번에 먹는 일이 유행처럼 번진 것이다. 학생들은 게보린을 과다 복용하고 그 경험을 포털 사이트나 게시판에 올렸다. 실제로 각종 게시판에서 “게보린 10알을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손이 떨리고 구토까지 했다”,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같은 글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사건은 재점화됐다. 약학 전문가들은 “어떤 약이라도 용법보다 많이 먹으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IPA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IPA 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식약청의 미온한 대처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은 지난해 10월 7일 열린 국정감사에서 “진통해열제는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일반약이어서 15세 미만에 사용을 제한한다는 조치는 의미가 없다”며 “청소년 오남용을 막기 위해 아예 제품을 퇴출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아주대병원이 식약청에 “논란이 많아 4~5년 전부터 IPA가 들어간 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세브란스병원은 “IPA는 보험 급여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처방약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라면서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비스테로이드성 해열진통제가 다수 있기 때문에 피린계 해열진통제가 반드시 있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아주대병원은 “안전성 논란이 지속돼 약사위원회 회의를 거쳐 병원에서 사용을 금지했다”고 보고했다.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이런 사실을 두고도 결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은 식약청이 특정업체를 비호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비난했다.

1년 내 안전성 입증 못하면 퇴출
결국 안전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며 제약회사의 손을 들어줬던 식약청은 지난 1월 12일 IPA 성분 약품을 생산하는 해당 기업에 사용 안전성을 스스로 입증하라고 방향을 바꿨다. 해당기업은 내년 3월까지 재생불량성 빈혈 같은 혈액관련 부작용을 중심으로 안전성을 입증한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만일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제품을 판매할 수 없다. 식약청은 “후속조치가 필요할 만큼 IPA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안전성 논란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 강화차원에서 내린 방침”이라고 밝혔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게보린을 수십 알씩 한꺼번에 먹고 부작용을 일으키는 사례가 유행처럼 번졌다. 학교에 가지 않거나 조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삼진제약과 바이엘코리아는 각각 게보린과 사리돈에이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조사를 함께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넥스팜코리아(리반정)나 동아제약(암씨롱정) 등 대부분 업체들은 조사하지 않고 해당 품목을 자진 취하하기로 했다. 앞으로는 이들 제품을 약국
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삼진제약 관계자는 “우리 제품의 안전성에 100%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비용이 들더라도 안전성 조사에 참여하기로 했다”며 “제품의 안전성을 입증해 회사의 불명예를 씻어 보이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신뢰성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 권위 있는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에 의뢰했다”며 “실험 진행 전 과정은 학회에 전적으로 일임하고 신뢰와 객관성을 얻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학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는 2002년 PPA 유해논란 당시에도 조사를 진행한 경험이 있다. 박병주 교수는 “PPA 사례 때 3년 걸린 연구를, 그것도 미국이 6년에 걸려 나온 결과를 이번에 1년 안에 끝내라니 무리일 듯 싶지만 최대한 기간과 비용에 맞는 조사 방법을 찾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안전성 입증 조사에 대해 “부작용 논란을 1년 뒤로 미룬 셈”일뿐이라며 앞으로도 부작용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게보린과 사리돈에이의 시중판매만 계속될 거라고 보기도 한다. 또 입증 책임을 당사자인 제약사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이번 안전성 조사는 국내 약물 역학관리 조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심창구 교수는 “국내 기술로 약물의 위해성을 증명해 세계에 선보인다면 미국, EU, 일본이 주도하는 선진 의약계에 우리나라가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의약품의 부작용 신고 건수는 미국의 0.22%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국내서도 부작용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신고 체계가 이뤄져 약물의 위해성을 관리하는 역학 조사가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내 약물 관리 수준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의료 종사자들이 부작용을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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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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