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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섭고 편안한 집짓기

여우 피하려고 호랑이 굴 들어간다

기상천외한 건축술로 포식자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애벌레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벌 집에 숨어 살거나, 나뭇잎을 돌돌 말아 안전한 텐트를 만든다. 은밀한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처럼 명주실을 나무에 걸어 재빨리 땅으로 내려갔다가, 포식자가 사라지면 다시 올라오는 녀석들도 있다.


[암청색줄무늬밤나방 애벌레는 쐐기풀과 왕모시풀을 먹는다. 검은색과 노란색이 어울려 현란하다. 자극을 받으면 헤드뱅잉을 하듯 몸을 좌우로 흔들어 천적에게 위협을 가한다.]


[성충이 말벌집 안에 산란하면 부화한 애벌레는 그 안에서 벌집을 갉아먹으며 생활한다. 종령 애벌레의 몸길이는 12mm 내외. 애벌레 몸은 우윳빛이고 머리는 갈색이다. 성충은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띠나 앞날개에 세로로 은색의 줄무늬가 선명하다. 124쪽에 있는 그림은 애벌레 방을 확대한 것.]

거대한 군집을 이루며 떼를 지어 사는 사회성 곤충들이 있다. ‘노란 재킷(Yellow Jacket)’으로 유명한 말벌(Vespidae)이 대표적이다. 노란 재킷은 검은 몸빛에 샛노란 줄무늬를 갖고 있는 말벌의 선명한 색채 패턴을 이르는 단어로 공포를 준다. 겉모습뿐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보면 더 무시무시하다. 말벌집 근처만 가더라도, 10cm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말벌들이 집단을 방어하기 위해 윙윙거린다. 본능적으로 일단 몸을 웅크려 낮추게 된다.

말벌은 독성도 남달라 한 번 쏘이면 상당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15년 전 연구소 주변에서 말벌집을 잘못 건드려 머리 뒤쪽에 10방 이상 말벌 침에 쏘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과 몸에 열이 올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목 전체가 부어올라 거대한 혹이 생겼다. 동네 보건소에서 항히스타민 해독 주사를 3대나 맞고 겨우 살아났다. 보건소장은 “그나마 자주 벌에 쏘여 어느 정도 독성에 대한 면역력이 있어 잘 견뎌낸 것”이라 말했다. 꿀벌보다 침도 굵고 길어 쏘이는 순간에도 얼얼했는데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웠다. 히스타민으로 대표되는 말벌 독의 성분은 페니실린보다 1만 배 이상의 효능이 있고, 꿀벌 550마리에 해당하는 독소를 갖고 있다.

이렇듯 말벌은 대표적인 경계색과 강력한 독성 무기를 갖고 있고 무리 지어 살면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종류의 곤충이 열심히 닮으려는 모델이다. 하늘소도, 파리도 나비, 나방까지도 모두 닮고 싶어 한다. 모방자들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의태 패턴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겉모습으로만 따라하는 의태가 아니라 아예 그 집안으로 숨어들어가 철저하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놈이 있다면 어떨까.

‘악마’네 집에 몰래 숨어살기
지난해 봄, 겁도 없이 말벌집 주변을 날아다니는 조그만 나방을 목격했다. 사나운 말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하면서 자세히 관찰해보니 말벌집의 유일한 출입구인 작은 구멍을 통해서 은무늬줄명나방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혹시 말벌집에 알을 낳고 사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연구소 야외 실험실 천장에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말벌집을 가을에 떼어내기로 했다. 머리에 방충망을 뒤집어쓰고 전신 우의에 손에는 2겹의 고무장갑을 끼었다. 완전 무장을 한 목숨 건 채집 작업이었다.

지름 약 30cm의 벌집을 해체하니 굉장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짧은 끈으로 매단 것 같은 말벌집의 주춧돌(두께 7.5cm)에 지름 16~21cm에 이르는 6개층의 애벌레집이 각각 가느다란 기둥 위로 일정하게 나열돼 있었다. 마치 우산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층층이 쌓인 육각형 방에는 애벌레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각 층의 애벌레 방을 세어보니 대략 1300개 이상이었다. 애벌레들을 지키고 양육하는 말벌도 1100개체 이상이었으니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다. 개체들의 힘도 센데다 이렇게 큰 규모의 집단생활을 하니 감히 이들을 건드릴 자가 있겠는가.

한참 말벌에 정신이 팔렸는데 꼭대기 층의 애벌레집 주변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애벌레집 껍질 부분에 실을 내어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꿈틀대며 말벌집을 먹는 애벌레를 발견했다. 가슴다리 3쌍과 배다리 5쌍까지 있는 걸 보면 틀림없이 나비 목 애벌레였다. 벌집 층 사이에 나 있는 벌 길을 따라 통행하는 말벌들을 따돌리고 느긋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각종 나무껍질과 말벌의 타액으로 만든 프로폴리스 벌집이니 얼마나 안전하겠는가. 명주실로 만든 집 안에서 열심히 먹어대는 애벌레와 이미 애벌레시기를 보내고 꼭대기 부분을 파고 들어가 껍질 표면에 명주실로 투명한 고치를 튼 번데기 20~30마리가 보였다. 과연 은무늬줄명나방일까.

번데기를 인큐베이터(26℃)에 넣은 뒤 빛을 16시간 쬐었다. 일주일가량 지나자 고치를 뚫고 총 66마리의 예쁜 은무늬줄명나방이 차례차례 날개를 달고 나왔다. 은무늬줄명나방이 말벌의 깊은 집 안에 은밀하게 살고 있었다. 자연 상태에서 애벌레의 생존율을 대략 1~2%로 보는데 아마도 이들은 100% 가까이 되지 않을까. 먹이도 충분하고 온도, 습도가 유지되므로 겨울도 안전하게 날 수 있고 천적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직접 말벌집을 갈라 분석해보니 세상에 처음으로 밝혀지는 은무늬줄명나방 생활사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가장 강한 포식자의 집에 자기 몸을 의탁해 완벽하게 생존하는 그들을 보면 ‘생존 전략의 종결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먹무늬재주나방 (Phalera flavescens )
분류 : 나비목/재주나방과
날개 편 길이 : 45~60mm]


[배나무, 벚나무등 가리지 않고 먹는다. 종령 애벌레의 몸길이는 50mm 내외. 어린 애벌레는 붉은색이나 자라면서 검은색으로 변하며 털도 노란색으로 변한다. 과수원, 가로수 등에 많이 생겨 피해를 주는 종이기도 하다.]

명주실로 만든 비밀 와이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침소에 세 들어 살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안전한 피신처를 갖고 사는 애벌레도 있다. 먹이식물의 잎을 둘둘 말아 그 속에서 생활하며 편안하게 먹고 산다.

대왕팔랑나비 애벌레는 먹이 식물인 황벽나무 잎으로 자기만의 은신처를 만드는 데, 건축술이 탈피하는 단계마다 독특하다. 1령이나 2령처럼 아주 어렸을 때는 잎사귀 가장자리를 잘라 접어서 주머니로 만든다. 4, 5령으로 다 컸을 때는 잎 끝과 끝을 말아 잎 전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엉성하지만 몸의 크기에 맞춰 집도 개조하고 넉넉하게 이용한다. 겨울에는 은신처였던 집을 가지에 실로 꽁꽁 묶어 눈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버들재주나방 애벌레도 먹이식물인 버드나무의 잎을 여러 장 겹쳐 집을 만든다. 그 안에서 먹고 자다가 집이 배설물로 가득 차면 다른 잎으로 옮겨서 새로운 집을 만든다. 포식자 입장에서는 껍질을 까서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것이고 기생을 하려는 벌도 정확히 침을 꽂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출돼 있는 상태로 몸을 숨기는 것 보다는 집에서 피신도 하고 안전하게 생활하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단순하면서 흔한 애벌레의 생존 전략 중 하나는 먹이식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천적의 공격이 있거나 놀랄 때 자신의 몸을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려 풀숲에 숨은 후에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기어 올라간다. 독나방은 자기가 갖고 있는 독을 믿는 것 같고 자나방 종류는 튼튼한 다리로 완벽히 나무줄기처럼 붙어 있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전략이다. 주로 불나방과와 밤나방과의 애벌레나 일부 호랑나비과 애벌레들이 사용하는 생존 방법이다.

불나방과의 안주홍불나방 애벌레는 건드리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빽빽한 털이 푹신한 쿠션 역할을 하므로 다치지 않는다. 떨어진 뒤에 죽은 척하고 몸을 웅크린다. 반면에 밤나방과의 멸강나방이나 점박이밤나방은 털이 전혀 없는 대신 몸이 말랑말랑하다. 자극을 주면 몸을 우선 동그랗게 말은 후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사람과 비교해보면 20~30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애벌레들은 겉이 부드러운 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떨어질 때 받는 충격을 흡수한다. 강도는 낮으나 신축성이 높은 천연고무와 같은 성분이다.

어떤 애벌레들은 공격을 받으면 급히 하강할 수 있는 명주실을 토해 실에 매달려 있다가 안전해진 뒤에 다시 줄을 타고 올라온다. 천적이 눈치 채지 못하게 때로는 빠르게 토해낸 실로 몸을 감아 거의 보이지 않게 하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처럼. 먹무늬재주나방 애벌레는 비단실 끝에 몸을 의지해 실을 타고 오르내리는 생존 전략을 사용한다. 5령이 되면 와이어에 매달려 온몸을 지탱하기가 무거워 다른 방법을 이용한다. 독나방처럼 노란색 털로 무장도 하고 몸 색을 짙게 만든 뒤 위장도 한다. 때에 맞춰 업그레이드해가며 살아가야 하는 애벌레의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다.

201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운 박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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