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푸르다. 이 얼마나 멋진가.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은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사람은 달에 다녀왔고, 수많은 우주인이 인류를 우주에 더욱 가깝게 이끌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8년 처음으로 우주인을 배출했다. 유리 가가린의 첫 우주비행 50주년을 맞아 우주인 이소연 씨가 과학동아에 보내 온 글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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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이 첫 우주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보도한 미국의 한 신문.]
‘찌알꼽스끼 역’
이름도 생소한 이 전철역은 가가린 우주 인 훈련센터 정문 앞에 있다. 훈련센터에 도착하고 한달 뒤, 모스크바 시내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러 가는데, ‘왜 역 이름이 가가린도, 우주인 훈련센터도, 즈뵤즈늬 가라독 (Star City)도 아닌 찌알꼽스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훈련소로 돌아오면 러시아 친구들한테 물어봐야지 해놓고 잊어버리고 말았다. 매번 전철을 탈 때마다 그 궁금증은 계속됐지만 나의 건망증 덕분에 몇 달째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친한 러시아 우주인 친구 올레그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소연! 너 깔루가 가 봤어?” 난 사실 그때는 도무지 깔루가가 무슨 시설인지, 러시아 주변의 작은 나라 이름인지, 아니면 도시 이름인지조차 몰라서 깔루가가 도대체 뭐냐고 되물었다. 올레그는 어떻게 깔루가를 모르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일단 가 봐야 한다면서 날짜를 정하자고 했다.
깔루가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저러나 생각하며 같이 가기로 했던 날만 기다렸다. 항상 타고 다니던 커다란 검은색 봉고차에 에네르기아에서 일하고 있다는 세르게이라는 친구를 태우고 나타난 올레그는 우리를 태우고 2시간여를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였다. 그 중 어느 집 문 앞에 ‘찌알꼽스끼 기념 생가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는데, 그때도 찌알꼽스끼가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찌알꼽스끼 선생님도 몰랐던 무식한 내가 너무나 창피하지만, 그땐 그랬다.
올레그는 그곳을 자기 집인 것처럼 전혀 망설임 없이 들어가더니 거기서 일하는 모든 분들과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자주 오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함께 간 세르게이라는 친구가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손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관장님은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손녀였다. 드디어 올레그와 관장님이 찌알꼽스끼 선생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꼭 와 봐야하는지, 그리고 왜 훈련소 앞 전철역 이름이 찌알꼽스끼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런 사실도 몰랐던 내가 한없이 창피해졌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전철역은 가가린 우주 인 훈련센터 정문 앞에 있다. 훈련센터에 도착하고 한달 뒤, 모스크바 시내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러 가는데, ‘왜 역 이름이 가가린도, 우주인 훈련센터도, 즈뵤즈늬 가라독 (Star City)도 아닌 찌알꼽스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훈련소로 돌아오면 러시아 친구들한테 물어봐야지 해놓고 잊어버리고 말았다. 매번 전철을 탈 때마다 그 궁금증은 계속됐지만 나의 건망증 덕분에 몇 달째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친한 러시아 우주인 친구 올레그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소연! 너 깔루가 가 봤어?” 난 사실 그때는 도무지 깔루가가 무슨 시설인지, 러시아 주변의 작은 나라 이름인지, 아니면 도시 이름인지조차 몰라서 깔루가가 도대체 뭐냐고 되물었다. 올레그는 어떻게 깔루가를 모르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일단 가 봐야 한다면서 날짜를 정하자고 했다.
깔루가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저러나 생각하며 같이 가기로 했던 날만 기다렸다. 항상 타고 다니던 커다란 검은색 봉고차에 에네르기아에서 일하고 있다는 세르게이라는 친구를 태우고 나타난 올레그는 우리를 태우고 2시간여를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였다. 그 중 어느 집 문 앞에 ‘찌알꼽스끼 기념 생가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는데, 그때도 찌알꼽스끼가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찌알꼽스끼 선생님도 몰랐던 무식한 내가 너무나 창피하지만, 그땐 그랬다.
올레그는 그곳을 자기 집인 것처럼 전혀 망설임 없이 들어가더니 거기서 일하는 모든 분들과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자주 오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함께 간 세르게이라는 친구가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손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관장님은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손녀였다. 드디어 올레그와 관장님이 찌알꼽스끼 선생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꼭 와 봐야하는지, 그리고 왜 훈련소 앞 전철역 이름이 찌알꼽스끼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런 사실도 몰랐던 내가 한없이 창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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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알꼽스끼 기념 생가 박물관 2층. 찌알꼽스끼가 생전에 연구 공간으로 쓰던 곳이다.]
100년 전 우주 서당 훈장님
찌알꼽스끼 선생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서당 훈장님 같은 분이셨다. 그 곳에서 100여 년 전에 주변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항공우주 관련 공학을 가르쳤다. 학생들과 함께 본인의 집 2층에서 직접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고 실험하고 공부했던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수많은 유물을 보고 나니, 왜 러시아 우주기술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곳을 나올 때까지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해주시는 관장님의 자부심 어린 눈빛에서도 그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 우주기술의 발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독일에서 들여온 미사일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찌알꼽스끼 박물관을 다녀오고 나니 100여 년 전부터 순수하게 과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찌알꼽스끼 선생님 같은 분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미사일 기술을 들여왔다고 해도 지금의 러시아 우주기술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52년 국제과학연합위원회는 1957년과 1958년을 ‘국제지구물리 관측년’으로 정하고 관측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환경을 더욱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다. 그때쯤 이미 소련은 대륙 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음에도, 1957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위성 발사에 크게 놀랐다. 그건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순간을 위해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올렸던 찌알꼽스끼 선생님 같은 분의 역할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1903년 찌알꼽스끼가 ‘반작용 기구에 의한 우주탐험’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감안하면, 50년이 지난 1957년 러시아가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을까.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가 1957년이었던 것도 찌알꼽스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기를 맞춘 것이라고 하니 심지어 여유까지 느껴진다.
찌알꼽스끼 선생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서당 훈장님 같은 분이셨다. 그 곳에서 100여 년 전에 주변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항공우주 관련 공학을 가르쳤다. 학생들과 함께 본인의 집 2층에서 직접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고 실험하고 공부했던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수많은 유물을 보고 나니, 왜 러시아 우주기술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곳을 나올 때까지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해주시는 관장님의 자부심 어린 눈빛에서도 그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 우주기술의 발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독일에서 들여온 미사일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찌알꼽스끼 박물관을 다녀오고 나니 100여 년 전부터 순수하게 과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찌알꼽스끼 선생님 같은 분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미사일 기술을 들여왔다고 해도 지금의 러시아 우주기술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52년 국제과학연합위원회는 1957년과 1958년을 ‘국제지구물리 관측년’으로 정하고 관측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환경을 더욱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다. 그때쯤 이미 소련은 대륙 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음에도, 1957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위성 발사에 크게 놀랐다. 그건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순간을 위해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올렸던 찌알꼽스끼 선생님 같은 분의 역할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1903년 찌알꼽스끼가 ‘반작용 기구에 의한 우주탐험’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감안하면, 50년이 지난 1957년 러시아가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을까.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가 1957년이었던 것도 찌알꼽스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기를 맞춘 것이라고 하니 심지어 여유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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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알꼽스키는 로켓 과학자이자 러시아 우주계획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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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러시아 항공우주박물관 전경. 러시아의 우주계획에 쓰였던 장비가 전시돼 있다.
➋ 스푸트니크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한 가가린 훈련센터장과 최초의 여성우주인인 발렌티나 테레쉬코바.
➌ 당시 유리가가린이 착륙한 현장의 모습.
유리 가가린은 오랜 노력의 결집체
미사일 전문가인 세르게이 카랄료프는 그렇게 50여 년 동안 쌓아 올린 이론을 실제로 구현해 냈다. 1957년 10월 농구공보다 약간 큰 쇠공 모양의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로 올라갔고, 한 달 뒤 강아지 라이카가 2m 가량의 원통형 위성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올라갔다. 마침내 1961년 4월 보스토크 호에 탄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내가 러시아에서 훈련받으면서 비공식적으로 들은 수많은 소문 중에는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비행을 했던 우주인이라기보다는 우주에 갔다가 최초로 무사히 지구로 돌아온 우주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우리는 그들이 스푸트니크 이전부터 수많은 실패와 도전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지금 러시아의 우주 기술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하다. 그 모든 과정이 깔루가에 있는 찌알꼽스끼 우주역사 박물관에 그대로 전시돼 있었다.
내가 찾았던 날에도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수학여행 중 그 박물관에 들러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연구노트부터 최근 러시아가 개발한 화성 탐사선까지 모든 전시물을 직접 보고 느끼고 있었다. 저 멀리 동쪽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그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학생들이 성장해서 이룰 결과에 괜스레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찌알꼽스끼 선생님 생가로 향하는 길의 담벼락에 가득한 낙서 중에는 로켓, 별 등도 있었다. 맹모삼천지교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운이 좋게 2007년 러시아 우주인 훈련소에 있던 기간 중에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5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우주과학기술과 가장 밀접한 곳 중 하나인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의 분위기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여기저기에 축하 행사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당일인 10월 4일에는 훈련소 강당에서 기념행사도 열렸다. 1957년의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뒤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당장 생존이 문제였을 듯하다. 그 당시 한국이 보는 러시아나 미국의 우주 개발을 위한 노력은,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급 승용차 광고 같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➋ 스푸트니크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한 가가린 훈련센터장과 최초의 여성우주인인 발렌티나 테레쉬코바.
➌ 당시 유리가가린이 착륙한 현장의 모습.
유리 가가린은 오랜 노력의 결집체
미사일 전문가인 세르게이 카랄료프는 그렇게 50여 년 동안 쌓아 올린 이론을 실제로 구현해 냈다. 1957년 10월 농구공보다 약간 큰 쇠공 모양의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로 올라갔고, 한 달 뒤 강아지 라이카가 2m 가량의 원통형 위성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올라갔다. 마침내 1961년 4월 보스토크 호에 탄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내가 러시아에서 훈련받으면서 비공식적으로 들은 수많은 소문 중에는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비행을 했던 우주인이라기보다는 우주에 갔다가 최초로 무사히 지구로 돌아온 우주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우리는 그들이 스푸트니크 이전부터 수많은 실패와 도전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지금 러시아의 우주 기술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하다. 그 모든 과정이 깔루가에 있는 찌알꼽스끼 우주역사 박물관에 그대로 전시돼 있었다.
내가 찾았던 날에도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수학여행 중 그 박물관에 들러 찌알꼽스끼 선생님의 연구노트부터 최근 러시아가 개발한 화성 탐사선까지 모든 전시물을 직접 보고 느끼고 있었다. 저 멀리 동쪽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그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학생들이 성장해서 이룰 결과에 괜스레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찌알꼽스끼 선생님 생가로 향하는 길의 담벼락에 가득한 낙서 중에는 로켓, 별 등도 있었다. 맹모삼천지교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운이 좋게 2007년 러시아 우주인 훈련소에 있던 기간 중에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5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우주과학기술과 가장 밀접한 곳 중 하나인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의 분위기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여기저기에 축하 행사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당일인 10월 4일에는 훈련소 강당에서 기념행사도 열렸다. 1957년의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뒤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당장 생존이 문제였을 듯하다. 그 당시 한국이 보는 러시아나 미국의 우주 개발을 위한 노력은,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급 승용차 광고 같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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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이 비행한 궤적 지구를 한 바퀴 돌았지만 지구가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착륙 지점이 이륙 지점보다 약간 서쪽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마냥 우울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소련이 이미 어느 정도 발전된 미사일 기술을 바탕으로 쏘아 올린 것이 스푸트니크 위성이라면, 우리는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어려운 성장의 시간을 거쳐 말 그대로 우리의 별인 우리별 1호를 우주에 올려놓았다. 그런 대한민국이 꽤나 대견하게 느껴진다. 당시 갖게 된 묘한 궁금증은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50주년 기념이 이 정도인데 4년 뒤 2011년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 50 주년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유리 가가린은 러시아 최고의 영웅이다. 최초 여성우주인인 발렌티나 테레쉬코바가 TV에 나와 연설할 때 눈물을 훔치던 러시아 할머니를 생각하면, 만약 유리 가가린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떨지 궁금할 정도다. 그런 유리 가가린이 비행한 지 반백 년. 전승기념일에 멋진 기념식을 열기 위해 며칠 전부터 전투기로 비를 억지로 내리게 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과연 인류 최초 우주인의 비행 50주년 기념일을 어떻게 기념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식을 보면, 비단 러시아만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건은 아닌 것 같다. 러시아 우주전문가들은 아직도 의아하게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해마다 4월 12일이 되면 ‘유리의 밤’을 기념한다. 50주년인 올해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국제우주연맹도 3월 연차 회의 기간 동안 유인우주비행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고 하며, 유엔을 비롯한 세계 여러 기구가 50주년을 기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올해 우주인협회의 연차모임도 유리 가가린 비행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정말이지 50년 전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날아오른 이 사건은 러시아 최초의 도전임과 동시에 인류 최초의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1961년 4월 누구도 가 보지 못한 우주로 날아오르기 위해 지름 2m정도의 보스토크호 캡슐 안에 앉은 신장 157cm의 전투기 조종사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나 또한 3년 전 소유즈 로켓 꼭 대기에 자리한 소유즈 캡슐 안에서 발사를 기다렸던 경험이 있지만 그와는 너무나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우주인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동안 지녔던 행복한 불만이 하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의 매일 우주비행을 다녀온 우주인들의 경험담을 듣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우주비행 경험담이 대학원 시절 학회 참석차 해외 출장을 다녀온 선배들의 경험담처럼 일상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주비행을 해 본 사람일 때면, 우주에 가는 것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나도 얼른 갔다 와서 이 대화에 끼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우주정거장에 도착해서는 ‘아~, 이건 예전 누구누구 우주인이 이야기했던 것이구나’, ‘이건 예전에 누가 했던 이야기였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먼저 들은 탓에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빼앗긴 것 같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로켓의 꼭대기 캡슐 안에서 발사를 기다리던 느낌과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곳을 처음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던 심정을 어찌 비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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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인이 훈련을 받고 있다. 지난 50년간 선배 우주인이 훈련을 겪으며 쌓은 경험 덕분에 요즘 우주인은 더욱 효과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 우주기념일을 꿈꾸며
우주인 훈련을 받다 보면,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훈련 장비를 종종 보게 된다. 과거 우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는 모든 위험한 가능성, 그리고 우주라는 미지의 영역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정말 많은 훈련을 거쳐야 했다. 50년의 우주비행 경험을 축적하면서 도움이 되는 훈련과 큰 관련이 없는 훈련을 점점 더 많이 구별할 수 있었다. 최근 훈련을 받는 우리들은 최적화된 우주인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을 받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신비가 줄어드는 만큼 모호하고 알 수 없는 훈련과 위험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과거 50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남겨준 선배 우주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과정은 계속돼, 미국과 유럽에서는 내가 우주인 훈련 중 가장 힘들어 했던 회전의자 훈련이 우주비행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나 최근 훈련 프로그램에서 빠졌다고 들었다. 언젠가 다음 한국 우주인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훈련을 받고 우주에 간다면 회전의자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힘겹게 받은 회전의자 훈련이 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우주기념일을 꿈꾸며
우주인 훈련을 받다 보면,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훈련 장비를 종종 보게 된다. 과거 우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는 모든 위험한 가능성, 그리고 우주라는 미지의 영역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정말 많은 훈련을 거쳐야 했다. 50년의 우주비행 경험을 축적하면서 도움이 되는 훈련과 큰 관련이 없는 훈련을 점점 더 많이 구별할 수 있었다. 최근 훈련을 받는 우리들은 최적화된 우주인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을 받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신비가 줄어드는 만큼 모호하고 알 수 없는 훈련과 위험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과거 50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남겨준 선배 우주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과정은 계속돼, 미국과 유럽에서는 내가 우주인 훈련 중 가장 힘들어 했던 회전의자 훈련이 우주비행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나 최근 훈련 프로그램에서 빠졌다고 들었다. 언젠가 다음 한국 우주인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훈련을 받고 우주에 간다면 회전의자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힘겹게 받은 회전의자 훈련이 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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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인, Astronaut, Cosmonaut, Taikonaut….이름도 다양하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의미나 정의가 항상 논쟁거리가 된다. 하지만 매년 우주인협회 모임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명칭 자체는 우주를 꿈꾸고, 우주를 향해 날아오르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또한 서로를 소개할 때마다 명칭이 항상 헷갈리지만, 절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특히 과거 아폴로-소유즈 임무에 참여했던 선배 우주인들은 우리의 국적이나 명칭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주 강조한다.
1975년 7월 17일, 러시아의 소유즈와 미국의 아폴로가 우주에서 도킹을 하고두 나라 우주인이 우주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적으로 여겼던 냉전시대였다. 그때도 미국과 러시아 우주인은 서로 상대국을 방문하며 비행을 준비했다. 비행 후에도 함께 미국과 러시아의 여러 곳을 방문해 강연했다. 그때마다 대중 앞에서 서로 ‘우리는 적이 아닌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 어떤 경계도 없는 우주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우리가 이 지구에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애스트로넛인지 코스모넛인지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치적 상황이나 시대가 만든 경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구인으로서 인류는 하나임을, 그리고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경험을 가진 우리가 많은 일에 앞장서 노력해야 한다는 소명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고 있다. 나 역시 우주정거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내내 가슴 깊이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50주년. 이제 겨우 우주개발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참 부러운 기념일이다. 언젠가 한 선배님께서, 수년간 꾸준히 우표를 모아온 사람을 우표 수집가라고 말하지 남이 수십 년 수집한 우표를 통째로 사서 장식장에 전시한 사람을 우표수집가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00년 동안 반복된 비바람을 겪지 않고는 묘목이 절대로 100년 된 노송이 될 수는 없다. 아기가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며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뛸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시간을 뛰어넘어 한 번에 이룰 수는 없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너무 이르게 뛰게 했다가는 다시는 뛰는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될 심각한 부상을 얻을 수도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뛰기를 서두르기보다는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걸음마를 해야 하는 때가 아닐까. 그리고 넘어지는 경험 또한 성장의 한 과정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이기에 더 잘 할 수 있고, 대한민국만이 할 수 있는 우주기술로 세계 여러 우주강국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때가 되면, 지금의 우리와 같은 후발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며 당당히 우리별 1호 발사 50주년, 최초 우주인 비행 50주년, 나로호 발사 성공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