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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엔 김떡과 아이스떡볶이 맛볼까

세계를 향한 ‘늘 말랑 떡’

설을 쇠고 나니 떡국용 떡부터 백설기, 절편, 꿀떡 등 떡이 잔뜩 남았다. 떡을 밥처럼 먹는 것도 하루 이틀, 버리기엔 아깝고 얼려 놓으면 단단해져 맛이 없을 것 같다. 이런 걱정도 이번 설이 마지막이 아닐까. 최근 ‘굳지 않는 떡’이 탄생했다. 떡이 굳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의 간식도 달라질 것이다.









위에 소개한 가상 요리들이 올해 실제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9월 농촌진흥청 발효이용과 한귀정 박사팀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굳지 않는 떡 제조 기술’ 덕분이다. 이 기술로 만든 떡은 시간이 오래 지나거나 냉장고에 보관해도 단단해지지 않고 말랑말랑하다. 냉동실에 꽁꽁 얼렸다가 녹여도 마치 방금 뽑아낸 것처럼 쫄깃쫄깃하다. 떡을 보관했다가 다시 먹을 때 찌거나 데울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떡 굳는 이유는 전분이 ‘늙기 때문’

떡집에서 팔고 있는 떡은 대부분 ‘오늘 아침’에 만든 것이다. 떡은 만든 지 5시간 정도만 지나도 굳으면서 맛이 떨어진다. 대형마트에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떡을 반값으로 팔기도 한다. 떡 제조기에서 따끈따끈한 떡을 뽑아내는 순간부터 속에 있는 전분이 노화하기 때문이다.



곡식에 물을 붓고 가열하면 전분 입자 안에 수분이 들어가 팽팽해지고 점성도가 증가한다(호화). 그런데 호화한 전분은 시간이 지나면 입자들이 서로 수소결합으로 뭉쳐 원래의 단단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노화).



그래서 떡은 만들자마자 먹어야 가장 맛있다. 먹고 남은 떡은 0~4℃에서 노화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냉장고에 두면 안 된다. 영하나 60℃ 이상의 온도에서 노화가 가장 천천히 진행되므로 냉동실에 얼려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얼린 떡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상온에서 녹이면 다시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쫄깃함이 떨어지고 퍼석해져 얼리기 전의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떡은 노화가 더딘 찹쌀로 만든 찹쌀떡이다. 아밀로펙틴 100%로 이뤄진 찹쌀 전분은 멥쌀 전분(아밀로펙틴 80%, 아밀로오스 20%)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부드럽다. 전분을 구성하는 성분 중 긴 사슬 모양인 아밀로오스가 나뭇가지 모양인 아밀로펙틴보다 빨리 노화하기 때문이다.



멥쌀로 만든 떡을 오랫동안 굳지 않게 하기 위해 첨가물을 넣기도 한다. 설탕이나 효소(아밀라아제), 화학적

첨가물(유화제, 보습제, 안정제) 등이다. 설탕에 절인 과일이 오랫동안 촉촉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떡에 설탕을

많이 넣으면 부드러움이 오래간다. 아밀라아제는 전분 입자들을 뭉치게 하는 수소결합을 끊어 노화를 늦춘다. 그러나 이런 떡은 2~3일이 지나면 맛과 질이 떨어진다. 화학 첨가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1급 비밀은 떡방아 찧듯 두들기는 기계



‘굳지 않는 떡’에는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한귀정 박사는 “쌀과 물, 소금만으로도 굳지 않는 떡을 만들 수 있다”며 “그 비밀을 전통적인 떡 제조 방법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왼쪽은 사진 찍은 날(1월 4일) 아침에 멥쌀로 만들어 상온에 둔 일반떡이다. 가운데는 지난해 12월 23일에 멥쌀로, 오른쪽은 같은 날 현미로 만들어 냉동했다가 녹인 ‘굳지 않는 떡’이다. 가운데와 오른쪽에 있는 떡은 만든 지 열흘 이상 지났지만 왼쪽에 있는 떡보다 말랑말랑하다.]



기자가 굳지 않는 떡을 맛보기 위해 농촌진흥청을 찾은 것은 지난 1월 4일, 한귀정 박사는 꽁꽁 언 가래떡 두 종류를 가져왔다. 하나는 그날 아침에 일반 떡 제조기로 만들어 얼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해 12월 23일에 만든 굳지 않는 떡이다. 떡이 자연스럽게 녹도록 책상 한 쪽에 놓고 취재를 시작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떡이 녹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일반 떡이 담긴 비닐은 물방울이 송송 맺혔는데, 굳지 않는 떡이 담긴 비닐은 아무 변화가 없다. “굳지 않는 떡이 수분을 잡아두기 때문이에요. 시간이 지나도 떡에 촉촉한 기운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굳지 않는 셈이죠. 그래서 녹을 때도 수증기가 날아가지 않습니다.”



떡이 어떻게 수증기가 날아가지 않게 한다는 걸까. 한 박사는 일반 떡과 굳지 않는 떡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을 보여줬다. 잘라낸 단면을 보니 굳지 않는 떡에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지만, 일반 떡에는 바늘로 콕콕 찍어놓은 것 같은 미세한 구멍이 있었다. 한 박사는 “굳지 않는 떡은 공기구멍이 커서 수분을 충분히 오랫동안 잡아둔다”고 설명했다.



한 박사는 “떡메를 치면 떡에 공기구멍이 일정하게 생긴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는 인절미와 가래떡, 한과 등을 먹으며 자랐는데 당시의 떡은 요즘 가게에서 파는 떡보다 쫄깃쫄깃함이 오래갔다. 한 박사는 전통적인 떡 제조 과정에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쌀가루 반죽을 쪄서 기계로 뽑아내는 요즘과 달리 과거에는 떡 반죽을 커다란 나무망치(떡메)로 두들기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한 박사는 기존의 떡 제조기에 떡메 치는 과정(펀칭)을 더했다. 먼저 멥쌀을 물에 불려 물기를 없앤 뒤 쌀가루로 빻는다. 여기에 물을 부어 반죽으로 만든 다음 고압 스팀기에서 찐다. 여기까지는 일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다. 하지만 한 박사팀은 반죽을 펀칭한 뒤 가래떡 성형기로 길게 뽑아냈다. 이렇게 만든 떡은 기대했던 대로 오랫동안 말랑말랑함을 유지했다. 냉장고에 오랫동안 넣어놔도 차가워질 뿐 굳지 않았다. 그는 떡 반죽을 찌는 온도와 첨가하는 물의 양, 펀칭의 세기 등을 조절해 가래떡뿐 아니라 인절미나 시루떡을 만드는 것도 성공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민속촌에서는 떡메치기 행사를 볼 수 있다. 한 박사는 떡메를 친 떡이 잘 굳지 않고 말랑말랑한 점에 주목했다.]


 
 
여름엔 아이스떡볶이, 겨울엔 따뜻한 컵떡국

이야기를 듣다보니 떡들이 거의 다 녹았다. 이제는 손으로 눌러보고 직접 맛볼 시간이다. 일반 떡은 여전히 단단했다. 오늘 만든 떡이라고 하기엔 말랑말랑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굳지 않는 떡은 겉보기에는 일반 떡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꾹꾹 눌러보고 잡아당겨보니 꽤 유연하게 휘어지고 끈적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차가운 온도에서 이처럼 말랑말랑한 가래떡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맛은 일반 가래떡과 똑같았다. 하지만 열흘넘게 냉동시켜 놨다가 상온에서 해동시킨 떡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쫄깃쫄깃했다. 씹을 때마다 치아에 찰싹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방앗간에서 방금 뽑아낸 떡 같았다.



한귀정 박사팀은 지난해 12월 28일 CJ, 삼립식품, 떡보의 하루, 풍년떡집 등 26개 제조업체에 이 기술을 이전했다. 그는 “떡 제조업체뿐 아니라 떡볶이 체인 업체나 제과 업체에도 기술을 이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떡 요리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일반 떡과 굳지 않는 떡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 일반 떡은 표면이 거칠지만(1), 굳지 않는 떡은 표면이 매끄럽다. 잘라낸 단면을 비교해 보면 일반 떡은 미세한 구멍이 제멋대로 나 있지만(2), 굳지 않는 떡은 비교적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3). 구멍에 수분을 담아 부드러움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굳지 않는 떡의 비결이다.]





[한 박사팀이 굳지 않는 떡으로 조리한 떡쌈(위)과 조랭이 떡국.]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요리는 인스턴트 떡국과 떡볶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은 전자레인지에 데워야 해 번거롭다. 이 제품들을 만드는 데 굳지 않는 떡을 활용한다면 컵라면처럼 소스와 뜨거운 물을 붓고 젓기만 해도 먹을 수 있다.비스킷대신 떡을 활용한 ‘떡 샌드’나 김에 밥 대신 떡을 넣은 ‘김떡’도 상상할 수 있다. ‘비빔떡’이나 ‘떡 파스타’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한 박사는 “떡은 대부분 쌀로 만들기 때문에 밥과 맛이 비슷하다”며 “그래서 밥을 이용하는 요리에 밥대신 떡을 넣어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자도 김떡을 처음 봤을 때는 고무찰흙으로 김밥을 빚어 놓은 것 같은 생김새 때문에 정말 맛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직접 먹어 보니 김밥과 비슷한 맛과 쫄깃함에 빠져버렸다.



‘굳지 않는 현미 떡’도 탄생했다. 쌀겨와 씨눈을 벗겨낸 멥쌀과 달리 현미는 왕겨만 벗겨내 영양가가 높다. 지금까지는 현미로 만든 떡이 거칠어 선호도가 낮았다. 한 박사팀은 100% 현미만으로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굳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술을 모든 떡에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래떡이나 인절미처럼 반죽을 치대어 만드는 떡은 가능하지만, 백설기나 무지개떡처럼 곱게 빻은 쌀가루를 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다.



한 박사는 굳지 않는 떡 제조 기술을 응용해 떡의 세계화를 이루고자 한다. 떡이 굳지 않으면 유통기한이 늘어나 어디로든 수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쌀과 물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굳지 않는 떡을 만드는 ‘전기떡솥’을 상상한다. 과거 서양에만 있던 바게트와 타르트를 이제는 국내 빵집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듯이 떡도 조만간 전 세계에 널리 퍼질 것이다. 언제나 굳지 않는 ‘늘 말랑 떡’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입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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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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