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으로 그린 첫 남극 그림지도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닿았다. 여기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칠레 산티아고에 내렸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칠레 남부의 푼타아레나스에 닿았다. 이곳이 남극의 문턱이다. 드디어 세종과학기지에 들어가는 길! 금방이라도 도착할 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남극으로 가는 칠레 공군기에 올랐지만 목적지까지는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결국 비행기만 30시간을 넘게 타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세종과학기지가 남극대륙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남극대륙 중에서도 킹조지 섬에 있다. 한국에서 1만 7240km나 떨어진 곳이다.
우리는 남극 칠레공군기지에서 고무보트를 탔다. 킹조지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다. 바람이 강하고 해류가 험한 맥스웰 만을 지날 때는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차디찬 바닷물에 빠지면 5~10분 만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어 구명복도 입어야만 했다. 40여 분쯤 달렸을까. 우뚝 선 세종봉 아래로 세종과학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저절로 고였다.
우리나라는 세종과학기지를 23년간 운영하면서 다른 나라가 제작한 지도를 사용했다. 미국, 독일,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남극 지도를 만들고 곳곳의 지형지물에 자기나라 말로 이름을 붙여왔다. 자신들이 활동하는 영역임을 표시하기 위해서다. 한국도 2008년부터 세종과학기지의 활동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우리말로 지명을 붙이고 있다. 현재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바톤 반도의 지형지물 17개에 백두봉과 세종봉, 나비봉, 전재규봉 같은 우리말 이름을 붙이고 국제지명등록을 앞두고 있다(전에는 국제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우리끼리 불렀을 뿐이었다). 필자는 2009년 12월, 세종과학기지의 그림지도를 그리기 위해 22일간 남극을 다녀왔다.
얼음과 빛이 그린 산수화
남극 풍경을 바라보면 사진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하루에도 날씨가 몇 번씩 달라지기 때문에 빙원과 바다, 그리고 눈과 빛이 만드는 장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찍고 또 찍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필자지만 남극의 눈과 빙하, 바다가 내는 빛을 그대로 담기란 쉽지 않았다.
남극의 지면과 암반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풍화를 겪으면서 다채로운 모습을 갖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매끄럽게 보이는 곳이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채석장처럼 삐죽빼죽하다.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바톤 반도는 과거 두터운 빙하로 덮여 있었는데, 간빙기에 접어들면서 현재는 많이 얇아졌다. 빙하가 짓누르던 무게가 줄어들면서 지각은 높이 솟아 올라 절벽을 만들었다. 마치 핀란드의 피요르드식 해안절벽을 보는 것 같다.
세종과학기지 근처인 마리아 소만의 빙하절벽은 조수간만으로 수면이 상승하거나 하강하면서 빙하가 떨어져나간다. 떨어져나간 조각(유빙)들은 세종과학기지 앞바다를 가득 채우고 유유히 해류를 따라 흘러간다. 유빙은 자갈돌만 한 것부터 산만 한 것까지 다양하다. 빙하와 유빙, 바다가 만드는 쪽빛은 빛과 얼음이 만드는 향연이다. 날씨가 흐린 날에는 유빙의 윤곽이 그리는 그림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안타깝게도 킹조지 섬의 아름다운 빙하가 2030년쯤에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미 마리아 소만의 빙하가 연평균 80여m씩 후퇴하고 있다.
[남극에 생긴 주름살]
남극에 있는 얼음은 평균 두께가 약 2km나 된다. 이 얼음이 경사면이나 계곡을 따라 흐르면 두께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지면에서는 마찰이 생겨 느리게 흐르지만 빙하표면으로 가면서 속도가 빨라져 속도차가 발생하게 된다. 경사가 급할수록 이런 현상은 크게 나타난다. 그 결과 얼음이 쩍쩍 갈라지면서 ‘주름살’이 생겨버렸다.
남극에 있는 얼음은 평균 두께가 약 2km나 된다. 이 얼음이 경사면이나 계곡을 따라 흐르면 두께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지면에서는 마찰이 생겨 느리게 흐르지만 빙하표면으로 가면서 속도가 빨라져 속도차가 발생하게 된다. 경사가 급할수록 이런 현상은 크게 나타난다. 그 결과 얼음이 쩍쩍 갈라지면서 ‘주름살’이 생겨버렸다.
❶ 빙하가 만든 S라인 U계곡
빙하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지면을 침식시켜 곡선을 만든다. 강처럼 V자로 패는 대신 빙하는 U자형의 계곡을 만든다.
❷ 눈밭을 쓰다듬은 손길
헬리콥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 본 남극. 유구한 세월동안 빙하가 움직이면서 만든 흔적들이 썰매를 타고 지나간 자리 같다.
❸ 즉석 소다 아이스크림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인 유빙은 옅은 하늘색과 짙은 바다색과 어우러져 푸른빛을 띤다. 바다와 얼음이 만든 이 예술품은 동물들의 휴식처다.
❹ 빛은 남극 최고의 화가
눈이 항상 흰색을 띠는 것은 아니다. 해질 무렵 눈은 붉게, 또는 보라색으로 물든다.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찬 하얀 도화지에 빛이 제멋대로 색을 칠한다.
빙하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지면을 침식시켜 곡선을 만든다. 강처럼 V자로 패는 대신 빙하는 U자형의 계곡을 만든다.
❷ 눈밭을 쓰다듬은 손길
헬리콥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 본 남극. 유구한 세월동안 빙하가 움직이면서 만든 흔적들이 썰매를 타고 지나간 자리 같다.
❸ 즉석 소다 아이스크림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인 유빙은 옅은 하늘색과 짙은 바다색과 어우러져 푸른빛을 띤다. 바다와 얼음이 만든 이 예술품은 동물들의 휴식처다.
❹ 빛은 남극 최고의 화가
눈이 항상 흰색을 띠는 것은 아니다. 해질 무렵 눈은 붉게, 또는 보라색으로 물든다.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찬 하얀 도화지에 빛이 제멋대로 색을 칠한다.
알콩달콩 사랑 나누는 남극의 천사
세종과학기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남극의 신사’를 만나게 된다. 북극에는 흰곰, 남극에는 펭귄이 떠오를 만큼 펭귄들은 이곳 터줏대감이다. 세종과학기지 인근에는 펭귄마을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펭귄이 알콩달콩 살고있다. 펭귄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부부끼리의 정,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정말 각별하다.
펭귄마을은 최근 남극특별보호구역으로 선정돼 방문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 펭귄마을에 가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 가다보면 고래의 갈비뼈와 등뼈를 볼 수 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영국과 스페인 사람들이 포경사업을 했던 흔적이다. 지금은 남극의 동식물이 엄격히 보호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고래를 잡아 고기와 기름을 얻었다. 또 이곳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펭귄까지도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세종과학기지 주변에서는 ‘도둑갈매기’ 스쿠아(Stercorarius parasiticus)도 볼 수 있다. 스쿠아는 오리보다 조금 큰 새로 발에는 물갈퀴가 있고 부리는 매와 닮았다.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데다 공격적이어서 이곳 육상 먹이사슬에서는 최상이다. 새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탓에 다른 스쿠아의 알이나 새끼조차 공격 대상이 돼버린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보금자리에 다가가면 어미가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때문에 지팡이를 머리보다 높이 들고 다녀야 한다. 스쿠아는 지팡이를 높게 들고 다니는 사람을 거대한 동물로 인식해 공격하지 않는다. 필자도 지팡이를 내렸다가 스쿠아에게 머리를 세차게 맞은 적이 있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이 저돌적인 포식자가 여기저기에 버린 먹이 찌꺼기(새끼 펭귄 사체, 알껍데기)를 보면 자연의 섭리일지라도 마음은 편치 않다.
펭귄보다 더 사람처럼 생긴 동물들이 하나둘씩 바다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땅으로 올라와 옆으로 드러누워 휴식을 취한다. 웨델해표(Leptonychotes weddellii)와 코끼리해표(Mirounga leonina)다. 표범해표 (Hydrurga leptonyx)는 주로 유빙으로 올라온다. 가끔 표범해표가 펭귄을 잡아먹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펭귄을 식사로 즐길 수 있는 건 동물 뿐이다. 남극조약에 의거해 펭귄을 비롯한 남극의 동물들은 매우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중국기지의 한 연구원이 펭귄을 막대기로 쫓는 모습이 그린피스의 망원렌즈에 포착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❶ 밥 먹고 올게
뒤뚱뒤뚱~ 펭귄 4마리가 줄지어 바다로 향하고 있다. 수영 연습이라도 하려는 걸까, 먹이를 사냥하러 일터로 나가는 걸까.
❷ 남극 하늘 지키는 무법자
스쿠아 한 마리가 위엄을 띠고 앉았다. 거칠고 날쌘 이 도둑갈매기 앞에서는 펭귄도, 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다.
❸ 무법자의 식탁
지의류(균류와 조류의 복합체)로 뒤덮인 땅에 스쿠아가 훔쳐 먹은 펭귄 알껍데기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❹ 눈물 짓는 애교둥이
남극에서만 살고 있는 바다표범인 웨델해표. 통통한 볼과 천진난만한 눈매처럼 성격도 온순하다. 몸 전체가 인형처럼 둥글둥글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
뒤뚱뒤뚱~ 펭귄 4마리가 줄지어 바다로 향하고 있다. 수영 연습이라도 하려는 걸까, 먹이를 사냥하러 일터로 나가는 걸까.
❷ 남극 하늘 지키는 무법자
스쿠아 한 마리가 위엄을 띠고 앉았다. 거칠고 날쌘 이 도둑갈매기 앞에서는 펭귄도, 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다.
❸ 무법자의 식탁
지의류(균류와 조류의 복합체)로 뒤덮인 땅에 스쿠아가 훔쳐 먹은 펭귄 알껍데기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❹ 눈물 짓는 애교둥이
남극에서만 살고 있는 바다표범인 웨델해표. 통통한 볼과 천진난만한 눈매처럼 성격도 온순하다. 몸 전체가 인형처럼 둥글둥글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
남극도 녹인 해표와의 우정
세종과학기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연구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곳 연구원들은 1년 동안 기지를 운영하면서 연구를 진행하거나(월동대원) 여름에만 연구 목적으로 머문다(하계연구원). 낮에는 각자 연구 과제를 수행하느라 무척 분주하다. 연구원들이 모두 모이는 시간은 유일하게 식사시간 뿐이다. 깨진 유리창처럼 날카로운 추위와 강풍 탓에 작업하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다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잠을 푹 자도 머릿속이 무겁고 시원하지가 않다. 낮은 기압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1기압(1013hPa)에 적응돼 있는데, 여기는 약 980hPa 밖에 되지 않는다. 연구원들은 피로를 떨치기 위해 저마다 방법을 찾았다. 저녁마다 다른 이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거나 잠에 들기 전에 차를 마시거나 일찍 잠자리에 든다.
연구원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추억거리를 만든다. 남극을 적절히 즐기는 방법을 아는 듯한 한 연구원이 있었다. 그는 이곳의 눈과 추위, 강풍에도 끄떡 없었다. 오히려 기지 근처의 곳곳을 다니며 동물들과 끈끈한 우정을 다졌다. 주로 펭귄이나 해표들과 잘 어울렸다.
그들이 이곳 생활에서 가장 기다리는 것은 보급선이다. 이곳에서 한 해를 보낸 월동대원이 나가고 새 월동대원들이 들어오면서 1년간 먹을 음식과 여러 물품을 반입해온다. 필자가 갔을 때는 날씨가 나빠 보급선이 예정보다 보름 이상 늦어졌다. 결국 매일 김칫국과 어묵무침 등 얼마 안 되는 반찬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대원들의 고충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물품이 도착해도 풍족한 것은 아니다. 운송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6개월밖에 안 되는 라면은 아무리 새것을 보내도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먹게 된다. 머나먼 얼음 나라에서 우리의 활동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대원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❶ 눈밭 위의 빨간 집
세종과학기지의 모습. 하얀 눈밭에 놓인 새빨간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여름 동안, 또는 1년 동안 머물면서 각자 연구 과제를 수행한다.
❷ 애타게 기다리는 큰 배 한 척
세종과학기지의 부두에서 보급선을 기다리고 있는 연구원. 이번 보급선은 예상치 못한 강풍 때문에 보름
이상 늦어졌다. 보급선에는 연구원들이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물품과 장비를 보수하기 위한 자재가 들어 있다.
❸ 유빙은 주차 금지!
연구원들이 가장 기다리는 손님은 보급선! 하지만 해안에 유빙이 너무 많으면 보급선이 닿기 어렵다. 연구원들은 고무보트로 유빙을 밀어내 보급선이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낸다.
❹ 그 단단한 걸 파고 들어갔어?
두 연구원이 얼음 속에 실험 장비를 넣고 있다. 얼음을 파내느라 진땀을 뺀 연구원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스쿠아 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어 재미있다.
(김송열 교수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해 개인전, 국제전 및 기획 단체전 등에 250여 회 출품, 참여했고 국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의 심사 의원위촉을 30여회 이상 역임했다. 현재 배재대 비주얼아트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종과학기지의 모습. 하얀 눈밭에 놓인 새빨간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여름 동안, 또는 1년 동안 머물면서 각자 연구 과제를 수행한다.
❷ 애타게 기다리는 큰 배 한 척
세종과학기지의 부두에서 보급선을 기다리고 있는 연구원. 이번 보급선은 예상치 못한 강풍 때문에 보름
이상 늦어졌다. 보급선에는 연구원들이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물품과 장비를 보수하기 위한 자재가 들어 있다.
❸ 유빙은 주차 금지!
연구원들이 가장 기다리는 손님은 보급선! 하지만 해안에 유빙이 너무 많으면 보급선이 닿기 어렵다. 연구원들은 고무보트로 유빙을 밀어내 보급선이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낸다.
❹ 그 단단한 걸 파고 들어갔어?
두 연구원이 얼음 속에 실험 장비를 넣고 있다. 얼음을 파내느라 진땀을 뺀 연구원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스쿠아 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어 재미있다.
(김송열 교수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해 개인전, 국제전 및 기획 단체전 등에 250여 회 출품, 참여했고 국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의 심사 의원위촉을 30여회 이상 역임했다. 현재 배재대 비주얼아트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