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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빅터 앰브로스 박사의 마이크로RNA 발견

지난 10년 동안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심지어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고도 할 수 있는 게 바로 마이크로RNA(microRNA)의 발견이다. 단일가닥염기 20여 개로 이뤄진 작은 분자인 마이크로RNA가 생명체의 발생과 노화 과정은 물론 질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일급저널에는 거의 매 호 마이크로RNA 관련 논문이 한두 편은 들어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마이크로RNA 연구자가 노벨상을 받는 건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벨상 후보 1순위



1993년 마이크로RNA를 처음 발견한 주인공이 바로 빅터 앰브로스 박사(Victor Ambros,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의대 교수)다. 그는 마이크로RNA를 발견해 이미 여러 상을 탔고 이 분야에 노벨상이 수여될 경우 당연히 1순위일 터이므로 생명과학계의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앰브로스 박사는 노벨상과 이상한 인연이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197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발티모어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같은 대학의

로버트 호비츠 교수 실험실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호비츠 교수는 2002년 세포의 자살프로그램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호비츠 교수팀에 있을 때 앰브로스 박사는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선형동물로 동물의 발달 조절 과정을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는 연구를 했다. 1984년 하버드대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관련된 연구를 계속했다.그는 lin-14와 lin-4라는 두 유전자에 흥미를 느꼈다. 두 유전자는 선충의 발달 속도를 조절하는데, lin-14는 성체가 되는 걸 늦추는 반면 lin-4는 빨리 성체가 되게 하는 ‘조숙 유전자’였다.



흥미롭게도 둘은 따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lin-4가 lin-14를 억제함으로써 작용한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그런데 그 방식이 좀 특이했다. 발달 기간 동안 lin-14 유전자가 발현되는 양, 즉 전령 RNA(mRNA)의 양은 비슷한데 lin-14 단백질의 양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던 것. 발달조절에 관여하는 건 단백질이기 때문에 결국 단백질이 줄어들면서 성숙 억제가 풀려 성체로 발달하는 과정이 진행된 셈이다. 한편 lin-4는 시간이 갈수록 발현량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lin-4는 lin-14의 mRNA가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앰브로스 교수팀은 lin-4의 실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lin-4 유전자는 단백질의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전자가 발현돼 전사체는 만들어지는데 리보솜으로 이동하는 대신 분해돼 염기 61개짜리 RNA 가닥과 22개짜리 RNA 가닥만 남았다. 두 가닥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22개짜리는 61개짜리의 일부였다. 도대체 이 조각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앰브로스 교수팀은 염기서열을 이리저리 비교해보다 놀라운 발견을 했다. lin-4의 22개짜리 RNA 가닥의 염기서열과 상보적인 염기서열이 lin-14 mRNA에 존재했던 것이다! DNA도 그렇지만 RNA 역시 염기서열이 서로 상보적인 두 가닥은 서로 달라붙어 이중나선을 만든다.



연구자들은 생명과학분야의 최고 학술지인 ‘셀’에 발표한 논문에서 “lin-4의 RNA 조각이 안티센스(antisense, 상보적인 영역을 인식해 달라붙는) 메커니즘을 통해 lin-14 mRNA가 단백질로 번역되는 걸 막는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금 봐도 정확한 설명이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이 작은 RNA조각에 대한 특별한 이름은 없었다.









마이크로RNA의 재발견



1866년 오스트리아의 성직자이며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그레고르 멘델은 완두 교배 실험을 통해 찾아낸 유전 법칙을 학회지에 투고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논문은 찰스 다윈의 서재에서도 발견됐으나 다윈이 읽은 흔적은 없다. 그렇게 잊히는가 싶었지만 1900년 몇몇 과학자들이 그의 실험 결과를 재발견하면서 멘델은 ‘유전학의 아버지’로 과학사에 남았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이 마이크로RNA 발견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앰브로스 교수팀의 발견은 ‘흥미로운 사례’로 치부됐을 뿐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결과라는 걸 당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2000년에 이르러 여러 마이크로RNA가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마침내 마이크로RNA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경악했다.



로버트 호비츠 교수가 포함된 연구팀은 역시 예쁜꼬마선충에서 lin-4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let-7이라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let-7의 21개짜리 RNA 조각은 상보적인 염기서열이 있는 여러 유전자(lin-14, lin-28, lin-41, lin-42, daf-12)의 mRNA에 달라붙어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못하게 했다. 유전자 하나에 상보적인 염기서열이 있다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5개에나 그런 영역이 있고 게다가 이들 유전자가 선충의 발달에 관여했기 때문에 여기엔 심오한 무언가가 내포돼 있는 듯 보였다. 연구자들은 lin-4나 let-7 같은 RNA 조각이 선충의 발달 과정을 정교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 뒤 선충 뿐 아니라 초파리, 생쥐, 사람 등 동물뿐 아니라 애기장대, 벼 등 식물에서도 작은 RNA 조각이 발견됐고 이들을 통칭해 ‘아주 작다’는 뜻의 접두사 마이크로(micro)를 붙여 ‘마이크로RNA’라고 부르기로 했다. 보고되는 마이크로RNA 수가 늘어나면서 명명법도 만들었는데, 마이크로RNA를 ‘miR-’로 줄여 표시하고 뒤에 일련의 숫자를 붙이는 방식이다(예를 들어 miR-133). 따라서 작은 숫자가 큰 숫자보다 대체로 먼저 발견된 마이크로RNA다.



마이크로RNA를 통한 번역 단계에서의 유전자 조절(전사 후 조절)은 진핵생물에서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조절 메커니즘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흥미롭게도 대장균 같은 원핵생물에는 마이크로 RNA가 없다. 따라서 마이크로RNA를 통한 조절 메커니즘은 진핵생물의 진화과정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유전자는 mRNA를 거쳐 단백질이 되고 어떤 유전자는 전사체가 대부분 잘려 나가고 고작 20여 개 길이인 마이크로RNA가 될까. 세포 안에서 마이크로RNA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연구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 교수다.



김 교수팀은 2003년 마이크로RNA의 유전자가 발현돼 만들어진 전사체(pri-miRNA라고 부른다)를 인식해 염기 60여 개 길이의 조각(전(前) 마이크로RNA)으로 만드는 데 관여하는 효소인 드로샤(Drosha)를 발견했다. 2004년에는 보통 유전자들의 전사를 맡고 있는 RNA중합효소Ⅱ가 마이크로RNA 유전자의 전사 역시 맡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운반RNA(tRNA)의 유전자 전사를 하는 RNA중합효소Ⅲ이 마이크로RNA의 전사도 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김 교수팀은 마이크로RNA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 ‘네이처 구조·분자생물학’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miR-29가 암억제 유전자인 p53을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사실 miR-29의 표적은 p85알파, CDC42라는 단백질로 이 두 단백질은 p53의 활성을 억제한다. 즉 억제하는 걸 억제함으로써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지난해 ‘셀’에는 초파리의 miR-8이 성장을 조절함을 규명한 논문을 실었다. miR-8 유전자가 고장난 초파리는 몸집이 작았다. 김 교수팀은 사람의 miR-200이 초파리의 miR-8에 해당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런 업적 때문에 김빛내리 교수는 한국에서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과학자로 손꼽힌다.



유전자 절반 이상이 miRNA 조절 받는 듯



지금까지 발견된 마이크로RNA는 5000개가 넘는다. 사람의 게놈에도 1000개가 넘게 존재할 것으로 예측된다. 보통 마이크로RNA 하나가 100여 개의 표적 유전자를 조절하는 걸로 보인다. 사람 유전자의 절반 이상이 마이크로RNA의 조절을 받는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마이크로RNA와 질병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가 활발하다. 마이크로RNA의 비정상적인 발현이 광범위한 질병에서 관찰되고 있다. 어떤 조직의 세포에서 발현되는 마이크로RNA 수백 개의 패턴을 분석해 암세포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연구도 진행됐다.



8월 26일자 ‘네이처’를 보면 SIRT1이라는 단백질이 miR-134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해 기억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miR-134는 CREB 같은 시냅스 활성 유전자의 작용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들의 상호작용을 이용하면 새로운 퇴행성신경질환 치료제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생명과학의 많은 영역이 마이크로RNA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불과 959개의 세포로 이뤄진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선충의 발달과정을 집요하게 관찰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생명의 비밀을 밝혀낸 앰브로스 교수의 이야기는 ‘행운은 준비된 사람의 몫’이라는 격언에 딱 맞는 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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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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