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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간이나 걸린 비행 끝에 도착한 하이데바라드는 몬순 기간이라 날씨가 비교적 선선했다. 대회 첫날,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개막식에 프라티바 파틸 인도 대통령이 전통의상인 사리에 터번을 두르고 등장했다. 이마에는 행운을 상장하는 빨간 점인 빈디를 찍은 모습이었다. 개막식에는 ICM 개최국 국가원수가 반드시 참석한다.



파틸 대통령은 연설에서 “공작 장식과 뱀의 보석 같이, 수학자는 모든 과학의 선두에 서 있다”라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인도수학의 역사를 소개했다. 공작은 인도의 국조이고 뱀은 힌두교에서 숭배하는 동물로 수학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도는 라마누잔을 비롯한 뛰어난 수학자를 많이 배출했고 기원전부터 대수학과 기하학이 발전했다. 숫자 ‘0’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 필즈상은 이스라엘 출신의 수학자인 엘론 린덴스트라우스 프린스턴대 교수, 베트남 출신의 수학자 응오바오쩌우 시카고대 교수, 러시아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스미르노프 제노바대 교수, 프랑스의 세드리크 빌라니 에콜 노말 리옹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정보과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수학자에게 주는 네반리나상은 다니엘 스펠만 예일대 교수, 응용수학 분야의 공로자에게 주는 가우스상은 이브 므예르 카샹 고등사범학교 교수, 이번에 새로 생긴 공로상인 천상은 루이스 니렌버그 뉴욕대 교수가 각각 받았다.



시상식 분위기는 차분했다. 예상했던 박수와 환호도 거의 없었다. 수상자도 기뻐하거나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마련된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수상자들은 대회 6개월 전에 미리 수상 소식을 접했다고 밝혔다. 스미르노프 교수는 “시상식까지 대중에게는 수상 소식을 비밀로 하는 게 필즈상의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수학과 물리학의 경계 허물어져



최근 필즈상 수상자의 업적을 보면 수학과 물리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미르노프 교수와 빌라니 교수는 수학을 이용해 물리학의 중요 문제를 해결했고, 린덴스트라우스 교수와 응오 교수는 물리학 이론을 이용해 수학 문제를 해결했다. 빌라니 교수는 “물리학과 수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과학자나 공학자와도 교류해야 수학을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빌라니 교수는 수학자답지 않은 패션 감각으로 대회 내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시상식에는 깔끔한 정장에 빨간 리본을 목에 매고 왼쪽 어깨에는 거미 브로치를 달았다. 마침 뒤에 앉아 있던 프랑스 기자가 “프랑스 수학계의 패셔니스타로 언제나 거미 브로치를 달고 다닌다”고 설명했다. 빌라니 교수에게 거미 브로치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거미 브로치가 없으면 문제를 풀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징크스라고 밝혔다.



그는 두 가지 업적을 인정받아 필즈상을 수상했다. 첫 번째는 볼츠만 방정식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평형 상태에 있는 기체에 열을 가하면 기체 분자는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형 상태가 깨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원래 온도로 돌아오면 기체 분자는 다시 평형 상태로 돌아온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였던 볼츠만은 이런 비평형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볼츠만 수송방정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05년 빌라니 교수는 볼츠만 수송방정식과 관련된 일부 문제를 해결했다. 방정식에 들어가는 초깃값이 커도, 즉 기체 분자에 큰 충격을 가해도 결국 평형 상태로 돌아온다는 사실과 그때 걸리는 시간을 밝혔다. 빌라니 교수의 해법은 볼츠만 수송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체 분자 운동을 설명하는 다른 방정식에도 적용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빌라니 교수의 또 다른 업적은 란다우 감쇠와 관련이 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러시아의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는 플라즈마 상태에서 음이온의 진동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평형 상태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란다우는 계산하기 어려운 부분을 빼고 계산해 평형상태에 이르는 것을 증명했다. 빌라니 교수는 란다우 교수가 버렸던 계산식을 그대로 살린 채 일정한 공간에 있는 음이온의 개수를 나타내는 함수를 적분해 평형 상태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였다. 완벽한 증명은 아니지만 란다우의 계산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스미르노프 교수는 삼각격자 위에서 침투이론을 설명했다. 침투이론은 모래 위에 빗물이 스며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다른 업적은 2차원 이징모형의 증명이다. 이징모형은 독일 물리학자 에른스트 이징의 이름을 딴 수학 모형이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점 위에 원자가 있을 때 서로 어떻게 작용하고 에너지가 정의되는지 나타낸다.



린덴스트라우스 교수는 에르고딕 정리를 이용해서 정수론의 중요 문제인 리틀우드 추측을 해결했다. 에르고딕 정리는 입자 하나가 상태 공간에서 같은 에너지를 갖는 곡면의 모든 부분을 골고루 돌아다닌다는 이론이다. 한번 친 공이 무한히 움직인다고 가정할 때 당구공이 당구대 위의 모든 곳을 지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린덴스트라우스 교수는 이를 이용해 무리수를 아주 가까운 유리수로 나타내는 방법인 리틀우드 추측을 해결했다. 리틀우드 추측은 지난 80년간 미해결 문제였다.



응오 교수는 랭글란즈 프로그램의 기본보조정리를 증명했다. 랭글란즈 프로그램은 정수론 문제를 함수론 문제로 바꿀 수 있다는 캐나다 수학자 로버트 랭글란즈의 추측이다. 정수론 문제는 보기에는 간단해 보인지만 실제 풀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함수론 문제로 바꿀 수만 있다면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 수 있게 된다.



응오 교수가 증명한 문제는 랭글란즈 프로그램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 랭글란즈는 이를 쉽게 풀 수 있다고 생각해 ‘기본보조정리’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랭글란즈의 생각과 달리 기본보조정리는 40년 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다. 많은 수학자들이 기본보조정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했는데, 기본보조정리의 증명이 늦어지면서 수많은 문제가 증명을 기다리며 쌓여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문제가 완벽히 증명됐다는 점이 응오 교수의 업적을 높이 사는 이유다.



기본보조정리는 복잡한  보형형식 을 간단한 보형형식으로 바꿀 수 있어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응오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마당이론에 바탕을 둔 기하학적 구조를 이용했다. 양자마당이론은 물리학에서 전기장과 같은 장을 설명하는 양자이론이다. 응오 교수는 기본보조정리를 증명한 논문에서 신석우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을 인용했다. 묘한 인연(?)을 느낀 기자가 이와 관련해 한국 수학에 대해 질문하자 응오 교수는 “한국 수학은 최근 20년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모두 급속도로 발전한 것으로 안다며 “함께 일하는 한국 수학자 중에도 뛰어난 수학자가 많다”고 대답했다.  



한국 최초의 필즈상 후보



같은 아시아 국가 베트남 출신인 응오 교수의 수상은 아직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화제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필즈상 수상자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필즈상 후보자를 거론하기는 사실 어렵다. 40세 미만의 젊은 수학자에게 상을 주기 때문에 수학계의 주요 문제 하나를 해결한 뒤 곧바로 다음 대회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2014년 필즈상도 앞으로 3년 동안 주요 문제를 해결한 수학자가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젊은 수학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어 희망을 품게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 속담처럼 필즈상 수상자는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두각을 나타낸다. 최근에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출신 수상자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필즈상 수상자 4명 중 3명이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메달 수상자다. 특히 스미르노프 교수와 응오 교수는 만점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2006년 수상자인 테렌스 타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그레고리 페렐만 박사 역시 금메달 출신이다. 역대 필즈상 수상자 52명 중 올림피아드 메달 수상자는 9명으로 17%에 달한다. 이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의 필즈상 수상 전망을 밝게 한다. 한국은 1995년 이후 거의 매년 2명 이상의 올림피아드 금메달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고, 수상자 중 60%가 수학과에 진학해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 이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한국 수학의 미래를 밝게 보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최근 대수기하 및 복수기하 분야에서 주요 연구 결과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40세가 넘어 필즈상 후보에는 오를 수 없지만,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는 15년간 미해결 문제였던 라스펠트의 예상과 40년간 미해결 문제였던 변형불변성 문제도 증명했다. 올해 들어 국가 과학자로 선정됐다. 이러한 공로로 2006 ICM 초청강연자로 초대받았다. K3곡면에 관한 연구로 세계 수학계의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금종해 고등과학원 교수, 모듈라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김영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많은 젊은 수학자가 꾸준히 세계적인 성과를 내놓고 있다.







32세의 젊은 수학자 박진현 KAIST(카이스트) 교수도 주목할 만하다. 박 교수는 시카고대에서 대수기하학을 전공할 당시 별명이 ‘천재’일 정도로 유명했다. 박 교수가 주로 연구하는 분야는 대수위상의 한 분야인 K 이론이다. 지난 해 K 이론을 따르는 모티빅 코호몰로지에 관한 연구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대한수학회에서 주는 ‘상산 젊은 수학자상’을 받았다. 이 연구는 최근 필즈상의 추세인 물리학과 수학의 통합과 맞물려 있어 기대를 걸게 한다. K 이론은 물리학의 양자마당이론과 양자통계물리학에 응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정수론의 산술기하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연소 KAIST 교수로 화제가 됐던 최서현 교수(27), 한린 인하대 교수(28) 등이 그 주인공이다. 최서현 교수와 한린 교수는 모두 올림피아드 2회 연속 금메달 수상자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뒤 바로 국내 대학 교수가 된 인재다.



이 분야에 주목해야 할 젊은 수학자가 한 명 더 있다. 내년 가을부터 미국 매사추세스공대(MIT)에서 강의할 예정인 신석우 연구원(32)이다. 신 연구은 보형형식과  갈루아표현  등을 연구한다. 2008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수학연보에 소개한 갈루아 표현에 관한 논문이 올해 주요 학술지에 실릴 예정이다.



편미분방정식은 국내에서 두터운 연구진을 형성하고 있는 분야다. 그 중심에 이기암 서울대 교수, 채동호 성균관대 교수가 있으며, 젊은 연구진으로는 임미경 KAIST 교수(35)가 주목받고 있다. 임 교수는 편미분방정식을 이용해 역문제(inverse problem)를 연구한다. 이 외에 표현론과 조합론, 수치해석 분야에서도 젊은 연구자들과 세계적인 석학이 함께 연구하며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한국 수학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놀라운 성장을 했다. 최근 10년 동안 수학 논문 수가 2.5배나 늘었고 2007년 세계적인 학술지에 낸 수학 논문 수가 세계 12위를 차지하면서 국제수학자연맹의 수학등급도 4급까지 올랐다.



한국 수학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4년 뒤 2014 서울 ICM에서 한국 수학자가 필즈상을 받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러나 2014 서울 ICM 조직위원장인 박형주 포스텍 교수는 “세계 수학계의 주요 문제를 국내 연구진이 해결한 경우가 21세기 들어 늘어나고 있다”며 “여러 연구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국내 수학자들이 세계 주요 문제에 계속 도전한다면 곧 필즈상 수상이 가능한 수준의 업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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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조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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