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휴면 전략 펴는 깽깽이풀
씨앗이 모체를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물론 그에 맞춰 씨앗(또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과피)의 형태도 적응돼 있지요. 마치 헬리콥터처럼 날개가 돌면서 떨어지는 단풍나무열매를 본 적이 있겠죠. 이처럼 껍질의 일부가 비늘처럼 돼 바람을 탈 수 있는 열매를 시과(翅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씨앗(또는 열매)의 활공능력이 가장 뛰어날까요. 인도네시아에 자생하는 덩굴식물인 알소미트라(Alsomitra)의 씨앗이 단연 1등이라고 하는군요.
박처럼 생긴 커다란 열매가 벌어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씨앗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데, 멀리서 보면 꼭 행글라이더처럼 보입니다. 씨앗 양옆으로 종이처럼 얇은 조직이 붙어 있는데 ‘날개폭’이 15cm나 됩니다. 그런데 무게는 고작 0.3g에 불과하지요. 사실 날개의 두께는 1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도 채 안 되기 때문에 종이보다 훨씬 얇지요. 땅에 안착한 뒤 소나기라도 내리면 날개는 빗방울을 못 이겨 찢어지고 씨앗이 발아하지요.
우리나라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나무의 열매, 즉 도토리는 동물의 건망증을 이용해 새로운 땅을 찾습니다. 가을에 등산을 하다 보면 도토리를 열심히 챙기는 다람쥐나 청설모를 볼 수 있는데, 이 녀석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땅에 숨기는 도토리 가운데 일부가 이듬해 싹을 틔우는 것이죠. 워낙 많다 보니 다 기억을 못하는 게 당연하죠.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Contents/201008/30(1).jpg)
너무 예쁜 꽃을 피우는 자생식물이라 멸종위기에 몰린 깽깽이풀도 비슷한 전략을 써서 씨앗을 퍼뜨립니다. 깽깽이풀의 씨앗은 쌀알만 한데, 겉에 달콤한 당분이 붙어 있어 개미나 설치류 동물들이 좋아하지요. 이 녀석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저장해 둔 씨앗 가운데 일부가 발아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깽깽이풀의 씨앗을 구해다 뿌려도 발아가 잘 안 되다 보니 엉뚱한 얘기가 생겼습니다. 즉 개미가 있어야 발아를 한다는 것이죠.
이건 틀린 얘기랍니다. 개미는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은 하지만 발아를 도와주는 건 아닙니다. 깽깽이풀 씨앗이 발아가 잘 안 되는 건 ‘이중 휴면’이란 현상 때문이라는군요. 먼저 씨앗의 휴면(dormancy)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해볼까요.
보통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있으면 씨앗이 발아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쉽게’ 발아하는 종류도 있지만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돼야 발아하는 종류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건조한 지대에 사는 식물의 씨앗 가운데는 겉에 발아를 억제하는 물질이 발라져 있는 종류가 있습니다. 비가 충분히 내려 이 물질이 씻겨 나가야 발아가 시작되죠. 어린 식물은 수분이 충분히 공급돼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경우는 일정 시간 낮은 온도에 노출된 뒤라야 발아하는 씨앗이 많습니다. 가을에 씨앗이 바로 발아할 경우 식물체가 겨울에 얼어 죽기 때문에 겨울을 난 뒤에 싹을 틔우기 위한 전략인 셈이죠. 이런 현상이 씨앗의 휴면입니다. 그렇다면 깽깽이풀 씨앗의 이중 휴면이란 어떤 현상일까요.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Contents/201008/31(1).jpg)
특이하게도 깽깽이풀의 씨앗은 겨울로 착각하게 하는 저온처리만으로는 발아를 잘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앞서 여름으로 착각하게 하는 고온처리도 해줘야 한다는군요. 눈을 뜨게 하려면(발아하게 하려면) 두 번 잠을 깨워야 하니 ‘이중 휴면’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밝혀진 뒤 한국자생식물원은 깽깽이풀을 대량으로 증식하고 있다는군요.
1만 년 만에 깨어난 씨앗?
이건 여담인데 연꽃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로 과피가 단단한 열매가 있습니다. 브라질너트 나무의 열매로 여무는 데 14개월이나 걸립니다. 그런데 워낙 단단해 도끼로 쪼개야 그 속에 있는 씨앗을 꺼낼 수 있다는 군요.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서 브라질너트나무의 씨앗은 어떻게 발아할 수 있을까요.
이 나무가 자생하는 곳에는 아구티(agouti)라는 고양이만 한 설치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의 이빨이 워낙 억세 브라질너트나무의 열매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군요. 과피 안에는 10여 개의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구티가 먹고 남은 걸 두고 가거나 나중에 먹으려고 숨겨뒀다가 잊어버린 씨앗이 발아합니다. 식물과 동물이 공생하는 유별난 예가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씨앗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네요. 저요? 저였으면 벌써 전 세계 취재진들이 함안으로 몰려왔게요. 연꽃의 경우 중국에서 1300년 전 씨앗이 발견돼 발아에 성공한 기록이 있습니다. 1300년 전이면 당나라 시대인가요. 가장 오래된 씨앗은 2005년 싹을 틔운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입니다. 예수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다 찾아낸 씨앗을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발아시켰다는군요. 기후가 덥고 건조 하다보니 DNA 같은 생체분자를 파괴하는 활성산소의 발생이 억제돼 씨앗이 이토록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식물체가 26개월째 자라고 있을 무렵 뒤늦게 논문을 ‘사이언스’라는 유명한 과학저널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스위스 연방연구소의 펠릭스 구걸리라는 분이 이 논문을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967년에 1만 년 된 씨앗이 발아한 적이 있었다는 놀라운 내용이었어요. 북극루핀이라는 콩과 식물의 씨앗으로 발견된 지층에서 함께 나온 유물로 추정컨대 최소한 1만 년은 된 씨앗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편지 아래 구걸리 박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스라엘 연구자들의 편지도 실렸습니다. 이에 따르면 북극루핀의 경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죠. 아무튼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저처럼 수백 년 된 씨앗은 물론 수천 년 된 씨앗이 언젠가 깨어날 날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지 않을까요.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Contents/201008/33(1).jpg)
인류 식량의 60%는 씨앗
여러분과 별 상관도 없는 씨앗 얘기를 너무 장황히 하고 있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인류문명의 씨앗을 뿌린 건 말 그대로 ‘씨앗’이었습니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해 정착하면서 문명을 꽃피웠는데 농경생활이라는 게 주로 식물을 키워 씨앗을 거둬들이는 일이니까요.
유인원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 인류의 식단에서 씨앗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경우 섭취하는 칼로리의 60%가 씨앗에서 나옵니다. 서구인들보다 고기를 덜 먹는 한국 사람들은 아마 더 높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밥은 벼의 씨앗(주로 배젖)이고 빵도 밀의 씨앗을 갈은 가루를 반죽해 만듭니다. 옥수수도 콩도 마찬가지죠. 술안주로 즐겨 먹는 땅콩이나 아몬드, 호두도 다 씨앗이죠. 식혜에 띄우는 잣도 물론이고요.
사실 술도 씨앗을 발효시킨 종류가 많습니다. 요즘 인기가 높은 막걸리(쌀)가 그렇고 맥주(보리)나 위스키(보리나 옥수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고량주는 수수로 만든 술이고요. 양념류에도 씨앗이 많습니다. 후추가 대표적인 예이고 참깨나 들깨도 다 씨앗이지요. 냉면에 넣는 노란 겨자도 씨앗을 갈아 만든 것이죠.
그뿐인가요. 기호식품의 쌍벽을 이루는 커피와 초콜릿 모두 식물의 씨앗(커피나무와 카카오)을 가공해 만듭니다. 요새는 인스턴트 커피 대신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커다란 보리알처럼 생긴, 짙은 고동색으로 볶은 커피콩이 이젠 익숙하시죠?
저는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구멍이 숭숭 뚫린 연꽃의 뿌리는 ‘연근’이라고 해서 주로 조림을 해 먹습니다. 그런데 연꽃의 씨앗도 ‘연자육(蓮子肉)’이라는 이름으로 한약재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주로 심장의 열을 내리고 화를 가라앉히는 처방에 들어간다는군요.
사실 한약재의 상당수가 식물의 씨앗입니다. 살구 씨앗인 ‘행인(杏仁)’은 호흡기 질환에, 복숭아 씨앗인 ‘도인(桃仁)’도 어혈을 푸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홍화씨는 뼈를 다쳤을 때 좋다고 하네요. 여러분의 삶이 식물의 씨앗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돼 있는지 실감이 나시죠.
지난 여름 동안 저는 꽃을 10여 송이나 피웠고 벌써 열매를 얻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더위가 남아 있어 9월 초까지는 한 두 송이 더 피울 것 같네요. 혹시 함안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제가 있는 함안박물관에 꼭 한번 들르세요.
얼마 전에는 식물학자 한 분이 오셔서 제 잎 하나를 떼어가셨답니다. DNA검사를 해서 오늘날 한반도에 자생하고 있는 연꽃과 어떤 관계에 있나 규명하려고 한다는군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도 들려드리고 싶군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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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휴명 전략펴는 깽깽이풀
씨앗이 모체를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물론 그에 맞춰 씨앗(또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과피)의 형태도 적응돼 있지요. 마치 헬리콥터처럼 날개가 돌면서 떨어지는 단풍나무열매를 본 적이 있겠죠. 이처럼 껍질의 일부가 비늘처럼 돼 바람을 탈 수 있는 열매를 시과(翅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씨앗(또는 열매)의 활공능력이 가장 뛰어날까요. 인도네시아에 자생하는 덩굴식물인 알소미트라(Alsomitra)의 씨앗이 단연 1등이라고 하는군요.
박처럼 생긴 커다란 열매가 벌어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씨앗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데, 멀리서 보면 꼭 행글라이더처럼 보입니다. 씨앗 양옆으로 종이처럼 얇은 조직이 붙어 있는데 ‘날개폭’이 15cm나 됩니다. 그런데 무게는 고작 0.3g에 불과하지요. 사실 날개의 두께는 1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도 채 안 되기 때문에 종이보다 훨씬 얇지요. 땅에 안착한 뒤 소나기라도 내리면 날개는 빗방울을 못 이겨 찢어지고 씨앗이 발아하지요.
우리나라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나무의 열매, 즉 도토리는 동물의 건망증을 이용해 새로운 땅을 찾습니다. 가을에 등산을 하다 보면 도토리를 열심히 챙기는 다람쥐나 청설모를 볼 수 있는데, 이 녀석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땅에 숨기는 도토리 가운데 일부가 이듬해 싹을 틔우는 것이죠. 워낙 많다 보니 다 기억을 못하는 게 당연하죠.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Contents/201008/30(1).jpg)
너무 예쁜 꽃을 피우는 자생식물이라 멸종위기에 몰린 깽깽이풀도 비슷한 전략을 써서 씨앗을 퍼뜨립니다. 깽깽이풀의 씨앗은 쌀알만 한데, 겉에 달콤한 당분이 붙어 있어 개미나 설치류 동물들이 좋아하지요. 이 녀석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저장해 둔 씨앗 가운데 일부가 발아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깽깽이풀의 씨앗을 구해다 뿌려도 발아가 잘 안 되다 보니 엉뚱한 얘기가 생겼습니다. 즉 개미가 있어야 발아를 한다는 것이죠.
이건 틀린 얘기랍니다. 개미는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은 하지만 발아를 도와주는 건 아닙니다. 깽깽이풀 씨앗이 발아가 잘 안 되는 건 ‘이중 휴면’이란 현상 때문이라는군요. 먼저 씨앗의 휴면(dormancy)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해볼까요.
보통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있으면 씨앗이 발아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쉽게’ 발아하는 종류도 있지만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돼야 발아하는 종류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건조한 지대에 사는 식물의 씨앗 가운데는 겉에 발아를 억제하는 물질이 발라져 있는 종류가 있습니다. 비가 충분히 내려 이 물질이 씻겨 나가야 발아가 시작되죠. 어린 식물은 수분이 충분히 공급돼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경우는 일정 시간 낮은 온도에 노출된 뒤라야 발아하는 씨앗이 많습니다. 가을에 씨앗이 바로 발아할 경우 식물체가 겨울에 얼어 죽기 때문에 겨울을 난 뒤에 싹을 틔우기 위한 전략인 셈이죠. 이런 현상이 씨앗의 휴면입니다. 그렇다면 깽깽이풀 씨앗의 이중 휴면이란 어떤 현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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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깽깽이풀의 씨앗은 겨울로 착각하게 하는 저온처리만으로는 발아를 잘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앞서 여름으로 착각하게 하는 고온처리도 해줘야 한다는군요. 눈을 뜨게 하려면(발아하게 하려면) 두 번 잠을 깨워야 하니 ‘이중 휴면’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밝혀진 뒤 한국자생식물원은 깽깽이풀을 대량으로 증식하고 있다는군요.
1만 년 만에 깨어난 씨앗?
이건 여담인데 연꽃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로 과피가 단단한 열매가 있습니다. 브라질너트 나무의 열매로 여무는 데 14개월이나 걸립니다. 그런데 워낙 단단해 도끼로 쪼개야 그 속에 있는 씨앗을 꺼낼 수 있다는 군요.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서 브라질너트나무의 씨앗은 어떻게 발아할 수 있을까요.
이 나무가 자생하는 곳에는 아구티(agouti)라는 고양이만 한 설치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의 이빨이 워낙 억세 브라질너트나무의 열매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군요. 과피 안에는 10여 개의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구티가 먹고 남은 걸 두고 가거나 나중에 먹으려고 숨겨뒀다가 잊어버린 씨앗이 발아합니다. 식물과 동물이 공생하는 유별난 예가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씨앗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네요. 저요? 저였으면 벌써 전 세계 취재진들이 함안으로 몰려왔게요. 연꽃의 경우 중국에서 1300년 전 씨앗이 발견돼 발아에 성공한 기록이 있습니다. 1300년 전이면 당나라 시대인가요. 가장 오래된 씨앗은 2005년 싹을 틔운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입니다. 예수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다 찾아낸 씨앗을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발아시켰다는군요. 기후가 덥고 건조 하다보니 DNA 같은 생체분자를 파괴하는 활성산소의 발생이 억제돼 씨앗이 이토록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식물체가 26개월째 자라고 있을 무렵 뒤늦게 논문을 ‘사이언스’라는 유명한 과학저널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스위스 연방연구소의 펠릭스 구걸리라는 분이 이 논문을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967년에 1만 년 된 씨앗이 발아한 적이 있었다는 놀라운 내용이었어요. 북극루핀이라는 콩과 식물의 씨앗으로 발견된 지층에서 함께 나온 유물로 추정컨대 최소한 1만 년은 된 씨앗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편지 아래 구걸리 박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스라엘 연구자들의 편지도 실렸습니다. 이에 따르면 북극루핀의 경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죠. 아무튼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저처럼 수백 년 된 씨앗은 물론 수천 년 된 씨앗이 언젠가 깨어날 날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지 않을까요.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Contents/201008/33(1).jpg)
인류 식량의 60%는 씨앗
여러분과 별 상관도 없는 씨앗 얘기를 너무 장황히 하고 있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인류문명의 씨앗을 뿌린 건 말 그대로 ‘씨앗’이었습니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해 정착하면서 문명을 꽃피웠는데 농경생활이라는 게 주로 식물을 키워 씨앗을 거둬들이는 일이니까요.
유인원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 인류의 식단에서 씨앗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경우 섭취하는 칼로리의 60%가 씨앗에서 나옵니다. 서구인들보다 고기를 덜 먹는 한국 사람들은 아마 더 높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밥은 벼의 씨앗(주로 배젖)이고 빵도 밀의 씨앗을 갈은 가루를 반죽해 만듭니다. 옥수수도 콩도 마찬가지죠. 술안주로 즐겨 먹는 땅콩이나 아몬드, 호두도 다 씨앗이죠. 식혜에 띄우는 잣도 물론이고요.
사실 술도 씨앗을 발효시킨 종류가 많습니다. 요즘 인기가 높은 막걸리(쌀)가 그렇고 맥주(보리)나 위스키(보리나 옥수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고량주는 수수로 만든 술이고요. 양념류에도 씨앗이 많습니다. 후추가 대표적인 예이고 참깨나 들깨도 다 씨앗이지요. 냉면에 넣는 노란 겨자도 씨앗을 갈아 만든 것이죠.
그뿐인가요. 기호식품의 쌍벽을 이루는 커피와 초콜릿 모두 식물의 씨앗(커피나무와 카카오)을 가공해 만듭니다. 요새는 인스턴트 커피 대신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커다란 보리알처럼 생긴, 짙은 고동색으로 볶은 커피콩이 이젠 익숙하시죠?
저는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구멍이 숭숭 뚫린 연꽃의 뿌리는 ‘연근’이라고 해서 주로 조림을 해 먹습니다. 그런데 연꽃의 씨앗도 ‘연자육(蓮子肉)’이라는 이름으로 한약재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주로 심장의 열을 내리고 화를 가라앉히는 처방에 들어간다는군요.
사실 한약재의 상당수가 식물의 씨앗입니다. 살구 씨앗인 ‘행인(杏仁)’은 호흡기 질환에, 복숭아 씨앗인 ‘도인(桃仁)’도 어혈을 푸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홍화씨는 뼈를 다쳤을 때 좋다고 하네요. 여러분의 삶이 식물의 씨앗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돼 있는지 실감이 나시죠.
지난 여름 동안 저는 꽃을 10여 송이나 피웠고 벌써 열매를 얻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더위가 남아 있어 9월 초까지는 한 두 송이 더 피울 것 같네요. 혹시 함안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제가 있는 함안박물관에 꼭 한번 들르세요.
얼마 전에는 식물학자 한 분이 오셔서 제 잎 하나를 떼어가셨답니다. DNA검사를 해서 오늘날 한반도에 자생하고 있는 연꽃과 어떤 관계에 있나 규명하려고 한다는군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도 들려드리고 싶군요.
안녕히 계세요.
아라홍련 올림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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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슈퍼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다이어트하다
물과 공기로 열 내리는 그린 빌딩이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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