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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들보다 정신적 성장이 늦어 남들이 모두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새로운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새벽 1시가 조금 지났을 때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병원에서 아인슈타인은 숨을 거두었다.
 

서재에서 연구중인 아인슈타인


묘와 기념비 만들지 말라
 

묘비와 기념비를 만들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식구들에 의해 재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졌다. 그러나 평생 동안 소박한 생활과 소탈한 성품을 잃지 않던 그의 모습은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다듬지 않은 백발, 아무리 중요한 손님을 맞을 때도 변함 없었던 스웨터와 올 닳은 바지차림 그리고 즐겨하던 바이올린 연주….
 

아인슈타인이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 하면 의례히 떠오르는 것이 상대성이론과 또 유명한 E=m${c}^{2}$이라는 공식에 의해 산출되는 어마어마한 핵에너지일 것이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양자이론을 비롯해서 현대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둔재와 천재
 

이렇게 놀라운 업적들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 자신은 "나는 남들보다 정신적인 성장이 늦어서 남들이 모두 아무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결국 새로운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지나친 겸손이라고 보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사실을 놀랄 만큼 정확히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하면 한살 때 이미 곱셈, 나눗셈을 한다든가 세살 때 이미 고등수학을 이해하고 외국어도 척척 해낸다든가 하는 이른바 신동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울 만한 아인슈타인은 세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못하여 부모는 지진아가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으며 어린이다운 재롱도 부리지 않아 그의 유모는 '심심한 도련님'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별로 우수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수학과 물리학을 뺀 대부분의 과목에 대해 거의 흥미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그는 10세 때인 1889년 독일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는데 규율과 형식에 얽매인 교육을 몹시도 싫어해 마침내 교묘한 구실을 만들어 학교를 중퇴하고 부모가 사는 이탈리아로 도망쳐 와 버렸다. 이곳에서 아인슈타인은 남들이 모두 대학입시 준비에 바쁘게 공부할 때 혼자 사색에 잠겨 들길을 어슬렁거리는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대학입시에도 낙방하고 결국 일년간 스위스에 있는 고등학교를 더 다닌 후에야 겨우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도 신통치 못해
 

쮜리히 공과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남다른 점이 없었다.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남들보다 강의에 흥미가 적었고 결석 회수가 잦았다는 점일 것이다. 시험이라면 질색이어서 마지막 한번 뿐인 시험인 졸업시험이었는데도 치루고 나서 일년 동안은 전공분야 서적이라면 한번 펴보기도 싫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결과는 뻔했다. 대학에 조교로 남아 공부와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고등학교에서조차도 교사 자리를 주려는 데가 없었다. 결국 가정교사, 사설학원의 임시교사, 그리고 실업자 등등으로 전전하다가 겨우 채용된 것이 특허품 감식업무를 담당하는 특허국의 3급 기사였다. 아마도 인생행로가 이 정도에 이르면 누가 보아도 학자로서의 가망은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하물며 힘든 수련을 요구하는 이론물리학을 한다고 말하면 웃음거리 밖에 안될 처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1905년의 기적
 

그런데 이때부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5년, 그의 나이 26세 때, 이 특허국의 3급 기사는 놀라운 논문 3편을 독일의 '물리학 연보' 라는 권위있는 학술지에 발표한 것이다. 이 3편의 논문들이야말로 오늘날 각각 양자물리학, 통계물리학, 상대성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서 어느 한 편만으로도 노벨상을 받고도 남을 만한 가치를 지닌 논문들이었다.
 

인생과 학문의 낙오자로 보였던 아인슈타인이 이런 놀라운 업적을 이룬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해답은 겉으로 보이지 않던 비범한 그의 내면에 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마음껏 자신의 것으로 살겠다는 고집스런 천부의 성격이 있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가 10세를 조금 넘었을 때 자기집에 자주 드나들던 러시아계 유태인 학생 '막스탈메이'로부터 과학에 관하여 해설한 책들을 얻어 읽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대중과학서적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열성적인 자유사상가가 되었고 국가는 고의로 젊은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충격적인 감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이 경험으로부터 자라게 되었고 어떤 특정한 사회적 환경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떠한 신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훗날 내가 인과(因果)의 관련성에 대하여 좀더 깊은 통찰을 하게 됨으로써 초기에 가졌던 이러한 태도의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지기는 했지만 이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외견상으로 나타난 여러가지 실패는 모두 이러한 내면적 투쟁의 부산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런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서도 내적인 자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투쟁에서만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이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 가며 오직 자신의 성장을 위해 유익한 것만을 철저히 선별하여 흡수해야 했으므로 극도로 예민한 비판력을 기르게 됐으며, 또 보호된 자신의 내부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독자적인 삶을 이뤄나가야 했으므로 지극히 풍부한 창의력을 키워야 했다. 이렇게 기른 두 가지 능력 즉 날카로운 비판력과 비상한 창의력이 결합되어 물리적 문제게 초점을 맞추었을 때 이른바 '1905년의 기적'이라고 하는 놀라운 업적들이 탄생된 것이다.

 

과학자이기에 앞서 위대한 인간
 

아인슈타인이 엄격한 비판자로서 모든 전통과 권위에 저항하고 비판한 것은 단순한 이유없는 반항이거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취해진 필연적인 일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통해 뉴튼역학과 칸트철학으로 단단히 다져지고 모든 사람이 그저 자명하다고 믿었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과감히 부수었으나 그가 이렇게 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이러한 관념들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을 깨뜨려 버리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자연을 좀더 단순하고 조화있는 이론체계 내에서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적 업적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인정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을 그가 위대한 과학자이기 이전에 위대한 인간이었고 그의 과학적 업적도 바로 이 위대한 인간성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업적을 통해 과학계에 공헌한 것 외에도 다른 과학자들을 격려하고 후원함으로써 때마침 혁명적인 변혁기를 맞은 현대과학에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현대 양자이론에 대하여 마지막까지 불신의 태도를 취해왔지만 양자이론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보어' '드브로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등 당시의 젊은 주역들은 직접 간접으로 아인슈타인의 영향과 후원을 받았던 것이다.

 

절대진리의 파괴
 

긴 안목으로 볼 때 아인슈타인의 영향은 비단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인류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된다. 인류역사를 통해 인간의 정신문화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친 과학자 네 사람을 꼽아 본다면 아마도 코페르니쿠스, 뉴튼, 다윈,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의미에서 제각기 종래의 지배적인 사상을 뒤엎은 사람들이지만 특히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이른바 '절대진리' 라는 도그마를 깨뜨렸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 이제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층 향상된 새로운 진리를 찾을 길은 항상 열려져 있다. 우리가 이 새로운 진리를 향해 의미있는 진전을 할 수 있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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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장회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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