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어느 여름날, 필자는 몇 개의 트랜지스터, 저항, 납땜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만든, 이해할 수 없는 설계도를 따라 라디오를 조립하던 그때가 전자회로를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전자회로에 대한 관심은 대학을 지나 대학원으로 이어졌다.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실은 전자회로로 된 설계도를 그리고 실제 칩으로 만드는 연구를 하는 곳이다. 집적회로 설계란 실리콘웨이퍼에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는 칩 디자이너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똑같은 캔버스에서 정물화, 풍경화,추상화가 나오듯이 똑같은 실리콘웨이퍼가 메모리 칩이 될 수도 있고, CPU가 될 수도 있고, 스마트폰의 핵심부품이 될 수도 있다.
칩 디자이너에게 가로 세로 5mm 남짓한 반도체 칩은 전 세계 연구원들과 경쟁하는 일종의 전쟁터이자, 동시에 꿈과 기술을 실현할 기회의 터전이다.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실은 그 꿈을 펼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남다른 상상력, 훌륭한 조언자를 채워준 곳이었다.
필자가 처음 연구원이 됐을 당시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실은 이미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세계 모든 PC와 TV에 들어가는 DVI/HDMI 표준이 정덕균 교수를 비롯한 선배들의 손에서 탄생된 것이다. 필자가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실에서 수행한 연구는 DVI/HDMI와 같은 고속 통신을 위한 칩을 설계하고 전송속도를 더욱 높이는 것이었다.
PC 내부나 TV 뒷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많은 선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은 양의 데이터를 한꺼번에 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닥의 선이 필요하다. 이중 일부는 여전히 아날로그 신호고 일부는 디지털 신호다.
필자의 연구는 바로 이 선을 하나의 고속 디지털 선으로 바꾸는 일이다. 단순히 선을 하나로 만드는 물리적인 작업이 아니라, 여러 선을 통해 전달되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하나의 선을 통해 전달되도록 고속통신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다. 나의 머릿 속 아이디어가 실리콘웨이퍼 위에 옮겨지고, 다시 컴퓨터나 가전제품에 장착돼 선명한 화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소는 국내외 다양한 기업들과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필자는 박사 과정중에 미국 실리콘밸리의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반도체 산업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한 경험은 큰 도움이 됐다.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세계적인 연구원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그 꿈을 실현했다. 연구실을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에 자리를 잡고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집적시스템 설계연구소 선후배라면 세계 어디에서 일하든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상상력을 키워나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