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성폭력이 사회문제로 심각히 부상하고 있다. 10대의 성폭력은 순간의 실수로 본인에게나 희생자에게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게 된다.
최근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빠지지 않고 눈에 띄는 것은 성폭력(강간)에 관한 기사다. 어떻게 보면 성폭력에 관한 기사는 너무 흔하여 늘 있을 수 있는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신경이 둔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아니 이럴 수가?"하는 경악의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자주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것은 강간의 대상이 어린 아동일 때와 강간을 자행한 사람이 10대의 중·고등학생일 경우이다.
성(性)적으로 아직 미숙하고 성에 관해 전혀 무지한 아동이 희생자, 그것도 성폭력의 희생자라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경악과 분노의 감정을 자아낸다. 더구나 그 가해자가 지식의 개발과 인격성장에 전념해야 할 중·고등학생인 경우 충격은 더욱 가중된다. 그들이 강간이라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은 언뜻 수긍하기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10대의 청소년이 성적 충동이 없고 성적 행동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10대야말로 성적 호기심과 성적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기로 어떤 형태로이건 해소가 되어야 함은 누구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흔한 해소방법은 자위행위일 것이다. 일부는 일찍부터 돈받고 성행위를 제공하는 여자를 찾거나 또래를 유혹하거나 자기보다 연상의 여자의 꼬임에 빠져(?) 성적 만족을 얻기도 한다.
부모나 일반인들은 최근 청소년들의 이러한 직접적 성욕구의 충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경우 성행위를 같이 한다는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정당성이 있다.
그에 반해 강간은 상대방의 동의없이 강제로 성행위를 행할 때 성립된다. 강제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힘과 흉기 또는 약물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킹콩보다 못난 사람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왜 강간을 자행하는가 원인을 살펴보자. 그러자면 우선 강간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강간은 외형적으로는 성행위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성행위라기보다는 폭력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성이 폭력의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폭력이란 말이 오히려 더 정확한 명칭일지 모른다.
강간은 힘의 과시나 분노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성욕에 못이겨 하는 강간은 있을 수 없고 여성에 대한 파괴적 심리, 분노 증오심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성교(性交)는 항상 평화적이고 쾌락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킹콩영화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사납고 파괴적인 고릴라지만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아주 얌전해진다. 그래야만 여자와의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강간이 힘의 과시나 폭력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는 강간이 가장 흔히 일어나는 시기가 전쟁시라는 사실을 놓고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즉 정복자들이 어느 지역을 점령하여 자행하는 강간에는 정복자로서의 보복심리, 승리의 표시, 힘의 과시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폭력행위를 행하는 청소년은 어떤 청소년인가?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누어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
첫째로 실험형을 꼽을 수 있다.
청소년의 상당수는 그들의 공상속에서 성폭력을 상상해보는 일이 가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공상 단계에서 그친다. 행동에 옮기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다. 왜냐하면 성폭력이나 성추행이 왕성한 성적 욕구나 호기심 때문에 상상은 되나 그것이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또한 자기 가치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이를 행동에까지 옮기지 않는 자기통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통제력이 부족한 청소년의 경우이다. 어려서부터 참을성이 없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던 아동이 청소년이 되면 여전히 통제력이 결여돼 행동이 제 멋대로다. 왕성한 성욕구를 자제치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비디오 음란잡지 등을 봐서 성적 자극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대개의 음란비디오는 남녀간 사랑의 정상적 표현으로 성을 묘사하기 보다는 변태적이고 병적인 성행위를 보여준다.
이러한 범람하는 음란물의 자극과 자신의 공상을 통한 충동을 못이겨 실험 삼아 한두번쯤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해보는 청소년이 있다. 때로는 혼자서는 감행하기 힘들어서 동료들과 같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수도 있다.
이 경우는 근본적으로 실험 삼아 또는 호기심으로 한 짓이므로 성폭력 행동 후 후회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지속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기본적인 도덕성이나 양심에 결함이 없으므로 남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준데 대하여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둘째로 범죄형(반사회적 성격) 성폭력자도 있다.
일시적 실험형과는 달리 범죄형의 성폭력배는 도덕성이나 양심에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강간에 대해 전혀 후회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이다. 자신의 성적 충동의 만족을 위해 필요하면 폭력과 무기 등의 방법을 사용,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또 기회와 여건이 되면 이를 되풀이 한다. 다시 말해 후회나 죄책감이 없다.
범죄형 강간자들에 있어서 성폭력은 그들의 행동의 주종을 이루는 일반적 폭력, 즉 공격행위의 일부이다. 따라서 구타 파괴 도벽 등 기타 범죄행위도 다반사로 한다. 범죄형은 성인강간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청소년기에 이미 이런 성폭력 행위가 시작되는 수가 많다. 이들은 성격이 반사회적으로 굳어진 상태로 성인이 되어 여러 범죄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법망에 걸려 감옥살이를 하기 십상이고 치료가 힘들다.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셋째로 갈등형도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청소년은 내적 심리적 갈등과 연관되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되풀이 한다.
갈등은 특히 여성이나 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양가적이어서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한편으론 여자에 대해 관심도 많고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여성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애정과 증오의 감정이 엇갈리는 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에 관심과 호기심은 물론이고 성적인 쾌락을 즐기고는 싶으나 성에 대한 편견이나 죄악감도 크다. 성에 대해 심한 갈등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증오심 또는 두려움은 여성을 아름다운 존재로, 사랑과 낭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증오나 복수, 파괴적 폭력의 대상으로 간주, 그들에 대해 폭력행사를 가하는 방법으로 성을 발산한다. 성폭력을 통해 여성성을 짓밟고 내재하고 있는 분노를 표출, 힘을 과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자신감이 없고 불확실과 의문점이 많으며 나약한 자신의 남성성이 들어날까봐 항상 불안하다. 따라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적 방법을 휘두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그 대상을 자기보다 어린 상대 특히 청소년의 경우 자주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여성이나 성에 대한 갈등과 부정적인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 원인은 역시 아동기의 경험에 의한다고 할 수 있다. 출생후 아동기를 거치는 동안에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과 그 관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결정된다. 또한 자기의 남성성과 남자로서의 자신감 등도 동시에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에 관한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했고 어머니가 남성·여성에 대해, 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모성과 여성성, 포용과 매력, 사랑과 쾌락의 차이와 관계를 배운다.
만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존경의 감정보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였고 부모의 불화 속에 살았다면 여성에 대한 감정이나 성에 대한 가치관이 좋을 리 없다. 오히려 갈등이 쌓이게 된다. 더구나 요즈음은 남자라고 해서 무조건 큰 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남녀평등이다, 여권신장이다 하여 남자들이 그들의 남성성을 내세우는데 위협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역할이나 가정 내에서의 권위도 날로 비중이 커지고 있다.
폭력의 관계로
어머니의 극성과 통제하에 자라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이 여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남성으로서의 자신감 형성에 큰 지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열등의식 분노 증오심 그리고 남성으로서의 자신감 부족, 거기에다 범람하는 음란물, 성의 자유화에 의한 성적 자극의 극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아름다워야 하고 즐거워야 할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성이 폭력화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가장 치욕스런 행위이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인간성을 짓밟고, 견딜 수 없는 치욕의 감정을 유발하는 파괴적 행위이다. 또 남녀관계를 폭력의 관계로만 퇴행시켜 버린다.
누구보다 피해자는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된다. 우선 자신의 여성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치욕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장차 아내로서 성인으로서 성에 대한 공포나 부정적 태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아울러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그외에도 항상 불안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충동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선 청소년기 자체가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차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청소년기야말로 가장 강렬하게 성욕을 느끼는 시기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공부나 하고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 대학입시라는 지상과제 때문에 인간적 성숙이나 남녀관계의 경험은 뒷전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도 할 수 없고 원하는대로 성적인 남녀관계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거나 승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여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은 과제이다. 하지만 예술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수업의 부담이 줄어들고 남녀학생 간의 건전한 미팅이나 교제장소가 마련되고 다양한 운동과 신체적 활동이 폭넓게 제시되면 청소년들은 그들의 성적 욕구를 다른 건전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무절제한 향락산업과 음란퇴폐업소 등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의 통제가 바람직하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성적 자극을 피할 수 있게 청소년들을 도와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치료해야
그러나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을 전적으로 외적인, 즉 사회적인 병폐로 전가해서는 안된다. 사회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간에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부모의 잘못으로만 돌리지도 말아야 한다. 청소년들의 주위에는 부모이외의 어른들도 있고 귀감이 될만한 역사적 인물도 많다. 또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면 성유혹 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어렸을 때 입은 상처를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자아치료능력도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자신의 행동을 통제함은 인간에게 주어진 제1의 임무이고 사회성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남녀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간을 이룬다. 남녀의 사랑의 표현으로 성교를 하고 성교를 통해 그 사랑을 돈독히 한다. 따라서 성교는 남녀관계를 아름다고 진지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해주는 매우 훌륭한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산적인 인간의 행위를, 인격파괴를 가져오는 폭력의 수단으로 쓰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