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의 운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은 늘 불안하다. 그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 중 하나가 불안이다. 불안은 우울증만큼이나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의 단골 연구 대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학문은 불안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발전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불안이란 한 마디로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위협감을 느낄 때 이는 감정’이다. 불안이 깊어지면 심장이 빨리 뛰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소화가 되지 않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불안에 대해서는 이제껏 수많은 학자와 작가가 나름의 정의를 내려왔다. 그중에서 가장 공감을 얻는 것이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가 내린 정의다. 그녀는 불안을 가리켜 ‘무서운 세상과 무서운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무력한 자신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현대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정의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이 병원에 찾아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호소한다.
“매스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내 주위에는 온통 무서운 사람들뿐인 것 같아요.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가족조차도 무서워요. 오로지 나만이 정상인 것 같아요. 나 혼자서 무서운 사람들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렵고 불안해요.”
단순한 분노가 적개심으로 번져
불안감이 한 번 더 꼬여서 나타나는 증상이 편집증이다. 편집증은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단순한 불안 증상보다 심해진 상태를 말한다. 편집증 환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속이거나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악의적일 뿐 아니라 모자라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야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편집증 환자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조종하고 학대하고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집착에 가까운 불신을 갖게 되고 오직 상대의 숨겨진 의도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편집증인 사람들이 집단이나 조직에서 조금이라도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여기면 쉽게 분노하고 소송도 불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편집증 환자는 자신을 바꾸기 위해 상담을 요청한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터뜨리는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상담을 받는다. 한 예로 필자의 환자 중에 언제나 세상에 대한 분노와 한국에 대한 분노, 사람에 대한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분노의 대상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큰 소리로 전화하는 사람이나 출입문을 드나들면서 아무렇지 않게 주변 사람을 밀치는 사람,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무조건 째려보는 사람처럼 누구든 일상에서 맞닥뜨리면 기분이 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적개심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는 주변인에 대한 분노가 대단해서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필자는 그에게 “사회적인 문제는 공감하지만 그렇게 24시간 내내 분노만 하면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겠느냐”고 물었다. 또 “그렇게 불신만 하지 말고 가족과 주변인을 제대로 보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오로지 세상과 주변인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토로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왜 당신은 내 분노를 듣고만 있죠? 왜 그것이 쓸데없다고 설명해주지 않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편집증을 치료하려면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아주 미미할지라도 둘 사이에 믿음의 통로가 마련돼야만 치료에 진전이 있다. 필자도 그 통로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오직 분노와 적개심, 불안과 피해의식에만 몰입한 그는 그런 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의사인 필자에게도 적개심과 불신을 드러냈다.
편집증 환자는 언제나 자신이 분노할 구실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불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증거는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증상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생각에만 집착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세상의 전부로 삼는다.
편집증은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환자라면 그가 집착하고 있는 생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기 전에 그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그가 자신을 보는 시각과 타인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알려준다. 이와 함께 편집증적 시각을 가지면 불안이 치료되기는커녕 더 불안해진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지금까지와 다른 전략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자신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치료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