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밥상에 오른 물고기’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봄을 기다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위에는 녹음이 가득하다. 무더운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땀을 많이 흘리고 기력이 약해지는 여름에는 보양식을 찾기 마련이다. 보양식이라면 전복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여름은 전복이 제철이다. 여름 전복은 콜라겐 함량이 줄어 육질이 연하고 지방과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 맛이 뛰어나다.
동양에서는 전복이 ‘패류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오래전부터 전복이 인기 있는 먹을거리였다는 사실은 조개무지에서 전복 껍데기가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전복’,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가 전복’, ‘중국의 황제 왕망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근심으로 식욕을 잃어 오로지 전복만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이야기도 모두 전복의 맛과 영양을 칭송한 것이다.
전복으로 만든 음식 중 가장 으뜸은 역시 전복죽이다. 몸이 쇠약해진 환자에게 전복죽만 한 것이 없다. 또 전복회는 특이한 식감으로 인기가 높으며, 이것을 살짝 데쳐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전복을 말려서 먹는 일이 많았는데, 햇볕에 잘 말린 전복포는 임금님께 진상되기도 했다. 이 밖에 전복은 전복구이, 전복탕, 전복찜, 전복삼계탕 등 다양한 음식으로 식도락가들의 침샘을 자극한다.
전복은 복족강 원시복족목 전복과에 속하는 연체동물의 총칭이다. 복족류(腹足類)는 고둥이나 달팽이처럼 나선형으로 꼬인 껍데기를 등에 이고, 배처럼 생긴 넓고 납작한 근육질의 발로 기어 다니는 연체동물을 뜻한다. 전복은 납작하게 생긴 것이 고둥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어찌된 일일까. 전복을 뒤집으면 넙적한 빨판 모양의 발이 보인다. 전복은 근육질의 발을 사용해 사물에 달라붙거나 기어다닌다. 몸 앞쪽에 머리와 더듬이도 보인다. 더듬이를 꿈틀거리며 기는 모습을 보면 역시 조개보다는 고둥을 닮았다.
전복 껍데기도 고둥 껍데기와 비슷하다. 보기엔 납작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고둥 껍데기처럼 나선형을 이룬다. 한쪽 귀퉁이에 있는 나선형 꼭대기(각정)가 위로 쭉 솟아 있다면 고둥 껍데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결국 전복은 ‘껍데기가 납작한 고둥’이다. 좁은 바위틈에 틀어박히거나 파도가 심한 바위나 돌에 달라붙다 보니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전복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타원형의 껍데기 위에 한 줄로 뚫려 있는 구멍(호흡공)이다. ‘구공라(九孔螺)’라는 별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호흡공에는 열린 것과 막힌 것이 있다. 막힌 구멍이 오래된 것이고, 열린 구멍은 새로 뚫린 것이다. 전복의 몸 아래쪽에서 들어온 물은 아가미를 통과해 이 호흡공으로 빠져나간다. 전복의 호흡공에는 문어가 전복을 사냥하는 방법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문어는 바위 표면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전복을 잡아먹기 위해 빨판으로 호흡공을 막아버린다. 전복이 숨이 막혀 바위에서 떨어지면 알맹이를 빼 먹는다.
※ 편집자 주: 물고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아가미를 갖고 물에서 사는 척추동물(어류)이지만, 연재 ‘밥상에 오른 물고기’에서는 전복(연체동물), 꽃게(갑각류)처럼 밥상에서 만날 수 있는, 물에 사는 동물도 다룬다.
◀ 전복 주산지인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어민들이 전복 양식장에 뿌릴 어린 전복을 선별하고 있다.한국에 살고 있는 전복은 둥근전복, 왕전복, 말전복, 오분자기, 마대오분자기 5종이 있다. 전복 종류를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참전복, 까막전복이라고도 불리는 둥근전복은 생김새가 긴 타원형으로 사람의 귀 모양과 비슷하고, 각정이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쳐 있다. 왕전복과 말전복은 다른 전복에 비해 껍데기 모양이 둥글고 크기가 크다. 왕전복은 구멍이 뚫린 부위가 화산처럼 높게 솟아 있지만 말전복은 구멍이 뚫린 부위가 낮다. 오분자기와 마대오분자기는 크기가 8cm 이하로 다른 종류에 비해 작다. 또 껍데기 위쪽에 뚫려 있는 구멍은 7~9개로 3~5개에 불과한 다른 전복에 비해 많은 편이다. 마대오분자기는 오분자기에 비해 껍데기에 굵은 고랑이 패어 거칠어 보이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전복은 몸에 좋은 약재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전복을 고아 먹으면 좋다는 말이 전해지며 폐결핵이나 염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도 전복을 먹이면 낫는다고 한다. 또 전복을 ‘석결명(石決明)’이라고도 부른다. 오래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뜻이다. 전복은 귀에도 좋다고 전해진다. 장기복용하면 청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전복이 귀에 좋다는 말은 전복이 사람의 귀처럼 생긴 데서 나온 것 같다. 한방에서는 모양이 비슷한 약재가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복의 효능은 과학적으로도 밝혀져 있다. 전복을 쪄서 말리면 마른 오징어처럼 표면에 하얀 가루가 생기는데, 이것은 타우린이다. 타우린은 피로회복제 성분으로 유명하며 담석을 녹여내고 콜레스테롤의 함량을 떨어뜨린다. 또 신장과 심장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시력회복과 혈압강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전복의 내장은 훌륭한 먹을거리다. 독특한 풍미가 있어 내장만 따로 찾는 이도 있다. 날로 먹거나 익혀서 먹으며, 전복죽을 끓일 때 함께 넣거나 젓을 담가도 별미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봄 전복의 내장에는 독이 있으니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봄에 풀이 날 때쯤 전복 내장을 먹으면 ‘풀독 오른다’며 경계하는 이들도 있다. ‘풀독’은 살이 불에 덴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을 말한다. 실제로 봄 전복의 내장을 먹고 얼굴과 팔다리에 격심한 통증과 함께 수포와 염증이 생긴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일본의 토호쿠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고양이에게 이른 봄의 전복 내장을 먹이면 귀가 떨어진다’라는 말이 전해 온다. 도대체 봄 전복의 내장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전복의 내장에는 ‘피로페오포르바이드 a’라고 하는 독성 물질이 있다. 이 물질은 전복의 먹이인 해조류에서 유래하며 광(光)과민성을 일으킨다. 따라서 중독 증상은 직사광선을 받은 부위에만 나타나며, 봄 전복의 내장을 먹고도 실외에서 직사광선을 쬐지 않는다면 멀쩡하다. 이제 토호쿠에서 봄 전복 내장을 먹은 고양이가 귀를 잃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몸의 다른 부위는 털이 많아 상관없지만 피부가 노출된 귀는 햇빛을 받아 증상이 나타나고, 고통을 못 이긴 고양이가 피부를 긁다 보면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상처를 입는 것이다. 하지만 한여름에는 전복 내장에 독성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보양식이니 마음 놓고 배부르게 먹으면 좋다.
이태원_(서울세화고 생물 교사)
이태원 교사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세포생물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우리나라 전통 문헌에 나타난 과학 관련 내용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의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기행문식으로 정리한 ‘현산어보를 찾아서1~5(청어람미디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