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과학기술원(GIST) 신소재공학동에 있는 기능성 고분자 합성연구실의 실험실은 여느 화학과 실험실처럼 아세톤 냄새가 났다. 비커 안에서 회전하며 열심히 용액을 섞고 있는 자석 막대를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 새로운 고분자가 탄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철제 스탠드에는 투명한 실험 용기들이 걸려 있었다. 플라스틱 용기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바닥에서 ‘빠지직’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투명한 용기는 다름 아닌 유리였다.
“고분자를 합성할 때 물이나 산소가 들어가면 합성과정에서 반응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유리용기를 펌프에 연결해서 진공상태로 만들어요. 진공상태의 유리용기는 극한의 실험환경을 만들어서 물질의 분자량과 반응시간을 정교하게 제어하는 데 편리합니다.”
연구실을 이끌고 있는 신소재공학과 이재석 교수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공처럼 생긴 동그란 용기 주변에 여러 개의 길쭉한 유리관이 달린 이 독특한 실험기구를 직접 디자인했다. 유리관에 반응시키고자 하는 물질(단량체)이 들어가면 동그란 용기부에서는 이 물질들이 섞여 반응이 일어난다.
실험실 옆에는 유리관을 불로 달궈 용기에 이어 붙이고 휘어가며, 다양한 모양의 실험 용기를 만드는 유리세공실이 마련돼 있다. 이 교수는 “진공상태의 유리용기를 사용하는 고분자 합성법은 워낙 세밀하고 숙련된 손놀림이 필요한 기술이라 원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도구도 용도에 맞게 직접 제작해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가볍고 전기 잘 통하는 고분자가 미래 청정에너지의 핵심
기능성 고분자 합성연구실에서는 고분자를 합성할 뿐 아니라 합성법 자체를 연구한다. 이 교수는 “당장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눈에 보이는 제품을 만들기보다는 새로운 재료와 그 합성법을 개발하는 데 치중하는 편이라 기초 화학 연구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마침 박사과정에 있는 강범구 연구원이 반응물질을 섞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유리용기에 연결된 유리관마다 음이온에 따라 독특한 색을 띠는 고분자 용액들이 들어 있었다. 강 연구원은 드라이아이스로 -78°C를 유지하는 아세톤에 먼저 유리용기를 넣어 온도를 낮췄다. 온도가 내려가면 용기 내부의 기압이 낮아져 자연스럽게 유리관에 있는 물질이 용기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 잠시 뒤 용기의 온도가 충분히 내려갔다고 판단한 강 연구원은 동그란 용기와 유리관을 막고 있는 얇은 유리막을 톡톡 쳐서 깨뜨렸다. 그러자 유리관에 있던 물질이 동그란 용기 안으로 들어가 미리 들어가 있던 또 다른 물질과 섞였다.
“이렇게 섞어서 건조한 물질이 이 고분자(중합체)입니다.” 이 교수가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 있는 까무잡잡한 고체덩어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이 플라스틱이라기보다는 마치 세공하기 전의 보석 원석(原石)처럼 보였다. 하긴 이렇게 공을 들이는데, 이 교수와 연구원들에겐 보석이나 진배없지 않을까.
“중합체는 작은 단량체가 수백~수천 개씩 사슬처럼 서로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이 중합체는 고분자가 두 가지 이상 결합돼 있어요. 한 가지 분자로 이뤄진 고분자 블록을 여러 개 결합해 ‘블록공중합체’를 합성합니다.”
두 가지 중합체를 따로 만들어 섞어줘도 될 텐데 굳이 번거롭게 블록공중합체를 만드는 이유는 뭘까. 이 교수는 “블록공중합체는 성질이 서로 다른 고분자들이 공유결합과 같은 방법으로 꼭 붙어 있는 매우 안정한 상태”라며 “블록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독특한 나노구조를 만들 수 있고 이온이나 전기를 통하게 할 수도 있어 응용 분야가 넓다”고 설명했다. 고분자가 전기를 통하게 되면 금속이나 무기질로 제조한 소자보다 가벼운 전극, 전지, 발광체로 이용할 수 있다. 또 실리콘 같은 무기물보다 제작비가 적어 차세대 태양전지로 응용할 수 있고,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수소연료전지의 재료로도 각광받고 있다.
최근 연구실에서는 블록공중합체로 만든 고분자를 박막형태로 개발했다. 이 고분자막은 연료전지 재료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나피온’보다 성능이 뛰어나면서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나피온은 80°C 이상의 고온에서 안정성이 떨어지고 연료를 투과시키는 현상이 나타나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반면, 이 고분자막은 고온에서 작동하면서도 연료 투과현상이 현저히 감소했다. 이 교수는 “외국기술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 연구의 최종 목표”라며 “독자적인 방법과 철학으로 관련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