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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아라온호의 남극 쇄빙시험일지

“전방 1km 지점을 목표지점으로! 추진기 출력 100%로 올리고, 자 쇄빙!”
1월 27일 남위 74° 45′, 서경 136° 48′ 서남극 케이프벅스 인근 해상.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6층 조타실은 쇄빙시험 준비로 분주했다. 김현율 선장이 지시를 내리자 조타수가 목표지점을 지정하고 추진기의 출력 레버를 올렸다. 배 앞뒤로 장착된 추진기의 방향이 자동으로 바뀌며 눈앞에 보이는 얼음을 향해 돌진한다. 배가 얼음에 닿는 순간‘쿵’ 하고 약한 충격이 전해지더니 이내 ‘와지지직’ 소리가 나면서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너무 느리다. 속도계는 목표했던 3노트(시속 5.6km, 1노트는 시속 1.85km)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1노트를 가리켰다. 100m 정도를 더디게 전진하던 아라온호는 결국 경로를 빗겨나 멈춰 섰다.

1월 27일 1차 시도, 예상 밖의 실패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얼음 두께가 조건에 잘 맞았거든요.”
쇄빙능력 시험을 총괄한 극지연구소 극지운영실 남상헌 실장은 당시의 느낌을 “건조 과정을 이끌어온 4년여의 시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아라온호가 쇄빙선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강도가 630kPa(킬로파스칼, 1kPa=103 Pa )이고 두께가 1m인 평평한 얼음을 3노트의 속도로 최소 333m(배 길이의 3배) 이상 깨야 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얼음이 떠다니는 남극에서, 게다가 1년 중 가장 따뜻한 시기에 넓이가 1km2 이상이고 두께가 균질한 얼음을 찾는 일은 산속에서 축구장을 찾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이날 도전한 두께 0.91m의 얼음도 헬기로 근방의 수십km를 수색하고, 쇄빙 전문가들이 직접 빙판에 내려가서 100m 간격으로 얼음의 두께를 측정하며 어렵게 찾은 것이어서 허탈감이 컸다.

정식 시험은 아니었지만 지난 1월 25일과 26일에도 아라온호는 쇄빙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역시 얼음이 문제였다. 25일엔 얼음이 너무 약했는지 배가 닿자마자 균열이 생기면서 갈라져 버렸고 26일엔 두께가 2m로 너무 두꺼워서 쇄빙 시험을 진행하지 못했다.

실패 원인 찾고 물 800t이나 빼내
해가 지지 않는 남극의 밤이 지나고 이튿날인 28일 아침이 되자 3층 회의실에 극지연구소의 김동엽 수석연구원과 남상헌 실장, 김현율 선장, 아라온호를 건조한 한진중공업 관계자들과 러시아 쇄빙 전문가들이 모였다. 실패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현장에서 얼음을 채취해 분석할 땐 두께만 확인할 뿐, 강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시험 조건인 630kPa보다 단단한 얼음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다른 쪽에서는 얼음 위에 30cm 정도 쌓여 있던 눈이 얼음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남 실장은 시험 결과를 출항 전 대전에 있는 빙(氷)수조에서 했던 모형 쇄빙실험 결과와 비교해볼 것을 제안했다. 자료를 뒤져보니 시험 당시의 흘수(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물속에 잠긴 깊이)가 빙수조 실험 때보다 40cm 더 큰 7.2m인 것으로 밝혀졌다. 배가 설계된 조건보다 물속에 더 깊이 잠겨 있었다는 얘기다. 배를 건조한 한진중공업의 설계팀은 “물의 저항이 얼음의 저항보다는 훨씬 작지만, 배가 6950t 규모다 보니 전체적으로는 물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 실장은 시험 결과를 출항 전 대전에 있는 빙(氷)수조에서 했던 모형 쇄빙실험 결과와 비교해볼 것을 제안했다. 자료를 뒤져보니 시험 당시의 흘수(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물속에 잠긴 깊이)가 빙수조 실험 때보다 40cm 더 큰 7.2m인 것으로 밝혀졌다. 배가 설계된 조건보다 물속에 더 깊이 잠겨 있었다는 얘기다. 배를 건조한 한진중공업의 설계팀은 “물의 저항이 얼음의 저항보다는 훨씬 작지만, 배가 6950t 규모다 보니 전체적으로는 물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튼튼해 보이는 얼음에 아라온호를 정박한 뒤 물을 800t이나 빼내고, 배 뒷부분 기름 탱크의 기름을 앞쪽의 탱크로 옮기면서 배의 흘수와 트림을 맞추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아라온호처럼 추운 극지방을 항해하는 배는 선체 바깥에 외벽이 하나 더 있는 이중 구조로 설계한다. 내벽과 외벽 사이의 앞뒤 좌우에는 물탱크가 있고 총 2100t의 물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물을 이동시켜서 좌우 수평을 맞추고, 물을 채우거나 빼내서 무게를 조정할 수 있다.

그동안 몇몇 다른 연구원은 헬기를 타고 새로운 얼음을 찾아 나섰다. 남위 74도° 24′, 서경 137° 57′으로 1차 시도를 했던 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체의 80~90%가 유빙(떠다니는 얼음)으로 뒤덮인 지역을 지나야 했다.

김현율 선장은 “처음에는 배가 얼음에 박힐까 봐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잘 부수고 지나갔다”며 “배가 덜컹거리는 게 마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외국의 여러 쇄빙선을 타본 김동엽 수석연구원도 “아라온호는 덩치는 다른 나라의 쇄빙선에 비해 작지만 유빙을 헤치고 나아가는 성능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오히려 항해의 복병은 펭귄과 해표였다. 김 선장은 “큰 배를 전에 만나본 생물은 알아서 피하는데, 남극의 생물들은 그런 경험이 적어 배가 얼음에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다”며 “기적을 울렸지만 소용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3.5노트로 500m 거뜬히 쇄빙하다
29일 오전 9시 15분, 드디어 2차 쇄빙시험이 시작됐다. 얼음을 채취해 두께를 확인하고, 계측기로 얼음의 강도를 알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실험 데이터를 수집했다. 1km 떨어진 지점에서 얼음에 돌진하는 방식까지도 1차와 동일했다. 이번에 도전하는 얼음은 두께 1m에 눈이 30cm 정도 쌓여 있었다. 얼음 조건은 역시 잘 맞췄지만 1차 시험 때를 생각하면 또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쇄빙 시작. 배 전체에 약한 충격이 전해지는가 싶더니 아라온호가 ‘꿀렁꿀렁’ 파도를 넘듯 얼음을 갈라 나갔다. 얼음 위에 올라타고 얼음을 눌러서 깨고 다시 올라타기를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속도가 빨랐다. 목표했던 3노트보다 0.5노트 더 빠른 3.5노트. 큰 소음이나 충격도 없었다. 아라온호는 거침없이 연속해서 500m를 쇄빙하며 시험에 통과했다.

“됐다. 이거다!” 지켜보던 남 실장은 자연스럽게 팔을 머리 위로 뻗으면서 외쳤다. 김동엽 수석연구원도“정확한 결과는 4월 중순에 나오지만 현재로서는 시험에 성공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얼음의 강도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실제로 얼음의 두께와 강도가 시험 조건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얼음은 없다. 시험이 성공했는지는 러시아 남북극연구소(AARI)가 현장에서 측정한 여러 가지 얼음의 데이터를 시험 조건에 맞게 환산한 뒤에야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두 달여의 시간이 걸린다.

뒤로 깨고, 박치기해서 깨고
연구팀은 뒤이어 바로 후진 시험을 진행했다. 후진은 배 앞뒤로 장착된 추진기의 방향을 360° 자유자재로 틀 수 있는 아라온호의 특기다. 이날 아라온호는 후진으로 두께 0.81m의 얼음을 2노트 속도로 깨고 나갔다. 빙수조에서 출력 70%라는 동일한 조건으로 했던 실험 결과(1.32노트)보다도 성능이 더 좋게 나타났다.
김현율 선장은 “우리 배는 전진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속도를 올려 순간적인 힘을 내는 아지무스 추진기를 갖고 있다”며 “후진 시험은 추진기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조작해야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도전 과제는 ‘리지(ridge)’ 통과였다. 리지는 언덕처럼 솟아 있거나 작은 섬처럼 물속에 깊이 잠겨 있는 얼음이다. 보통은 피해가는 게 정상이지만 얼음에 갇혔거나, 리지와 바로 접해 있는 부분을 연구하려고 할 땐 이것을 부수고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날 도전한 리지는 가장 두꺼운 부분의 두께가 7m이고 그 위에 40cm~1.8m의 눈이 쌓여 있었다. 아라온호는 리지에 뱃머리를 힘차게 6번 박치기해 리지를 통과했다. 아라온호는 이 과정에서 단위면적당 최대 59.2MPa(메가파스칼, 1MPa=106Pa)의 힘을 받았다. 배가 최대한으로 견딜 수 있는 충격인 335MPa에 훨 씬 못 미치는 수치였다. 이로써 아라온호는 얼음을 깰 때 발생하는 충격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됐다.

강행이냐 철수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날 저녁 케이프벅스에 내려줬던 대륙기지조사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극에 제2기지 건설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꾸려진 조사팀이 제1후보지인 서남극의 케이프벅스 조사를 마치고, 제2후보지인 동남극의 테라노바베이로 이동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계획된 쇄빙시험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기지 건설지를 탐사하는 일도 이번 항해의 중요한 목적이기에 연구팀은 아쉽게 뱃머리를 돌려 테라노바베이로 향했다.

그런데 꼬박 일주일을 항해해 도착한 테라노바베이는 얼음상황이 좋지 않았다. 차가운 대륙 기단과 상대적으로 더운 해양 기단이 만나 발생한 대륙풍이 시속 93km의 눈보라로 발전하면서 풍랑에 의해 얼음이 모두 깨져 있었다. 조사팀이 몸에 밧줄을 묶고 급히 대피하기도 했다.
게다가 멀리 얼음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테라노바베이는 사방이 넓게 뚫린 지역이라 텐트 같은 임시 숙소를 설치하기 어려웠다. 조사팀은 2박 3일간 아라온호에서 출퇴근하며 탐사를 진행했다.

쇄빙시험을 준비한 연구팀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직진, 후진, 리지 통과 외에도 준비한 시험이 두 가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동차의 좌회전이나 우회전처럼 전진이나 후진을 하면서 배의 진행 방향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꺾는 회전 시험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배 방향을 180° 돌리는 U턴 시험이었다. U턴은 제자리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선체를 돌리는 방식과 T자 모양으로 길게 후진한 뒤 뱃머리를 돌려 나오는 방식이 있다.

연구팀은 2월 10일 테라노바베이에서 철수해 크라이스트처치항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북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동남극 대륙의 발리니 군도 쪽으로 조금 변경했다. 인공위성 사진이나 해빙 분석 결과 발리니 군도 부근에는 해빙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는 기상이었다. 발리니 군도는 근처 호수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밀려오는 지역으로, 지형적으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라온호가 찾아간 날도 바람이 초속 30m로 불고, 파도가 6~7m 일면서 주변 얼음은 모두 깨져 있었다. 배를 섬 뒤에 피신시켜야 할 정도였다. 기상위성자료를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 수준의 큰 저기압이 군도 쪽으로 이동해오고 있었다.

큰 얼음이 있는 대륙 쪽으로 더 다가가서 시험을 마무리하자는 의견과 현재 기상상황을 봤을 때 대륙 쪽으로 더 들어갔다가는 2~3일 뒤 시험을 마쳐도 빠져나오기가 힘들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남 실장은 “이번처럼 쇄빙시험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기상상황에 따라 일정 전체가 지연될 수 있다”며 배를 돌렸다. 그는 또 “준비했던 시험을 전부 다 한 것은 아니지만 남극 바다를 운항하는 것 자체가 시험의 연속”이라며 “이번 항해에서 쇄빙성능은 충분히 검증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라온호는 발리니 군도에서 미리 빠져나온 덕분에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항에 당초 도착예정일이었던 2월 19일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지난 3월 15일에는 무사히 모항인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쇄빙 과정에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고 준비했던 시험을 모두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이번 항해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크다. 첫 남극 항해임에도 불구하고 선상에서 수집한 현장 자료만으로 얼음의 상태와 결빙 지역을 파악했고 이것으로 남극의 크고 작은 얼음을 거뜬히 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은 이제 우리나라도 독자적으로 극지를 탐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직접 탐사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쇄빙 노하우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올 7월 예정된 북극탐사도 문제없다. 1

* Pa : 1Pa은 1m2 면적에 무게가 100g인 물체를 올려놓았을 때 버틸 수 있는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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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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