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한 1990년대 초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원자력 발전의 미래는 암울해 보였다.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여파로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됐고, 국내에서는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을 둘러싸고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히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1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9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004년 황일순 교수의 ‘청정 원자력 발전에 대한 비전’에 매료돼 학교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고준위 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를 핵비확산적 기술로 분리해내고 이를 액체금속 냉각 핵변환로를 활용해 중저준위화하는 핵변환 기술에 대한 강의는 핵공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안전한 납-비스무스 액체금속 냉각기술과 그에 적합한 구조재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년여 연구를 진행하던 무렵, 미국의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를 방문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미국 내 납-비스무스 액체금속 냉각기술 연구를 선도하던 닝 리(Ning Li) 박사팀과의 연구 경험은 세계 기술 수준을 가늠하고 향후 연구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우리 연구실은 이러한 국제협력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고 있다. 현재 IAEA에 박사과정 연구원이 6개월간 연수에 참여하고 있고, OECD와 원자력위원회(NEA)의 국제공동연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원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연구실 구성원들의 세부적인 연구주제를 살펴보면, 핵비확산적 재처리 기술인 건식공정 연구팀, 납-비스무스 핵변환로 설계팀, 원자력 재료 연구팀으로 나뉘어 있다. 전기화학, 재료공학, 원자로 이론, 열수력, 열역학 등 공학 전반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유기적으로 협력해 핵변환로 설계/개발, 한국형 핵연료 사이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핵재료공학은 안전, 폐기물, 핵확산과 결부된 국제적인 문제들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과학뿐 아니라 법, 정치같은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두는 점은 이 분야만의 매력이다. 힘겨운 연구 과정이 수반됨에도 핵재료 분야에서 많은 연구원들이 땀흘려 몰두하는 이유다.
필자는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벨기에 원자력 연구원(SCK-CEN)의 가속기 구동 미임계 원자로의 하나인 MYRRHA 프로젝트 설계팀에 참여할 예정이다. MYRRHA 원자로 또한 납-비스무스 액체금속 냉각기술을 활용한 고준위 폐기물의 소멸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우리 연구실을 졸업한 연구원들은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로 진출해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 향상과 사용 후 핵연료 문제 해결을 통한 청청 원자력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임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핵재료전공으로 공학석사를 마치고 ‘납-비스무스 원자력 시스템 구조재료 개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올 2월 벨기에 원자력연구원(SCK-CEN)의 MYRRHA 설계팀에 참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