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퀴즈. 2009년 가장 큰 이슈였던 신종플루의 치료약은? 사람들은 대부분 ‘타미플루’라고 답할 것이다.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에서 생산하는 타미플루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종플루 치료약이다. 그런데 혹시 ‘리렌자’라는 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서 개발한 ‘리렌자’ 역시 신종플루 치료에 쓰이지만 왠지 생소하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약의 제형. 타미플루는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알약 형태인 반면, 리렌자는 별도의 흡입기에 넣어 빨아들여야 하는 분말 형태다. 결국 약의 ‘편리성’이 관건인 셈이다.
약효와 편리성,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최근 약의 편리성을 높인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스의 활약은 단연 돋보인다. 간단히 몸에 붙여 천식을 치료하는 ‘호쿠날린 패치’부터 치매를 치료하는 ‘엑셀론 패치’까지. 그동안 파스를 관절염 치료제나 금연 보조제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다. 이런 특별한 파스를 일컫는 ‘스마트 패치’라는 표현도 생겼다.
스마트 패치가 일반 파스와 다른 점은 약물이 침투하는 범위다. 사실 연고나 겔, 스프레이, 에어로졸 같은 제품도 피부를 통해 약물을 흡수시킨다는 원리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결리거나 욱신거리는 자리에 붙이는 단순 찜질용 파스는 파스에 들어 있는 멘톨 성분이 피부 각질층에만 작용한다. 이 경우 특별히 치료 효과는 없지만 피부에 시원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반면 스마트 패치에 들어 있는 약물은 표피를 통과해 진피까지 확산된다.
확산된 약물은 진피 전체에 퍼져 있는 모세혈관에 흡수된다. 일단 혈관에 흡수된 뒤부터는 일반 약물과 똑같이 작용한다. 먹는 약이 소화기관을 거쳐 소장 융털의 모세혈관을 만나 들어가거나, 폐로 흡입한 약이 폐포의 모세혈관으로 흡수되거나, 약물이 주사기를 통해 혈관에 직접 주입되거나 약효를 발휘하는 과정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파스의 가장 큰 장점은 약효를 일정한 수준으로 원하는 시간만큼 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먹는 약이나 주사약은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약효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주기적으로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런데 파스는 몸에 붙여두기만 하면 일정 시간 동안 약물이 서서히 방출되면서 혈중 약물 농도가 유지된다. 먹는 약에 비해 약물의 농도가 낮아도 약효를 비슷하게 낼 수 있는 이유다.
또 먹는 약이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간에서 일부 분해되는 것과 달리, 파스는 약물이 혈관으로 바로 흡수되기 때문에 약효가 더 잘 나타난다. 따라서 파스를 이용하면 약물을 더 적게 사용하고도 약의 효능을 볼 수 있다.
지속 시간 늘리고, 부작용 줄이고
파스의 장점을 잘 살린 대표적인 예가 1998년 일본애보트에서 개발한 천식 치료용 파스 ‘호쿠날린 패치’다. 일반적으로 천식 발작은 새벽 4시에 가장 심하다. 이 때문에 환자가 새벽에 일어나 천식 치료제를 ‘흡입’해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호쿠날린 패치는 기존의 천식 치료제와 동일한 툴로부테롤 약물을 이용하면서도, 파스를 붙이고 난 4시간 뒤부터 약물이 서서히 방출되고 다시 그로부터 4시간 뒤에 약효가 최대가 되도록 설계됐다. 환자가 저녁 8시에 파스를 붙이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4시에 혈중 약물 농도가 최대에 이르는 셈이다. 호쿠날린 패치는 흡입형 치료제를 두려워하는 어린이 환자들에게도 유용하다.
국내 제약회사도 이와 유사한 천식 치료용 파스를 개발하고 있다. 신신제약 중앙연구소 이태완 연구소장은 “피부, 혈액, 맥박 등 체내 환경을 그대로 재현한 뒤 파스의 효능을 실험했을 때, 현재 개발 중인 파스가 호쿠날린 패치와 거의 비슷한 약효를 냈다”면서 “마지막 단계로 인체에서 효능을 보이는지만 입증하면 빠른 시일 내에 제품으로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노바티스제약에서 200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치매 치료용 파스 ‘엑셀론 패치’도 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1997년에 개발된 치매 치료용 알약 ‘엑셀론’에 비해 사용하기 편하고 부작용도 적기 때문이다.
엑셀론 패치에는 엑셀론 알약과 마찬가지로 ‘리바스티그민’이라는 약물이 들어 있다. 치매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농도가 낮아지면서 인지능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질병인데, 리바스티그민은 아세틸콜린을 만드는 콜린 세포의 분해를 억제해 체내 아세틸콜린 농도를 유지시킨다.
엑셀론 패치는 하루 두 번 잊지 않고 복용해야 하는 알약의 단점을 보완해 하루에 한 번 몸에 붙이는 형태로 개발됐다. 작은 차이지만 치매 환자가 약을 잊지 않고 챙겨 먹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약의 사용이 획기적으로 편리해졌다. 파스형 치료제는 약물 사용 여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엑셀론 패치는 구토나 울렁거림 같은 부작용도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시켰다. 한 번에 높은 농도의 약물을 공급하는 알약과 달리, 낮은 농도의 약물을 24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방출하기 때문에 위장이 약한 노인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었다.
최근 기존 약물을 대신하는, 아니 능가하는 스마트 패치들이 많이 개발됐다. 미국 존슨 앤드 존슨의 계열회사인 오소-맥닐에서 2003년 개발한 붙이는 피임약 ‘에브라(EVRA) 패치’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미국 왓슨제약에서 옥시부티닌 약물로 개발한 요실금 치료제 ‘옥시트롤’, 같은 해 미국 노벤제약에서 메틸페니데이트 약물로 개발한 과잉행동발달장애(ADHD) 치료제 ‘데이트라나’도 스마트 패치다. 얼마 전엔 일본 심바이오가 구토 억제 효과가 있는 그라니세트론 약물을 주성분으로 구토 억제용 파스 ‘AB-1001’를 개발했다. 파스는 점점 더 ‘스마트’해지고 있다.
파스가 끈적끈적한 또 다른 이유
‘스마트’한 파스를 개발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어떤’ 약물을 넣는가보다는 ‘어떻게’ 약물을 넣는가이다. 이미 개발된 약물을 전달 경로만 바꿔도 효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장은 “파스에 들어 있는 약물은 저마다 몸속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다르다”며 “약효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흡수촉진제와 점착제를 적절히 혼합해 약물 흡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파스의 끈적끈적한 부분에는 약물 외에도 흡수촉진제와 점착제 같은 첨가 물질이 섞여 있다. 그중에서 흡수촉진제는 단어 그대로 약물의 흡수를 돕는 물질이다. 피부는 각질 세포가 벽돌처럼 쌓여 있는 조직이다. 벽돌과 벽돌 사이는 지질성분이 메우고 있는데, 지질성분은 일종의 ‘모르타르’인 셈이다.
흡수촉진제는 지방산, 지방알코올, 계면활성제, 글리콜, 탄화수소처럼 지질성분과 친화력 있고 인체에 안전한 물질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지질성분에 스며들어 세포 사이를 벌리기도 하고 직접 지질층을 타고 피부를 통과하기도 한다. 이때 약물은 흡수촉진제와 함께 이동한다. 약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흡수촉진제를 이용하면 흡수율을 25~35%까지 높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약물이 흡수되는 속도를 늦춰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니코틴은 피부에 확산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몇 초 내에 뇌까지 전달되기 때문에 어지러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럴 땐 약물과 점착제를 섞어 피부에 흡수되는 속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점착제는 파스를 피부에 고정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점착제 자체가 갖는 화학적 성질을 응용해 약물과 결합시키면 약물 방출 속도를 늦추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실제 파스를 개발할 땐 여러 가지 흡수촉진제, 점착제를 이용해 수백 차례 실험을 한 뒤, 원하는 농도로 약물을 방출시키는 물질을 선택한다. 약물마다 체내에서 분해되는 속도가 다르고, 다른 첨가제가 작용해 실제 약물이 투과되는 정도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 기간은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까지도 걸린다.
이 소장은 “약의 효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며 “파스에 첨가한 물질들이 체내에서 특별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런 물질들은 약물과 잘 섞이면서도, 물리·화학적으로 안정하고, 피부에 자극이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신제약은 1969년 국내 최초로 천연고무를 이용한 의료용 점착제를 개발했다. 천연고무는 화학적인 반응성이 낮아 인체에 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노 반도체, 마이크로 바늘 이용한 미래형 패치
최근에는 흡수촉진제나 점착제 같은 화학물질을 추가로 쓰지 않고도 약물의 흡수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하루에 몇 번씩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당뇨 환자들을 위한 인슐린 패치가 대표적이다. 인슐린 패치는 하루에 한 번만 부착하면 하루 종일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방출한다.
특히 2007년에 유럽의 반도체 회사 ST마이크로일 렉트로닉스와 스위스의 의료장비 전문업체인 디바이 오텍이 공동으로 개발한 1회용 인슐린 패치는 ‘나노 펌프’라고 불리는 손톱 크기의 소형 반도체 칩이 부착 돼 있다. 이 칩은 인슐린이 췌장에서 자연적으로 분 비되는 것과 최대한 유사하게 방출되도록 인슐린 주 입량을 미세하게 조절한다. 크기도 기존 인슐린 패치 에 사용되는 칩의 4분의 1 수준으로 작아 패치를 피부 에 부착했을 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전극을 이용해 극성을 가진 약물을 흡수시키는 패 치도 있다. 그중 잘 알려진 것이 미백 기능성 화장품 인 비타민 C 패치다. 비타민 C 패치는 종이처럼 얇고 구부릴 수 있는 박막형 전지로 만들어져 표면에 미세 한 전류가 흐른다. 비타민 C는 물에 녹으면 수소원자 를 방출하면서 음전하를 띤다.
따라서 비타민 C를 녹인 용액을 피부에 바른 뒤 그 위에 패치를 붙이면 패치가 가진 음극과 비타민 C 사 이에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덕분에 비타민 C 성분이 피부 속 깊이 빠르게 침투하게 된다. LG 생 활건강, 태평양, 에스티로더 같은 유명 화장품 회사 에서 실제로 제품을 출시한 적이 있으며 제품에 따 라 패치 한쪽 면에 비타민 C 용액이 발라져 있는 형태도 있다.
한편 주사바늘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통증은 없 앤 마이크로 바늘 패치도 있다. 모기 침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이 패치에는 길이가 수백μm(마이크로 미터, 1μm=10-6m )인 미세 주사바늘이 수백 개 붙어 있다. 이 바늘들은 워낙 작아서 찔려도 통점이 있는 부분까지 깊숙이 박히지 않기 때문에 통증을 일으키 지 않는다. 바늘 끝에는 약물이 들어 있다.
바늘은 다른 형태로 제작되기도 한다. 바늘 자체를 약물 원료로 제작해 바늘이 몸속에서 녹아 약물로 작 용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미세한 주사바늘로 피부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위에 패치를 붙여 약물을 주입하 는 방식도 있다. 이런 방식들은 공통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약물을 직접 피부에 침투시키기 때문에 흡수촉진제가 없어도 효과가 확실하다.
그 밖에도 초음파 진동으로 피부 조직의 배열을 순 간적으로 변화시켜 약물을 침투시키는 방식, 고압용 가스로 피부에 약물을 밀어 넣는 방식 등 새로운 패치 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치료 영역을 넓혀 가는 파스.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질병이 ‘스마트’한 파스 한 장으로 해결되는 날이 오 지 않을까. 그때는 주사가 무서워서 도망쳤던 일, 우 는 아이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려고 고생했던 일, 아 침, 점심, 저녁이라고 적힌 약봉지를 챙겨 다니던 일 이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