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과학은 사멸하는가. 게놈 계획, 우주정거장(프리덤)과 함께 거대기초과학의 상징물로서 세계 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초전도거대가속기(SSC) 건설이 중지됐다. 작년 말 미국 상하양원협의회에서 SSC건설을 중지하기로 결정한 것. 전체 길이 87km 중 14.7km의 굴착공사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갑작스럽고 변덕스런 결정에 여기에 매달렸던 1천여명의 물리학자(미국이 5백명, 나머지는 외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참여할 예정이었음)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져 있다.
텍사스주 왁사하치시를 중심에 두고 원형터널(평균 깊이 60m, 터널 지름 3.6m)로 건설되고 있었던 SSC는 지금까지의 입자가속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다. 이 터널 안에서 양성자가 사상 최고의 충돌에너지(40TeV, 1TeV는 1조전자볼트)로 충돌한다. 터널의 회전반경(SSC는 약 13.9km)이 점차 커지는 것은 더 빠른 속력, 더 높은 에너지로 입자를 회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SSC는 82년 미국 물리학회에서 처음 제안돼 89년 1월 SSC연구로가 정식으로 발족됐다. 애초 예산은 59억달러로 예상됐으나 정식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에는 82억달러로 상향 조정됐다. 이중 50억달러는 미국 연방 정부가, 10억달러는 텍사스 주정부가 대고 나머지는 국제협력으로 충당하기로 했던 것. 국제협력 부분 중 상당 부분(20억달러 정도)은 일본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중단이 결정될 당시까지 1백여명의 물리학자를 SSC계획에 투입하고 있었다.
93년 초에 등장한 클린턴 정부는 미국의 기술경쟁력 강화를 공약 1호로 내세우고 SSC계획을 지지했지만 재정적저에 허덕이면서 갈등을 겪어왔다. 클린턴 정부 출범 이전에도 SSC는 홍역을 치렀다. 92년 하원의 본회의에서는 SSC 예산안이 부결됐지만 상원에서 간신히 부활됐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터라 93년 6월의 하원에서 또다시 SSC가 도마 위에 올려져 부결될 때만 하더라도 과학자들은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양원 협의회가 상정한 존속안을 하원에서 재차 부결시키고 다시 양원협의회에 되돌아가 중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른 것.
뉴욕타임스 사설은 "의회가 적자 해소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상징적인 재물로 SSC를 선택했다"고 의회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SSC계획은 애초부터 성공을 의심받을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는 지적도 있다. SSC는 15m짜리 초전도자석 8천개가 필요한데, 이를 하루에 10대씩 만든다는 계획. 그러나 현실은 현재 제작할 수 있는 1m짜리 초전도자석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연결해야 하므로 1달에 1개 정도 밖에 제작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서둘러야 1주일에 한 개.
이외에도 거대과학프로젝트에 경험이 없는 미국 정부의 관리체계 허점(일을 추진하는 연구자 그룹과 예산을 관리하는 에너지부와의 마찰로 드러남)도 문제점으로 많이 지적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기술적 무리와 불협화음이 의회로 하여금 를 재정적자의 '제물'로 삼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한편 물리학자의 국제조직인 IUPAP에서는 긴급하게 회동을 갖고 미국측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물리학 관련 세계 주요 연구소 소장 30인이 모인 이 모임에서는 기초과학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1천명 이상이 참가하는 국제협력연구의 일방적 중단이 야기할 수 있는 여러가지 위험성이 지적됐다. 아무튼 'SSC의 중단이냐, 아니면 지속이냐'는 문제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의 물리학을 비롯한 여타 기초과학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