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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벽에 뚫린 3000개 구멍의 비밀

오랜만에 개인 사업가 고교 동창 K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업무 용도의 임대 건물을 하나 세우려고 한다”며 필자를 서울 강남대로의 논현동 네거리로 데려갔다. ‘교보타워 사거리’로 더 알려진 이 지역은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초기에 조성된 곳이라 나중에 개발된 강남의 여타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편이다. K가 가리킨 검은색 건물도 이때 함께 건설됐는지 규모나 시설에 새로운 손질이 필요해 보였다.

건축가들 사이에는 ‘친척이나 친구처럼 아는 사람들과는 일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교보타워가 마주 보이는 강남의 네거리는 건축가라면 누구나 탐이 날 만한 장소이리라. 같은 공간에 비슷한 높이로 고층 건물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보타의 디자인은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회사 식구들은 강남대로 한복판에 세워지는 고층 건물의 설계를 맡기는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필자 또한 모처럼 찾아온 친구의 프로젝트에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설계를 진행해갔다.

구조 틀과 외벽을 뒤바꾸다

처음 설계는 전체 벽면을 유리로 감싸는 ‘유리 커튼월 식’이었다. 커튼월은 외벽이 커튼처럼 건물 내부를 감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리처럼 약한 재료가 고층 건물의 엄청난 하중을 어떻게 견디는지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외벽 자체에는 건물을 지지하는 데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밑으로 가해지는 수직하중, 바람이나 지진에 의한 수평하중과 같은 대부분의 힘이 건물 내부에 세워지는 기둥과 보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외벽은 이보다 외부로부터 공간을 막고 소음이나 열을 차단하는 기능이 더 크다. 덕분에 커튼월에는 건물 자체 하중을 줄이기 위해 유리나 스테인리스강 같이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건물주와 임대인들 사이에 이주 시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착공 예정일이 예상보다 4개월 이상 늦춰졌다. 숨 가쁘게 몰아가던 작업에 맥이 풀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돌아볼 기회라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여유를 갖고 한발 물러서서 보니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법적 요건에 맞춘 우리의 설계는 객관적으로 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합리적인 구조와 공용면적의 비례는 적절했다. 경제성과 기능성을 두루 갖춘 외피의 구성도 무난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다를 뿐 주변에 세워진 무수한 고층 빌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기와 높이를 정하고 그에 적합한 기둥을 세워 외벽을 두르는 방법은상식적인 방법이긴 하나, 새롭지 않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무작정 반대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따져서 색다르게 보는 관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구조와 외벽이라는 상식적인 틀을 뒤집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

외벽이 기둥 역할을 하면 구조가 노출된다. 처음 설계에서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 틀로 설정했던 철근콘크리트는 그대로 외벽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내부에는 기둥을 만들지 않아도 돼 공간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사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의 건평(건축 면적) 584m²(177평)는 사무실로 쓰기에는 다소 좁은 편. 내부에 기둥을 없애는 대신, 벽으로 건물의 하중을 받아내면 내부 공간을 훨씬 넓고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원경이 된 외벽 구멍

콘크리트 외벽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나자 이번에는 어떤 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다. 창은 건축의 표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부 사용자가 외부와 소통하는 통로이다. 내부에서의 시야는 창문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창문을 최대한 크게 열면 대상은 외부 풍경과 함께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네모난 모양으로 작게 만들면 창은 그림을 담는 액자가 된다.

그렇다면 창문 대신 동그란 구멍을 여러 개 뚫으면 어떨까.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고 동그랗게 만들어 그 사이를 들여다보자. 마치 망원경처럼 대상을 끌어당겨 보는 줌(zoom)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동그라미를 통해 보는 세상은 부분이지만 동그란 구멍은 대상을 더 집중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은 교보타워를 마주 보고 있으므로 좋든 싫든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교보타워의 육중한 갈색 건물을 보게 된다. 무겁고 어두운 색으로 시야의 상당부분을 가린다는 점이 우리로서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건물의 창이 커질수록 맞은편 건물의 모습이 더 크게 부각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외벽에 작고 동그란 구멍을 뚫어 거대한 교보타워가 조각으로 나뉘어 보이도록 했다. 결국 지름 1050mm의 원형 구멍3371개를 벽면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했다. 구멍을 뚫는 덕분에 무거운 콘크리트 벽체를 쌓아 올리는 부담도 줄었다. 마치 다공질의 스펀지처럼 곳곳이 비어 벽체가 한결
가벼워졌다.

구멍을 뚫어 약해진 콘크리트 속으로는 견고하게 조립한 철근 구조를 집어넣었다. 둥글게 뚫린 거푸집을 가운데 두고 철근 여러 개를 구멍 둘레로 비스듬하게 짜 맞춰 벌집 모양의 6각형 구조를 만들었다. 6각형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구조 중에서 힘을 가장 균형 있게 배분하는 안정적인 구조라고 알려져 있다. 견고한 철근 구조 덕분에 외벽에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힘이 생겼다. 즉 외벽에 뚫은 구멍이 오히려 건물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다.



길 위의 문, 소통하는 건물

강남대로 네거리의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공사과정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방송과 같았다. 철근 구조를 쌓는 일은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공법임에도 사람들은 철근 구조가 한 층씩 차례로 완성돼 가자 신기해했다. 6각형 모양으로 조립된 철근 구조와 군데군데 설치된 둥근 거푸집들이 마치 조립식 건축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래층부터 한 층씩 철근 구조를 쌓으면 곧바로 거푸집 속으로 콘크리트를 붓고, 굳으면 거푸집을 떼어냈다. 어두운 회색빛이 도시를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 콘크리트에 백색안료를 섞어 밝게 만들었다. 건물이 17층이다 보니 균일한 색과 점도로 콘크리트를 17번 타설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콘크리트 공급 시간과 날씨, 교통 상황 등 모든 현장 요소가 콘크리트의 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작업 현장은 전시 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이후 ‘도시의 벌집’이라는 뜻으로 ‘어반하이브(Urban Hive)’라고 이름을 지은 이 빌딩은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에는 제27회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다. 얼마 전에는 한국 건축가가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건축축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어반하이브는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로부터 ‘환상적인(fantastic)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건축과 도시가 연결되는 방식은 곧 건축과 인간이 접촉하는 방식이다. 밖과 안은 이분법적인 상태가 아니라 통합된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어반하이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는 정문이라고 볼 수 없는 ‘입구’이다. 정문을 열고 들어와 천장 높은 로비를 만나는 보통 건물과 다르다. 정문 대신 외벽 한 모서리를 비스듬하게 깎아서 들어오는 입구를 만들었다. 문이 없기 때문에 건물 내부로 들어와도 길과 이어진 하나의 마당이 있을 뿐이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누구든 들어와서 앉아 쉴 수 있다. 마당은 건축과 도시의 연결을 경계 없이 풀어놓는다. 네거리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이 흰색 상자가 딱딱하고 삭막한 도시에서 부드럽고 편안한 소통의 장치로 역할해주길 바란다.

김인철 교수는 홍익대 건축과와 국민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중앙대 교수이자 건축회사 ‘아르키움’의 대표로서 작품 활동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없음의 미학’으로 공간을 해석하는 그는 익산 어린이의 집, 김옥길 기념관, 펼쳐지는 집 등으로 서울시 건축상, 건축가협회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인철 건축가·중앙대 건축학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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