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온누리호, 수바항에 닻을 내리다
9월 27일 인천공항에서 오후 6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을 날아 다음날 오전 8시(현지시각. 한국보다 3시간 빠름)가 다 돼 피지 난디(Nadi)공항에 도착한 한국해양연구원(이하 해양연) 연구원들과 기자는 소형버스로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4시간 만에 피지의 수도 수바(Suva)에 도착해 한국교포가 운영하는 서던크로스(Southern Cross) 호텔에 짐을 풀었다.
연구원 20여 명이 적도를 넘어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까지 온 이유는 수바항에 정박할 해양탐사선 온누리호에 탑승하기 위해서다. 온누리호는 하와이 부근의 해저탐사를 마치고 수바항에 며칠 동안 정박한 뒤 새로운 탐사팀을 싣고 피지 동쪽에 있는 작은 섬나라 통가의 EEZ(배타적 경제수역) 내 해저자원을 탐사하기 위해 떠날 예정이다.
호주의 동북부 바다 수천km에 걸쳐 펼쳐져 있는 남태평양 섬들은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섬 주변의 바다 밑은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자리하고 있어 지각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해저지진과 화산 폭발이 자주 일어난다.
이때 생긴 해저지각의 틈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면 지각 아래 마그마의 열기로 수백℃로 데워져 다시 분출되는데, 이를 ‘해저열수’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금이나 은, 구리, 아연 같은 고가의 광물이 농축돼 쌓인 해저열수광상이 형성된다.
부두에 자리가 안 나 입항이 늦어져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기자는 수바항 킹스와프부두에 정박해 있는 온누리호를 볼 수 있었다. 주위는 이미 깜깜해졌지만 온누리호는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있다. 온누리호 옆에 있는 크레인이 노란 줄이 감긴 커다란 실패처럼 생긴 설비를 들어올려 온누리호 갑판으로 옮기고 있다.
“오늘 하루 크레인을 임대했기 때문에 밤이라도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건 스트리머(streamer)인데 무게가 10t쯤 되죠.”
“수고하셨습니다. 홀가분하시겠네요.”
“허허. 이제 고생이군요. 수고하세요.”
배에 올라타니 이번 탐사의 책임을 맡은 해양연 김현섭 박사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해양연 유찬민 박사로 하와이 탐사의 책임자다. 임무교대의 현장인 셈이다.
“저희는 해저 퇴적물을 채취했습니다. 돌아가서 시료를 분석하는 일이 남았죠.”
유 박사를 따라 웨트랩(wet lab)에 들어가자 해저 퇴적물 시료가 담긴 투명 아크릴관이 즐비하다. 웨트랩은 ‘젖은 실험실’이란 뜻으로 실제 시료를 다루는 실험실이다. 그 반대는 물론 드라이랩(dry lab)으로 측정 장비가 얻은 데이터를 컴퓨터로 분석하는, 즉 손에 물을 묻힐 일이 없는 곳이다. 배 안에서는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짐을 옮기고 있다. 이들의 표정에는 오랜 시간 준비해온 탐사가 임박했다는 긴장과 설렘이 엿보였다.
9월 29일 박쥐 모방한 첨단장비로 탐사정밀도 높여
피지는 33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로 면적이 약 1만 8000km2이고 인구는 약 85만 명이다. 남한 면적의 5분의 1이 채 안 되지만 남태평양 섬나라 가운데는 가장 크다. 피지에서 가장 큰 섬은 비티레부섬으로 남동쪽에 수도인 수바가 있고 서쪽에 국제공항이 있는 난디가 있다. 면적은 약 1만km2로 제주도의 5배가 좀 넘는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하얀 온누리호가 반가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연구원들은 벌써부터 나와 탐사장비를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지난밤 쾌적한 호텔방에서 지낸 기자는 배 안의 좁은 침실에서 잤을 연구원들에게 좀 미안해졌다. 배 뒤쪽 갑판에서는 연구원들이 어제 내려놓은 스트리머에 주황색 파이프를 연결하고 있다.
“스트리머가 감지한 탄성파 데이터를 전송하는 케이블입니다. 이 케이블의 한쪽이 드라이랩으로 연결되지요.”흰 목장갑을 끼고 스패너로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는 해양연 노경찬 연구원의 설명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자 꽤 넓은 조타실이 나온다. 이봉원 선장이 온누리호에 대해 설명해줬다. 1991년 건조된 온누리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탐사선으로 길이 63.8m, 너비 12m에 무게가 1422t이나 나간다. 항해속도는 14.5노트(시속 27km)다. 이 선장은 “온누리호는 배 아래 앞뒤로 작은 프로펠러가 있기 때문에 좌우로도 이동할 수 있고 제자리에서 회전할 수도 있다”며 “최대 41명의 인원이 40일간 활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온누리호의 심장인 지하 3층 기관실로 내려가 봤다. 조종실에서 기관실 내부로 들어가는 문 앞에 ‘헤드폰’이 걸려 있다. “안에는 소음이 엄청납니다. 귀마개(헤드폰이 아니었다!)를 하세요.” 한명수 기관장의 설명에도 기자는 직접 소음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들어갔다. 소음은 상상 이상이었다. 배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인데, 실제 배가 운항해 엔진이 작동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8기통 엔진 두 대가 장착돼 있어 3000마력이 넘는 힘이 나온다.
다시 갑판으로 올라오자 부두에서 온누리호 왼쪽에 매달린 금속봉에 어떤 장치를 조립하느라 연구원 대여섯 명이 ‘힘을 쓰고’ 있다. 건너가 보니 다리 네 개짜리 원형 의자처럼 생긴 장치를 길이가 7~8m나 되는 금속 봉에 연결하고 있다.
“일종의 수중 GPS인 USBL이란 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중입니다. USBL은 심해의 탐사장비에 붙어 있는 발신기가 배에 장착된 수신기에 음파를 보내 탐사장비의 상대적인 위치를 계산하는 장치죠.”
김현섭 박사는 원형 의자의 다리 끝에 수신기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다고 말했다. 즉 금속 봉을 세워 수신기를 배 근처 물에 잠기게 한 뒤 심해 탐사장비에 장착된 발신기에서 보낸 음파가 4개의 수신기에 도달하는 시간 차이를 해석해 배와 탐사장비 사이의 거리와 방향을 파악한다. 둘 사이의 거리가 2000m 떨어져 있을 경우 오차는 6m 정도다. 박쥐가 동굴 벽에 반사된 초음파가 두 귀에 도달하는 차이를 이용해 위치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원리다.
김 박사는 “이전 탐사에서는 배가 지나가다 해저 카메라로 흥미로운 영상을 찍어도 다시 그 지점을 찾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이번엔 USBL을 장착해 좀 더 정밀하게 탐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9월 30일 사모아발 쓰나미 비껴가
“저기 멀리 파도 치는 게 보이죠? 저 밑에 산호초가 있기 때문에 파도가 해변까지 들어오지 못합니다. 초대형 쓰나미가 아니라면 저 벽을 넘지 못할 겁니다.”
항만 출입문에서 차량출입금지 표시를 보고 다소 의아했던 기자는 온누리호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전날 피지 동북부의 섬나라 사모아 제도 인근 해저에서 발생한 규모 8.0 강진의 여파로 엄청난 파도가 사모아를 덮쳐 130여 명이 사망했고 인근 섬나라들에도 쓰나미 경보가 내렸던 것. 이에 따르면 오전 11시 무렵 쓰나미가 피지 해안에 도달한다. 온누리호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부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쓰나미는 수심이 얕을수록 파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배들은 바다로 나가야 안전하다(쓰나미에 대해서는 과학동아 2005년 2월호 ‘지진해일, 22만 명 목숨 앗아가’ 참조).
이경용 단장은 멀리 바다를 내다보며 “지금 부두를 떠나면 탐사일정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며 “온누리호를 빌리는 데 하루에 1000만 원이 든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이 단장의 예상대로 11시가 돼도 항만 측에서 이렇다 할 지시가 없었다. 쓰나미가 피지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
“위험하냐고요? 사실 이 부근 해저에 유용한 광물이 많이 형성돼 있는 이유는 해저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빈발하기 때문입니다.”
김현섭 박사는 하필 해저지진이 빈발한 이런 지역을 탐사구역으로 정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통가 해역은 지금까지 수차례 탐사를 거쳐 금과 은, 구리 같은 귀금속이 풍부한 열수광상이 존재할 확률이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번 탐사에서는 경상북도 넓이의 탐사구역에서 시료를 채취할 지점을 찾아야 한다. 이번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 초에 있을 탐사에서는 본격적으로 해저 시료를 채취해 열수광상 개발의 경제성을 검토하게 된다.
정오가 지나 부두에 검은 리무진이 들어섰다. 전남진 주피지 대79사가 격려차 온누리호를 방문한 것. 전 대사는 2년 전에도 수바항에 정박한 온누리호를 찾은 바 있다. 대사 일행을 맞아 온누리호의 요리사들이 푸짐한 뷔페요리를 차렸다. 원래 배가 정박하면 요리사들은 요리를 하지 않는데, 전 대사 덕분에 일급요리사들의 음식을 맛보게 됐다.
“수바는 우리나라 남태평양 참치잡이 어선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얼리지 않은 참치고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이지요.”
회를 잘 먹을 줄 모르는 기자이지만 전 대사의 설명을 듣고 참치 회를 몇 점 집었는데,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다. 지리학도로 미국 예일대에서 환경학까지 공부했다는 전 대사는 해양분야에 대한 박학한 지식으로 연구원들을 감탄시키며 담소를 이끌었다. 때로는 우스갯 소리를 던지는 모습이 고위 정부 관리를 맞아 다소 긴장한 연구원들을 마음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로 보였다. 화기애애한 자리를 접고 전 대사 일행이 떠나자 배 안은 다시 출항 준비로 분주해졌다.
10월 1일 통가 탐사해역으로 출발!
여름이 시작되는 남반구라서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워지는 것 같더니 이날은 아침부터 강한 햇살이 하얀 온누리호에 쏟아졌다. 일렁거리는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이 선체의 표면에 어지러운 무늬를 그리고 있다.
인근 시장에서 막 사온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마지막으로 배에 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연구원들과 승무원들은 뱃머리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드는 ‘포즈’를 취해줬다. 물론 몇 시간 뒤 닻을 올리고 배는 통가의 탐사해역을 향해 떠난다.
“뛰어난 연구원들이 다들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탐사를 지휘하는 김현섭 박사는 싱긋 웃으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려고 손을 내밀었다. 온누리호를 뒤로하고 기자는 난디로 이동하기 위해 서둘러 수바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