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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비늘에 뒤덮인 두툼한 속살 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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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겠네 못 가겠네
놋잎 같은 갈치 뱃살 두고
나는 시집 못 가겠네’

과거 섬지방 처녀들이 명절 때 부르던 강강술래 매김 소리 중 한 부분이다. 처녀가 시집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가장 생각난다고 할 만큼 갈치 뱃살은 맛이 있다. 갈치의 참맛은 가운데 토막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위도 큰애기 갈치 꼴랑지 못 잊어 섬을 못 떠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꼬리는 꼬리대로 살이 투실투실해 먹을 만하다.

갈치는 요즘에도 인기 있는 생선이다. 잔뼈가 많아서 먹기에 다소 불편한 점이 있지만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은 뼈를 발라내는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구이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무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각종 양념장을 얹어 진하게 졸여낸 조림도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방금 낚아 올린 싱싱한 생갈치는 특급 횟감으로도 대우받으며, 풀치라고 불리는 갈치새끼를 애호박과 함께 지지거나 잘 으깨어 거른 다음 초피가루를 넣어 국으로 끓인 음식도 놓칠 수 없는 별미다.

서서 헤엄치는 물고기

갈치(Trichiurus lepturus)는 농어목 갈치과의 바닷물고기다. 몸은 기다란 칼 모양이며, ‘갈치(칼치, 刀魚)’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막 깨어난 새끼는 보통 물고기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자라면서 점점 몸이 길어져 어미와 같은 모양으로 변해간다. 몸빛깔은 광택이 나는 은백색이며, 등지느러미는 연한 황록색을 띤다. 꼬리는 실 모양이고 배와 꼬리에는 지느러미가 없다. 머리에 비해 눈과 입이 큰 편이며, 위턱과 아래턱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줄지어 있다.

갈치는 주로 수심 50~300m의 깊은 바다에서 살지만, 육지와 가까운 연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근처에서는 2~3월에 제주도 서쪽 바다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4월경에 북쪽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여름에는 남해와 서해, 중국 근처의 연안에 머물며 알을 낳는다. 암컷 한 마리는 산란기간에 10만여 개의 알을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8월이 되면 남해안에서는 갈치잡이 시즌이 시작된다. 갈치잡이 어선은 보통 해가 질 무렵 출어해서 이튿날 새벽에 돌아오는데, 이즈음의 밤바다는 대낮같이 환한 조명을 밝히며 떠다니는 수백 척의 낚시 어선들로 한바탕 불야성을 이룬다.

갈치낚시를 하다 보면 기묘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어선에서 수면 쪽을 내려다보면 불빛에 이끌린 갈치가 물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희한하기 짝이 없다. 머리와 꼬리를 앞뒤로 하고 헤엄치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달리 머리를 위로, 꼬리를 아래로 내린 상태로 몸을 꼿꼿이 세워서 헤엄치는 것이다. 갈치는 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동할 때나 먹이를 잡을 때,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이런 자세를 유지한다. 아마도 꼬리지느러미가 없고 그 끝이 실같이 가늘어 물을 차고 앞으로 전진할 힘이 없기 때문이리라.

제 꼬리 잘라 먹는 식탐

육식성 물고기답게 갈치의 이빨은 매우 잘 발달해 있다. 예리한 이빨로 질긴 낚싯줄을 단숨에 끊어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어부들은 갈치 이빨에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고, 물린 뒤에 피가 잘 멎지 않는다고 해서 갈치를 다룰 때는 특별히 조심한다. 갈치는 날카로운 이빨로 정어리, 전어, 눈퉁멸, 민어, 오징어, 새우류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왕성한 식성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가 쓴 ‘전어지’에도 갈치의 식탐이 잘 묘사돼 있다.

“무엇이든 잘 물고 입 가까이 뭔가가 있으면 확 달려들어 단숨에 잡아먹는다. 배가 고프면 왕왕 제 꼬리를 잘라 먹는다.”

실제로 어부들 중에는 미끼가 부족할 때 갈치 꼬리를 잘라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게걸스런 식성 때문인지 갈치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소문이 떠돌기도 한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제일 먼저 달려드는 것이 갈치라느니 갈치를 먹다가 사람 이를 씹었다느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사실 갈치를 요리할 때에는 내장을 완전히 제거하므로 이를 씹을 일은 전혀 없다.

갈치가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내장 속에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갈치살을 발라 먹다 보면 주로 등뼈 아래쪽이나 배쪽에서 사람 이처럼 생긴 덩어리가 나올 때가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 같다. 이런 덩어리는 주로 다 자란 갈치의 몸속에서 발견되는데,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일종의 뼛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갈치를 먹다가 사람의 이 같은 것을 발견하더라도 그리 놀라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잘 상하지 않는 이유

갈치는 민어처럼 잔칫상이나 제상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비늘이 없고, 길쭉하니 뱀 같은 생김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민어탕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갈치 백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먹을거리였다. ‘한국수산지’에는 모심기를 할 때 갈치가 가장 많이 소비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 시골에서 모심기나 벼 베기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갈치가 주요 메뉴로 등장했다. 여기에다 갈치창자젓과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이면 최고의 논두렁 식사가 됐다. 갈치는 어떻게 최고의 인기 생선이 될 수 있었을까.

돈을 아끼려면 절인 갈치를 사 먹으라는 말이 있다. 갈치는 뛰어난 맛과 영양에도 불구하고 값이 쌌기에 가난한 서민들에게 최고의 영양식이 될 수 있었다. 생선에 소금을 뿌려 두면 저장하기 좋아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있다. 갈치는 몸이 납작하고 살이 단단해서 소금에 잘 절여진다. 살 또한 지방질이 적어 웬만해서는 잘 상하지 않는다. 저장하기 좋다는 사실은 냉장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크나큰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값싸고 맛있는 데다 잘 상하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기까지 하니 갈치는 인기 생선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배추 값이 올라 김치가 금치가 됐다더니 이젠 어획량이 줄어들어 급기야 갈치마저 금치가 될 지경이다. 대중적인 생선의 대표 격인 갈치가 고급 생선이 되고 나면 이젠 또 어떤 생선을 먹어야 할까. 바다가 온갖 종류의 물고기로 넘쳐 나던 시절이 그립다.
갈치 은빛의 두 얼굴

시장에서 보는 갈치는 색깔이 바래어 다소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갈치를 흔히 먹갈치라고 부르는데, 거의 모두 서남해나 동중국해에서 그물로 잡은 것들이다. 잡는 와중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검은 색깔을 띤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의 갈치는 전혀 다른 물고기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은빛의 금속광택을 뿜어내는 몸체와 파도처럼 물결치는 지느러미는 갈치를 이 세상의 동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물이 아닌 낚시로 잡아 올린 갈치는 아름다운 은빛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은갈치라고 불리며 먹갈치보다 훨씬 비싼 값에 거래된다.

갈치의 은빛은 구아닌(guanine)에서 유래한다. 구아닌은 핵산의 일종이며, 사람의 유전물질인 DNA의 재료가 되는 물질이다. 그런데 구아닌의 화려한 색깔 이면에는 한 가지 위험요소가 숨어 있다. 구아닌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낚시로 끌어 올린 싱싱한 은빛 갈치는 일급 생선회가 된다. 이때 구아닌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먹으면 복통과 두드러기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다행히 구아닌은 가열하면 분해되기 때문에 익혀 먹으면 식중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구아닌의 독성보다도 화려한 색채에 주목했다. 갈치의 구아닌을 이용해서 가짜 진주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대칼로 구아닌을 긁어모은 다음 유기용매에 녹여 ‘진주정(眞珠精)’을 만들고 플라스틱 구슬 표면에 이를 바르면 진주와 비슷해진다. 여기에 다시 염화비스무스와 같은 물질을 바르면 진짜와 구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한 인공진주가 만들어진다. 갈치에서 뽑아낸 진주정은 매니큐어나 각종 장식품 소재로도 많이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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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태원 서울세화고 생물 교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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