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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31일 오후 2시 제주 구좌읍의 한 가정. 주부 A씨가 세탁기를 작동하려던 손을 멈추고 집 한쪽에 설치된‘스마트 미터’에 시선을 던진다. 스마트 미터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하는 이 지역의 전기료 추이를 알려주는 전자식 단말기. 사람들이 전기를 많이 쓰면 그만큼 오른 요금이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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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꽤 비싸네….’A씨는 세탁기를 쓸 필요가 없는 손빨래를 오후 가사의 첫‘종목’으로 정한다. 오후 7시가 지나면서 전기료가 떨어졌다. 사무실의 냉방기 사용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A씨는 세탁기 전원 버튼을 누른다. 요즘 그는 변하는 전기료를 꼼꼼히 따져가며 가계를 살찌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전기료가 일정 수준 이상 떨어지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가전제품도 있어 편리함은 더 커졌다.

A씨는 한 달에 한 번 우편함에 꽂힌 전기료 고지서를 들여다보던 4~5년 전과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난 8월 31일 제주 북동부에 있는 구좌읍 일대 6000세대를 대상으로 스마트 그리드 실증단지가 착공됐다. 가정에 스마트 미터가 설치되는 것은 물론 거리에는 전기 자동차를 위한 충전소가 마련된다. 전력의상당 부분을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서 얻는다.

완공 목표 시점은 2013년 12월. 2014년부터는 주부 A씨처럼 종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생활을 누릴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 그리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똑똑한 전력망’이다. 핵심은 전력망에 정보기술(IT)을 합쳐 소비자와 전력회사가 서로 소통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소비자는 요금이 쌀 때 전기를 쓰고, 기업은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해 사업 기회를 얻는다. 국가적으로는 전력 수요와 공급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어 대형 발전소를 과도하게 짓거나 운영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은 스마트 그리드에서 녹색 성장의 기반을 찾겠다는 전략이다. 광범위한 인터넷망, 좁은 국토, 단일한 송배전 회사라는 조건을 십분 활용하고 이제 막 뜨고 있는 세계 스마트 그리드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는 복안이다. 제주 구좌읍의 실증단지는 그 첫걸음이다.

한국 못지않게 미국과 유럽도 적극적인 계획을 밝히고 있다. 1960~1970년대에 구축한 낡은 송배전망을 교체할 기회로 스마트 그리드를 보고 있는 미국은 지난 6월 39억 달러(4조 7000억 원)를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유럽은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기 위한 인프라로 스마트 그리드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풍력, 태양광처럼 자연 환경에따라 공급되는 전력량이 달라지는 신재생에너지를 광범위하게 쓰기 위해서는 전력 수요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스마트 그리드가 필수라는 얘기다. 특히 유럽은 인접한 국가 간에 전력을 사고파는 데도 스마트 그리드를 이용할 방침을 세웠다.

전기료 부담↓, 에너지 효율↑

스마트 그리드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수시로 변하는 전기료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점
은 소비자가 가장 강하게 느낄 변화로 꼽힌다. 소비자들은 집안에 설치된 스마트 미터를 통해 현 시점에서 전기료가 얼마인지 알 수 있다. 전기료 통보 주기는 15분에서 1시간 정도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소비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기료를 보면서 절전(節電)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다. 스마트 미터에 뜨는 수치를 통해 ‘저녁에 세탁기를 쓰면 전기료를 아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낮 시간에 전원 버튼을‘과감히’누를 소비자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

소비자가 전력 소비에서 시장 원리를 따지면서 국가는 전력 수요를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주택 대출이 지나치게 늘면 금리를 올려 부동산 시장 과열을 막듯이 전력 수요가 발전량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면 전기료를 비싸게 매겨 수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전력 수요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현재 전력 생산시스템의 중심은 발전 단가가 낮은 원자력이다. 원자로는 효율과 안전 문제 때문에 수시로 껐다 켤 수 없는 만큼, 반드시 소비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력을 생산하는 데 주로 활용된다. 이에 비해 석유와 가스는 여름철 전력 수요가 치솟을 때 잠깐씩 쓴다. 문제는 석유와 가스의 발전 단가가 원자력보다 2배 이상 높다는 점이다. 여름철 전력 수요를 줄일 수 있다면 그만큼
석유와 가스 발전을 통해 날아가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얘기다.

LG경제연구원 홍일선 선임연구원은 지난 7월 발간한 보고서에서“기존 전력 시스템이 최대 소비량에 맞춰 발전량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실시간으로 전력 소비량을 확인해 수요와
공급이 최적화되도록 조정하는 게 중요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문가들 사이에선 “스마트 그리드가 구축되면 기존보다 에너지를 대략 6% 아낄 수 있다”며“이를 한국에 적용하면 연간 1조 8000억 원의 전기료를 절약할 수 있다”라는 분석이 나온다.

비슷한 견해는 해외에서도 제기된다. 외신들은 지난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스티브 플루더 제너럴 일렉트릭(GE) 부사장의 말을 인용해“스마트 그리드를 활용하면 미국에서 41GW(기가와트,1GW=109W)의 전력을 아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형 원자력 발전소 1기의 발전량이 보통 1GW인 것으로 감안하면 스마트 그리드의 엄청난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재생에너지 확산 기반

스마트 그리드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신재생 에너지를 확산시키는 데 필수적인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스마트 그리드를 활용하면 자연 환경에 따라 발전량이 들쑥날쑥한 신재생에너지의 문제점을 완화할 수 있다. 풍력이나 태양광이풍부해 발전량이 많을 때는 전기료를 낮췄다가 발전량이 부족해지면 전기료를 올려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신재생에너지는 현재의 발전 방식과 상호 보완해 추진한다는 게 한국과 세계 각국 정부의 일반적인 방침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석탄이나 석유를 적게 태우고 반대로 바람이 약하게 불면 석탄이나 석유를 더 태우는 식으로 연결지어 일정한 발전량을 유지한다
는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 그리드가 화석 에너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가둘 수 있는 저장장치가 스마트 그리드의 일환으로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플라이휠이다.

플라이휠은 마찰이 최소화된 거대한 금속 바퀴다. 바람이나 햇볕이 한창 풍부할 때 생산한 전기로 회전한다. 바람이 안 불거나 햇볕이 가려지더라도 관성 때문에 돌던 힘을 꾸준히 유지해 지속적으로 전기를 만든다.

전기 자동차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스마트 그리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마트 그리드를 이용하면 전기 자동차를 충전하려는 수요를 적절히 분산시킬 수 있다. 전기료가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값이 싼 시간대를 골라 저렴하게 충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전력 수요 늘면 전력회사서 에어컨‘off’전문가들은 가전제품이 스마트 그리드 시대를 맞아 ‘정보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집안에서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가전제품이 인터넷을
통해 외부와 연결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부와 연결된 가전제품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조작 버튼을 전력회사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소비자의 전력 수요를‘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여름철 한낮에 전기료를 비싸게 매겨도 더위에 지친 소비자들이 에어컨을 계속 작동시킨다면 전력회사는 에어컨을 끄거나 설정 온도를 높이는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일은 가전제품을 소유한 소비자들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평소 전기료를 깎아주는 것과 같은 인센티브도 주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가 쓰는 가전제품의 사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기술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논란거리가 될 소지가 높다.

만약 이 같은 특징을 두고‘빅 브라더’시비가 일면 스마트 그리드는 정착되기도 전에 소비자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미 스마트 그리드는 가전제품 업계의 중요한 테마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최대의 가전회사 월풀은 지난 5월 스마트 그리드와 연계되는 제품을 2015년까지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가전회사들도 이 같은 대열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아 스마트 그리드의 현실화는 더욱 바짝 다가오게 됐다.

인터넷과 연결,‘태생적’ 보안 취약점

문제는 인터넷과 연결되는 스마트 그리드가 구조적으로 해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편리함을 준 반면, 보안 위협도 안긴 셈이다. 실제로 2004년 세계적인 시장조사기관인 가트너는 “전력 인프라의 핵심부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건 해커들을 불러
들이는 강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기술적 허점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보안 사고다. 전력회사 직원이 의도적으로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실수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e메일을 열어본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에도 스마트 그리드를 향한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인데다 이로 인한 산업적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싼 전기료’를 통해 가계의 형편을 개선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지지가 클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의 일상을 크게 바꿔 놓을 스마트 그리드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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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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