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기 가운데 가장 맑은 음색을 지닌 악기 중 하나인 ‘양금(洋琴)’. 잔잔한 수면에 떨어진 빗방울이 동심원의 파동을 그리며 퍼져 나가듯 양금의 청아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에 비슷한 울림을 일으킨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양금은‘서양에서 전래된 현악기’란 뜻이며, 유럽의 한자식 표기인‘구라파(歐羅巴)’에서 따다 붙여 ‘구라철사금
(區羅鐵絲琴)’으로도 불린다.
팔음(八音)분류법 중 ‘금(金)’부에 속하는 양금은 오동나무로 만든 사다리꼴 울림통에 주석과 철을 섞어 제조한 쇠줄을 얹어 만든 현악기다. 쇠줄은 대나무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비롯한 대부분의 현악기가 ‘사(絲)’부에 속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양금을 사부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양금은 명주실이 아니라 금속으로 줄을 만들기 때문에 금부로도 분류한다.
피아노의 원형 숨어 있다
얼핏 보면 양금은 국악기보다는 서양악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납작한 울림통 위에 걸쳐 있는 쇠줄을 채로 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실로폰을 연주하는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악기 중 대부분의 현악기는 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기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양금에는 아직까지 서양에서 전래될 당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양금의 음계는 국악의 12율 음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울림통에는 줄을 지탱하기 위한 괘 2개가 가로질러 놓여 있고 그 위로 길이가 서로 다른 줄 14개가 걸쳐 있다. 각 줄은 다시 가느다란 쇠줄 4개로 이뤄진다. 실제로는 총 56개의 줄이 쓰이는 셈이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민혜인 씨는 “이렇게 여러 가닥의 줄을 쓰는 이유는 양금의 작은 소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굵은 줄 한 가닥을 쓸 때보다 얇은 줄
여러 가닥을 쓸 때 더 맑은 소리가 나는 효과도 있다. 각 줄의 끝은 기타처럼 튜닝 핀에
고정돼 있어 줄을 감거나 풀어 음을 조율할수 있다.양금은 2개의 괘를 중심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에서는‘황종( 鐘, 진동수 262Hz의 도(C)보다 한 옥타브 아래의 Eb)’에서 ‘청중려(淸 呂, C보다 한 옥타브 위의 Ab)’까지 세 옥타브에 걸쳐 약 20개의 음을 낸다. 오른쪽에 있는 괘에서는 홀수 번째 줄만 연주에 쓰고, 왼쪽에 있는 괘에서는 짝수번째 줄만 사용한다.
양금을 연주할 때 쓰는 채는 바닷가에서 자라 탄력이 좋은 대나무인 ‘해죽(海竹)’을
깎아 만든다. 일반적으로 대나무는 습기를 머금었다 내뿜는 과정을 반복하면 탄력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채의 손잡이와 자루 부분은 대나무 껍질 부분만 얇게 남겨 탄력성
을 살리고 줄을 치는 머리 부분은 두껍게 만들어 무게를 싣는다. 양금은 쇠줄로 만들기 때문에 다른 국악기처럼 줄을 손으로 눌러 음높이에 변화를 주는 연주기법인 ‘농현(弄絃)’을 할 수 없다. 대신 기타에서처럼 위아래 음을 빠르게 반복해 연주하는 트레몰로 기법이 쓰인다. 재밌는 사실은 양금에 피아노의 원형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중동 지역의 전통
악기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인근에서 이슬람교 음악을 연주할 때 쓰였던‘덜시머(dulcimer)’는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를 거쳐 피아노로 발전했다. 양금과 덜시머는
형태가 거의 같은 쌍둥이 악기다. 양금 역시 피아노의 조상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홍대용, 우리 악기로 정착시켜 덜시머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십자군 원정대가 중동 지역에서 가져간 덜시머는 중세 이후에는 유럽 각국에까지 보급됐다.
중국에 덜시머를 전한 이는 바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1601년경 덜시머를 가져갔고, 중국인들은 이 악기를 양금(洋琴 또는 揚琴)이라 불렀다. 양금은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조선 실학자들은 발달된 문물을 접하기 위해 인조 15년(1637년)부터 고종 30년(1893년)까지 사신인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를 왕래하다가 영조(1694~1776년) 때 양금을 국내로 들여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계와 달라 당시에는 아무도 그 연주법과 조율법을 몰랐다.
이런 양금이 국악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천문학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천체관측장치인 혼천의를 만들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실학자 홍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닐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절대음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쓴‘열하일기’와‘연암속집’에는 1772년 6월 18일 유시(酉時, 오후 5~7
시)경에 홍대용이 지인들을 모아놓고 양금을 처음으로 연주했다고 전한다. 악보조차 없던 상황에서 홍대용이 연주법과 조율법을 스스로 터득해 연주한 것이다. 그 이후 궁중
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악원 악사들을 중심으로 양금이 크게 유행했다. 홍대용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연행사로 청나라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접한 뒤 그가 남긴 기록인 ‘을병연행록’에는 청나라에 세워진 천주당에서 처음 본 파이프오르간으로 우리 전통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한 그는 나라의 명이 있다면 파이프오르간을 그대로 제작할 수 있다는 기록도 남겼다. 19세기 들어 악보가 제작되면서 양금은 현악기로 이뤄진 합주곡(현악영산회상)과 가곡, 단소와 함께 하는 연주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특유의 맑은 소리 덕분에 창작 국악곡을 연주할 때도 많이 쓰인다. 완전한 우리 악기로 자리 매김한 것이다. 만약 홍대용이 없었다면 전통음악에서 양금의 청아한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팔음(八音)
국악기 분류법이자 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지칭하는 용어로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바가지), 토(土), 혁(革), 목(木)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법은 영조 때 편찬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고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문물을 정리한 책)’에 기록돼 있다.
(區羅鐵絲琴)’으로도 불린다.
팔음(八音)분류법 중 ‘금(金)’부에 속하는 양금은 오동나무로 만든 사다리꼴 울림통에 주석과 철을 섞어 제조한 쇠줄을 얹어 만든 현악기다. 쇠줄은 대나무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비롯한 대부분의 현악기가 ‘사(絲)’부에 속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양금을 사부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양금은 명주실이 아니라 금속으로 줄을 만들기 때문에 금부로도 분류한다.
피아노의 원형 숨어 있다
얼핏 보면 양금은 국악기보다는 서양악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납작한 울림통 위에 걸쳐 있는 쇠줄을 채로 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실로폰을 연주하는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악기 중 대부분의 현악기는 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기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양금에는 아직까지 서양에서 전래될 당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양금의 음계는 국악의 12율 음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울림통에는 줄을 지탱하기 위한 괘 2개가 가로질러 놓여 있고 그 위로 길이가 서로 다른 줄 14개가 걸쳐 있다. 각 줄은 다시 가느다란 쇠줄 4개로 이뤄진다. 실제로는 총 56개의 줄이 쓰이는 셈이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민혜인 씨는 “이렇게 여러 가닥의 줄을 쓰는 이유는 양금의 작은 소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굵은 줄 한 가닥을 쓸 때보다 얇은 줄
여러 가닥을 쓸 때 더 맑은 소리가 나는 효과도 있다. 각 줄의 끝은 기타처럼 튜닝 핀에
고정돼 있어 줄을 감거나 풀어 음을 조율할수 있다.양금은 2개의 괘를 중심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에서는‘황종( 鐘, 진동수 262Hz의 도(C)보다 한 옥타브 아래의 Eb)’에서 ‘청중려(淸 呂, C보다 한 옥타브 위의 Ab)’까지 세 옥타브에 걸쳐 약 20개의 음을 낸다. 오른쪽에 있는 괘에서는 홀수 번째 줄만 연주에 쓰고, 왼쪽에 있는 괘에서는 짝수번째 줄만 사용한다.
양금을 연주할 때 쓰는 채는 바닷가에서 자라 탄력이 좋은 대나무인 ‘해죽(海竹)’을
깎아 만든다. 일반적으로 대나무는 습기를 머금었다 내뿜는 과정을 반복하면 탄력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채의 손잡이와 자루 부분은 대나무 껍질 부분만 얇게 남겨 탄력성
을 살리고 줄을 치는 머리 부분은 두껍게 만들어 무게를 싣는다. 양금은 쇠줄로 만들기 때문에 다른 국악기처럼 줄을 손으로 눌러 음높이에 변화를 주는 연주기법인 ‘농현(弄絃)’을 할 수 없다. 대신 기타에서처럼 위아래 음을 빠르게 반복해 연주하는 트레몰로 기법이 쓰인다. 재밌는 사실은 양금에 피아노의 원형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중동 지역의 전통
악기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인근에서 이슬람교 음악을 연주할 때 쓰였던‘덜시머(dulcimer)’는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를 거쳐 피아노로 발전했다. 양금과 덜시머는
형태가 거의 같은 쌍둥이 악기다. 양금 역시 피아노의 조상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홍대용, 우리 악기로 정착시켜 덜시머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십자군 원정대가 중동 지역에서 가져간 덜시머는 중세 이후에는 유럽 각국에까지 보급됐다.
중국에 덜시머를 전한 이는 바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1601년경 덜시머를 가져갔고, 중국인들은 이 악기를 양금(洋琴 또는 揚琴)이라 불렀다. 양금은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조선 실학자들은 발달된 문물을 접하기 위해 인조 15년(1637년)부터 고종 30년(1893년)까지 사신인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를 왕래하다가 영조(1694~1776년) 때 양금을 국내로 들여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계와 달라 당시에는 아무도 그 연주법과 조율법을 몰랐다.
이런 양금이 국악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천문학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천체관측장치인 혼천의를 만들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실학자 홍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닐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절대음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쓴‘열하일기’와‘연암속집’에는 1772년 6월 18일 유시(酉時, 오후 5~7
시)경에 홍대용이 지인들을 모아놓고 양금을 처음으로 연주했다고 전한다. 악보조차 없던 상황에서 홍대용이 연주법과 조율법을 스스로 터득해 연주한 것이다. 그 이후 궁중
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악원 악사들을 중심으로 양금이 크게 유행했다. 홍대용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연행사로 청나라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접한 뒤 그가 남긴 기록인 ‘을병연행록’에는 청나라에 세워진 천주당에서 처음 본 파이프오르간으로 우리 전통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한 그는 나라의 명이 있다면 파이프오르간을 그대로 제작할 수 있다는 기록도 남겼다. 19세기 들어 악보가 제작되면서 양금은 현악기로 이뤄진 합주곡(현악영산회상)과 가곡, 단소와 함께 하는 연주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특유의 맑은 소리 덕분에 창작 국악곡을 연주할 때도 많이 쓰인다. 완전한 우리 악기로 자리 매김한 것이다. 만약 홍대용이 없었다면 전통음악에서 양금의 청아한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팔음(八音)
국악기 분류법이자 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지칭하는 용어로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바가지), 토(土), 혁(革), 목(木)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법은 영조 때 편찬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고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문물을 정리한 책)’에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