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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요? 히말라야 오르면 보입니다!”

한국 대표 산악인 엄홍길 대장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 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01×-×××-8848.

“여보세요.”

앗, 연결됐다! 수화기를 잡은 손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월간 과학동아 기자입니다. 대장님, 한번 뵙고 싶습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역시나’ 였다.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생각을 좀 해보고 다시 통화하자는 대답을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약속한 시간에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운전 중이라 얘기하기가 어렵다며 다시 통화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기다렸다. 그 몇 시간이 며칠 같았다.

세 번째 통화. 드디어 잡았다! 7월 7일 오후 3시. 주어진 시간은 단 1시간.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선 그를 만나기 위해 네팔까지 날아가야 했다는데. 1년에 절반 이상을 외국서 지내기도 한다는데. 설렘과 긴장을 안고 서울 중구 장충
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 엄홍길휴먼재단을 찾았다.

해발 3500m 마을이 영상 기온

과학기자를 하면서 산악인을 만날 기회가 그리 흔치 않을 것 같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가 최근‘기후 변화 현장 탐험가’로서 히말라야에서 직접 보고 겪은 지구온난화의 실태를 알리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
작했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였죠, 히말라야에 오르기 시작한 게. 어느 순간 산을 보니 엄청난 변화가 생겼더군요. 해가 바뀔수록 변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올 1월 엄 대장은 의료진 30여 명과 함께 네팔의 고산마을 남체바자르로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해발 3450m인 이 마을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 가는 관문이다. 엄 대장은 출발할 때만 해도 추워서 제대로 진료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눈이 너무 많이 쌓이면 마을 주민들이 진료를 받으러 오기 힘들 것도 같았다.

“그런데 웬걸요. 도착해서 보니 늦가을 날씨 같았습니다. 눈은커녕 흙먼지가 풀풀 날렸죠. 아침 기온도 3~5℃ 정도였어요. 전엔 없던 야생화까지 피어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혔어요. 남체바자르에 사는 30대 청년을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는데, 그 친구가 이런 겨울은 자기도 처음이라고 합디다.”

적설량이 적고 기온이 올라 마을 사람들은 사실 살기 편해지긴 했다. 과거엔 겨울마다 물이 꽁꽁 얼어 온 마을 사람들이 카트만두 시내로 내려갔다가 봄이 오면 다시 마을로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뜻해진 날씨 덕에 의료봉사 활동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엄 대장의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다.

“살기 좋아지긴 했지만 그건 일시적일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히말라
야의 청정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보죠. 집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이곳 사람들은 현지에서 바로 충당해요. 자연석을 깨서 벽을 만들고 창틀이나 문은 목재로 하죠. 널린 게 숲이고 나무니까요. 연료도 나무로 씁니다. 마을의 주요 수입원은 관광객과 등산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이나 요식업입니다. 이런 상업 활동이 늘수록 하수나 쓰레기도 많이 생기죠. 하수시설이 제대로 없으니 쓰레기가 계곡으로 그대로 유입될 수밖에 없어요. 이곳 주민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 급해요. 자연보호는 아직 먼 얘기죠.”



“한국 기후변화 연구는 이론뿐”

남체바자르 얘기를 꺼낸 엄 대장의 표정은 시종일관 심각했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에서 해발 8000m 이상인 봉우리 16좌(주요 봉우리 14좌 + 위성봉 2개)를 20여 년 동안 모두 올랐다. 히말라야를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그는 무엇보다 자연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산자락을 따라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고 있어요. 엄청난 양의 얼음이 한꺼번에 녹아 내려오니까 산 아래엔 홍수 피해도 잦아졌죠. 산 위에서 내려오는 수량이 많아지면서 골짜기가 깎여 나가 산사태도 일어납니다. 이런 산사태 때문에 빙하가 더 많이 녹게 되죠.”

산사태로 쓸려 내려온 돌과 모래는 산 아래쪽 빙하 위에 떨어진다. 낮에 해가 떠 있을 때 빙하를 덮은 돌과 모래는 열을 받아 뜨거워지고, 해가 져도 빨리 식지 않는다. 이 열기 때문에 밤에도 빙하는 계속해서 녹을 수밖에 없다.

이런 돌과 모래 때문에 산에 쌓여 있는 눈이 오염되기도 한다. 엄 대장은 “옛날엔 히말라야 아무 데서나 눈을 떠서 끓이면 맑고 깨끗해 바로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필터로 이물질을 한 번 걸러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엄 대장에 따르면 히말라야산맥 주변에 사는 인구는 약 11억 명. 이들은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존해 살아간다. 빙하가 녹을수록 원류도 점점 줄 것이다. 11억 인구의 젖줄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인간의 활동으로 생기는 수많은 오염물질 때

‘신의 영역’이었던 해발 수천m 히말라야 산자락에도 인간의 손길이 닿았다. 불행하게도 그 손길은 자연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인간의 짐을 나르고 있는 사진 속 동물은 야크다.

문에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제 어린아이도 다 안다.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 같은 말도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러나 엄 대장은 “그저 사진이나 데이터로만 보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건 전혀 다르다”며 일침을 놓는다. 한국 과학자들에 대해 쓴 소리를 할 땐 언성마저 약간 높아졌다.

“히말라야에선 직접 현장 탐사를 온 유럽과 미국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요. 고산지대에 의학센터를 세워 놓고 기상 변화를 관측하면서 인체생리학도 연구하죠. 한국 과학자들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이산화탄소 줄이자, 줄이자 하면 뭐 합니까? 실천을 해야죠. 이론만 박사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현장을 알아야죠.”

기후변화 전도사 자청한 탐험가

엄 대장은 청소년에게 희망을 품는다. 기성세대에게 실천과 행동을 요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며 “시험 성적이나 입시보다 환경이 우리 아이들에게 훨씬 중요한 미래”라고 강조했다.

최근 엄 대장은 히말라야에서 실제로 경험한 기후변화를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강연자로 나섰다. 또 히말라야 팡보체 마을에 초등학교도 세우는 중이다. 산간 오지의 아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보건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내년 1월 준공식이 예정돼 있다.

1시간은 말 그대로 턱없이 모자랐다. 기후변화 경험담에 이끌리다 보니 훌쩍 지나갔다. 인터뷰 전 재단 관계자가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성격”이라고 귀띔해준 게 떠올라 부랴부랴 자리를 정리했다. 사무실을 나서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 주차장으로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엄 대장의 따끔한 질책이 따라왔다.

“환경을 생각해야죠! 걸어 올라가야지, 엘리베이터는 무슨.”

웃는 표정이었지만 왠지 거스를 수가 없었다. 헉헉거리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한 번 더 되뇌었다. 8848. 엄 대장의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높이다. 기후변화의 위협이 그곳까진 닿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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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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