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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게 죽을 권리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5월 존엄사(尊嚴死)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연명치료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77세의 김옥경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2월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조직검사를 받다 출혈이 심해 뇌에 손상을 입었다. 그 결과 뇌사(뇌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회복불능 상태)에 가까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당시 할머니는 스스로 숨을 못 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병원 측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필자는 김 할머니를 두 번 직접 만났다. 한 번은 5월 20일 인공호흡기를 떼기 전에, 또 한 번은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뗀 뒤였다.

 



두 번의 만남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9층 내과 중환자실에서 처음 할머니를 봤을 때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대법원에서 이미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법원의 1심 판결문에는 기대수명이 3, 4개월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김 할머니는 여전히 여느 환자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공호흡기로 분당 12회 정도 호흡을 했다. 정상인은 18회 정도다. 가끔은 스스로 숨을 쉬기도 했다. 몸도 간혹 뒤척였다. 자발적인 동작이라기보다는 의미 없는 움직임 같다고 의료진은 말했다.

필자는 기자가 아니라 의사로서 바빈스키 검사를 해봤다. 뇌에 이상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검사다. 손가락으로 발바닥의 움푹 파인 부분에서 엄지발가락 방향으로 둥글게 긁었다. 이때 발가락들이 부챗살처럼 쫙 펴지면 뇌손상을 의심할 수 있다. 김 할머니의 발가락은 확실히 펴지진 않았지만 분명 위로 움직였다.

첫 만남 뒤 한 달이 지났다. 세브란스병원 15층 내과 병동 1인실. 21.4m2(6.5평)의 작은 공간에서 인공호흡기를 뗀 지 1시간이 지난 김 할머니를 만났다. 호흡기를 뗀 할머니는 점점 죽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린 채 혼자서 입을 벌리고 움찔움찔하면서 스스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눈을 깜박거리거나 눈동자를 돌리는 자발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눈에는 호흡기를 뗄 때 흐른 눈물이 아직 고여 있는 듯했다. 곧 사망할 것이라는 가족과 의료진의 예상과 달리 김 할머니는 끈질긴 생명을 연장해 갔다. 예상치 못했던 할머니의 상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존엄사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일었다. 현장을 취재하던 필자도 심지어 할머니가 과연 ‘존엄사’인가에 대해 의구심마저 들었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차이

김 할머니를 두고 ‘존엄사’니‘소극적 안락사’니‘연명치료 중단’이니 여전히 말들이 많다. 이들 개념은 언뜻 서로 비슷해 보인다.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존엄사는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의학적 치료를 했지만 죽음을 돌이킬 수 없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다. 남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개념이 아니다.

안락사는 불치의 중병에 걸렸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 의식이 없는 경우처럼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하는 행위다.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뉘는데, 적극적 안락사는 치사량의 약물이나 독극물을 직접 투여하는 인위적인 조치로 죽음을 앞당기는 개념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인 영양 공급이나 약물 투여를 중단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다. 안락사는 결국 자연적으로 남은 시간마저 단축하는 개념이다. 환자가 동의했는지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나뉘기도 한다.

연명치료 중단은 사망이 임박한 단계에서 인공호흡기 사용,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같은 치료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현재 김 할머니는 존엄사라기보다는 연명치료가 중단된 상태라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존엄사는 사망이라는 결과를 전제로 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병원에서 식물인간이나 뇌사처럼 소생이 불투명한 환자에 대해 연명치료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도 쉽지 않다. 자칫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의료진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하기를 꺼린다. 의사가 가족의 요구로 인공호흡기를 뗐다가 살인 방조죄로 2004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의 영향 탓이다. 물론 보라매병원 사건은 환자가 수술 뒤 2, 3일밖에 안돼 소생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 이번 김 할머니의 경우와는 다르다. 김 할머니는 수술 받은 지 6개월이 훨씬 지나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식물인간 상태였다.

상당수 대학병원은 지금까지 환자한테 ‘원할 경우 심폐소생술 같은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소생술 거부(Do Not Resuscitate, DNR) 서약’을 받아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도 했다. 이는 법적인 근거 없이 2000년대 초부터 관행적으로 시행돼 왔다.


 



의료계, 존엄사 기준 마련에 박차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라’고 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할머니의 ‘자기결정권’에 초점을 맞춘 결과다. 대법원은 가족이 진술한 할머니의 가치관, 종교관, 삶의 모습을 토대로 할머니가 인공호흡기 사용과 같은 연명치료의 중단을 원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가족의 진술을 통해 할머니의 자기결정권을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남은 문제는 할머니와 같은 환자가 또 발생했을 때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어떻게 결정하느냐다. 관행적으로 이뤄진 DNR 서약보다 확실한 근거가 필요해진 셈이다. 이에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은 연명치료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은 뇌사상태 환자와 말기 만성질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할 수 있는 진료권고안을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말기 만성질환자는 2명 이상의 의사가 모두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고 연명 가능성도 3개월 미만으로 짧다고 판단한 환자다. 이 권고안에서는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에 비춰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면 가족을 비롯한 대리인이 서명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대리인에 대한 법적 근거가 미약해 누구를 대리인으로 세우냐에 따라 연명치료 여부가 달라질 우려가 있다.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 가이드라인은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회생이 불가능한 사망 임박 단계. 뇌사 환자나 여러 부위의 장기가 손상된 환자가 해당된다. 2단계는 인공호흡이 필요한 식물인간 상태로 뇌가 심각하게 손상돼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주요 질환의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다. 3단계는 식물인간 상태이긴 하지만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환자다. 병원 측은 1, 2단계 환자는 자기결정권과 가족 동의, 병원윤리위원회 심의 조건을 충족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지만 3단계는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 법률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인공호흡기 제거 전 김 할머니는 2단계에 속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호흡기를 떼고 나서도 스스로 숨을 쉬며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3단계로 바뀌게 됐다. 앞으로 김 할머니의 상태에 따라 존엄사 논란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의료계는 대한의사협회를 주축으로 대한의학회, 병원협회, 국립암센터, 서울대병원 등이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공통의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8월 말까지는 초안을 마련하고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법조인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열어 9월께 최종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존엄사를 보는 세계 각국의 시각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개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법제화 수준은 조금씩 다르다.

 

미국에서 자발적 존엄사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1994년 오리건 주가 최초로 기록돼 있다. 오리건 주는 1997년, 워싱턴 주는 올 3월부터 ‘존엄사법’을 시행하고 있다. 일정 요건을 갖춘 말기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받아 극약을 먹고 자살하도록 허용하는 법이다. 특히 오리건 주에서는 1998년 2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암 환자가 미국 역사상 첫 합법적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존엄사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미 연방 대법원은 2006년 ‘존엄사는 각 주별로 결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현재 법률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곳은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 2곳뿐이지만, 인공호흡기 제거행위는 40개 주에서 용인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소생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 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는 ‘사망 유언’을 할 수 있다. 1993년 ‘3년 이상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경우 영양공급 장치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이 나온 뒤 존엄사가 폭넓게 인정되는 추세다. 프랑스에서는 말기 환자에게 존엄사 권리를 인정한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법안’이 2004년과 2005년 각각 하원과 상원을 통과했다.

독일의 경우 판례상으로는 10여 년 전부터 존엄사가 인정되고 있지만 법제화되진 않았다. 독일 연방법원은 ‘환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며, 환자의 의지는 신체불가침권의 표현으로 제한 없이 인정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일본은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시키는 적극적 안락사는 형법상 살인죄로 다루되,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연장수단을 제거하는 건 대체로 용인하고 있다. 후생노동성이 2006년 회복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에 대해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말기 환자 치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 이진한 기자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다. 2002년과 2003년 연속으로 대한의사협회 우수 건강 기사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대체의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건강은 습관”이라는 이 기자는 “좋은 생활습관이 수명을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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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진한 동아일보 기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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