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에는 17세기 당시 귀부인이 입었던 직금단(織金緞, 비단에 금실로 무늬를 넣어 만든 직물) 치마와 저고리가 보관돼 있다. 2007년 7월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전통적인 금장식 기법을 그대로 이용해 복원하는 데 성공한 유물이다.
이 치마와 저고리는 중요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된 ‘포도동자문 대란치마’(청주 한 씨 묘 출토)와 더불어 조선 중기 상류층 부인의 예복을 살펴볼 수 있는 몇 점 안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는 직금단 의복을 어떻게 복원했을까.
3중 구조 회격묘에서 미라와 함께 발견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는 2006년 9월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서 발견됐다. 당시 영월 신 씨 판서공파는 납골당을 조성하기 위해 문중 묘소를 이장하고 있었다. 조선 인조 때 정3품 벼슬인 통훈대부를 지낸 신은뢰의 부인 행주 기 씨의 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16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묘에서 미라와 함께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를 포함한 50여 벌의 의복이 발견됐다. 이 의복들은 무덤의 주인이 살아 있었을 때 입었던 일상복인데, 망자에게 보내는 수의와 관 속에서 시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빈 공간을 메우는 보공품(補空品)으로 구성돼 있었다.
직물로 만든 의복이 어떻게 400년 세월을 견뎌냈을까. 외부에서 습기와 공기가 침입하는 일을 막아준 회격묘(灰隔墓) 덕분이다. 회격묘는 회곽분(灰槨墳) 또는 회곽묘(灰槨墓)로도 불리며 목관·석회·흙의 3중 구조를 갖는 무덤이다.
회격묘는 우선 나무로 만든 관을 안치할 구덩이를 판 다음, 흙을 덮기 전 석회와 황토, 고운 모래를 3대 1대 1의 비율로 섞어 만든 회격을 관 밖의 6면 전체에 바르는 방식이다. 그 뒤 흙을 불룩하게 쌓는 봉토 작업을 한다.
회격이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굳으면서 관 외부를 밀봉하기 때문에 나무뿌리나 미생물은 물론 공기와 수분까지도 관 내부로 침투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 내부는 산소가 거의 사라져 시신은 썩지 않고 미라가 되며 보공품도 썩지 않고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회격묘는 조선시대 통치 이념이던 주자 성리학의 영향으로 생긴 매장 풍습이다. 주자가 유가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예법을 정리한 책인 ‘주자가례’에는 사람이 죽으면 일종의 석회인 회격으로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는 풍습이 전해진다. 이 가르침에 따라 조선 초 성리학자들은 돌로 만들어 온 석실묘를 회격묘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태조 이성계가 죽은 뒤에도 왕릉을 석실묘 대신 회격묘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 이후 회격묘는 점차 석실묘를 대체하기 시작해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대부가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행주 기 씨의 직금단 치마, 금빛 찾기까지
회격묘 덕분에 행주 기 씨의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는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랜 세월 탓에 먼지와 때가 많이 묻어 금빛은 바래 있었고 악취도 심하게 났다.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의복은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물로 세척하는 작업과 손상된 곳을 실로 깁는 작업이 필요하다.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도 금빛을 되살리기 위해서 세척 작업이 필요했지만 금실 여기저기서 금박이 떨어져 나가고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오준석 학예연구사(이하 학예사)는 “문화재 보존 연구를 먼저 시작한 서양에서도 직물로 된 유물은 처리가 까다로워 부분 세척이나 진공 흡입법과 같은 기초 처리만 하고 손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게다가 조상들이 의복을 장식하는 데 썼던 금실을 만드는 정확한 방법이 현재 전해지지 않아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를 되살리는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그래도 행주 기 씨의 묘에서 출토된 치마와 저고리에 쓰인 금실의 단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금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편금사였다. 오 학예사는 “편금사는 한지에 아교로 금박을 붙이거나 양피지에 금박을 붙인 뒤 가늘게 잘라 만든 금실”이라며 “금을 얇게 두들겨 편 뒤 잘라 만들거나 금을 길게 늘여서 뽑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직금단 치마와 저고리에 쓰인 금실은 한지에 금박을 붙여 만든 방식이었다.
금실의 또다른 종류인 연금사는 편금사를 실에 감아서 만든다. 이렇게 만든 금실은 직물의 올과 올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수놓는 데 쓰였다. 금실 대신에, 아교에 개서 만든 금박가루인 금니나 금박을 옷감 표면에 직접 붙이는 인금 방식도 쓰였다.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금으로 직물을 장식하기 시작했을까. 조상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의복을 장식하는 데 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금박이 장식된 댕기를 한 여인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진덕왕(653년)이 금박으로 장식한 옷감인 금총포(金總布)를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삼국지나 신당서, 구당서 같은 중국의 역사서에도 고구려와 부여의 지배층이 금으로 장식한 의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실 재현한 비결은 아크릴계 접착제
오 학예사팀은 직금단 치마를 되살리기 위해 먼저 편금사를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폭 0.5mm, 길이 20mm로 자른 금박을 한지에 붙이는 실험이었다. 금박을 한지에 붙이는 접착제로는 소아교와 토끼아교 같은 수용성 접착제와 파라로이드B-72 같은 아크릴계 합성접착제를 사용했다.
먼저 고농도의 소아교를 사용하자 아교가 굳으면서 금박 표면 전체가 마치 풀을 먹인 것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소아교의 유리전이온도 가 95˚C로 상온(20˚C)보다 높기 때문이
었다. 금박 표면을 소아교가 덮을 경우 금박의 색이 변하는 문제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소아교나 토끼아교를 금박에 주입할 때 금박이 순식간에 엉겨 붙는 현상이었다. 수용성 접착제에 함유된 물 분자는 전기적으로 극성을 띠는데, 물 분자가 금속결합을 하고 있는 금박과 만나면 전기적으로 중성인 금박에서 부분적으로 전하가 쏠린다.
결국 금박의 특정 부위의 금 원자는 전기적으로 양전하를 띠고 일부는 음전하를 띠며 금 원자 사이의 인력 때문에 서로 엉기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또 수용성 접착제에 함유된 물은 표면장력이 커서 접착제가 한지에 흡수되지 않고 표면에서 방울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오 학예사는 “농도를 바꿔가며 모의실험을 수백 번 한 결과 파라로이드B-72를 물에 1%로 희석한 접착제를 3회에 걸쳐 주입했을 때 접착 효과가 가장 좋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설명했다. 파라로이드B-72는 유기용제로 표면장력이 물의 3분의 1 정도로 작아 한지에 잘 스며들 뿐 아니라 물을 포함하지 않아 금박이 엉기지도 않았다. 또한 수용성 접착제는 유물을 물로 세척하는 과정에서 씻겨 나가 접착력이 떨어졌지만 파라로이드B-72는 물에 씻겨 나가지 않아 접착력도 유지됐다.
오 학예사는 “그동안 의복의 경우 손상되거나 오염이 심해 전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며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하는 기술에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화재 보존 기술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조상의 숨결을 되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