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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므리고 있던 꽃잎이 활짝 열리면 꽃 가운데에는 암술이 있고 그 주변을 수술들이 둘러싸고 있다. 수술 끝에 붙어 있는 꽃밥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꽃가루를 많이 만들어 번식할 준비를 끝낸다.

종자식물에서 꽃가루가 암술 아래에 있는 씨방에 정자를 뿌리려면 먼저 암술머리에 올라타야 한다. 바로 수분이다.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는 꽃들은 한 꽃의 꽃가루가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 붙어 수분한다. 소나무처럼 꽃마다 암수가 정해져 있거나 은행나무처럼 나무마다 암수가 정해져 있어 수분을 하려면 꽃가루가 다른 꽃이나 다른 나무까지 날아가야 하는 식물도 있다.

꽃가루는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암술머리에 도달할까. 소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식물의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또 화려하고 향긋한 꽃이 피는 식물의 꽃가루는 꽃꿀을 먹으러 찾아온 나비나 벌에 실려 이동한다.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도달하면 관을 만들어 씨방에 정자를 뿌린다. 바로 수정이다. 씨방은 자라 열매가 되고 씨방에 있는 밑씨는 자라 씨앗이 된다.

크기가 100㎛(마이크로미터, 1㎛=10-6m) 이하인 꽃가루가 꽃밥 속에 수천 개씩 들어 있지만 모두 수분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토양 입자인 실트(지름 2∼20㎛)나 점토(지름 4㎛ 이하)와 함께 바람이나 물을 타고 습한 곳으로 운반되다 퇴적돼 ‘꽃가루 화석’이 된다.



꽃가루, 수만 년간 보존되는 이유

꽃가루는 식물 중에서도 화석이 되기 가장 쉽다. 식물 기관 중에서 만들어지는 양이 가장 풍부하고 잘 보존되기 때문이다. 꽃가루나 포자의 세포벽 맨 바깥 껍질에는 ‘스포로폴레닌’(sporopollenin)이라는 단단한 물질이 들어 있다. 스포로폴레닌은 나무껍질에 들어 있는 수베린이나 큐틴과 비슷하지만 150°C의 고온도 버티고 황산, 염산에도 녹지 않을 만큼 화학적으로 안정돼 수만 년 동안 보존된다.

꽃가루 화석을 추출할 때는 습지나 호수의 퇴적층을 시추하거나 그 단면을 잘라 시료를 얻는다. 시료는 2cm 간격으로 1cm 두께의 부시료로 나눈다. 부시료는 염산(HCl)과 불산(HF) 용액에 반응시켜 석회성분과 규산성분을 모두 녹여 없애고 남은 유·무기 잔류물을 지름 10㎛의 구멍이 송송 뚫린 체로 걸러낸다. 그 뒤 꽃가루 화석만 분리해 박편(현미경으로 보기 위해 얇게 만든 시료)을 제작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한다. 꽃가루 화석은 오늘날 살고 있는 식물의 꽃가루와 형태적인 특징을 비교하고 분석해 검증한다.



식물들이 만든 꽃가루나 포자를 퇴적암에서 추출해 분석하면 그 식물이 살았던 당시의 식물군락과 기후조건을 밝혀낼 수 있다. 식물 생태에 영향을 주는 자연환경이 기온과 강수량, 그리고 토양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반도의 식생 분포도를 보면 위도와 고도에 따라 동일한 기후에 적응하는 식물이 분포한다. 보통 기후가 추워지면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번성하고 더워지면 가시나무 같은 상록활엽수가 번성한다. 이런 기후 조건은 과거 식생을 연구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또 환경에 민감한 지표식물을 이용해 과거의 기후와 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이끼나 고사리는 주로 습한 음지나 늪지에서 자라며 그 포자는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그래서 이들의 포자 화석이 발견된 퇴적층은 과거에 습한 음지나 늪지였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어떤 식물이 살았는지 생태 변화를 살펴보면 과거 기후의 변화도 알아낼 수 있다.

5000~6000년 전 중서부는 아열대기후

꽃가루 화석으로 우리나라의 과거 식생과 기후가 변화한 과정도 알 수 있을까. 학자들은 서울 청계천과 경기 파주, 하남, 평택 같은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한 6000~8000년 전의 퇴적층에서 꽃가루 화석을 추출해 분석한 결과 소나무, 자작나무(박달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느티나무 같은 낙엽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합림이 산록지대에 번성했음을 알아냈다.

오늘날 이 혼합림은 평균 기온이 4~8°C 정도인 한랭온대에서 자란다. 결국 약 6000~8000년 전의 기온은 현재보다 3~4°C 정도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때는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던 시기로 기온이 상승해 식생 변화가 심했다.

또 약 5000~6000년 전에 쌓인 퇴적층에서는 상록활엽수인 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와 낙엽활엽수인 참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버드나무, 밤나무, 개암나무, 느티나무 같은 식물의 꽃가루 화석이 나왔다. 현재 이 나무들은 평균 기온이 14°C인 제주도에서 자라고 있어 흥미롭다. 즉 당시 중서부 지역의 기온은 현재(10~11°C)보다 4°C 정도 더 높은 아열대 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기온이 떨어져 기후가 한랭 건조해지면서 상록활엽수와 낙엽활엽수는 남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약 3000년 전까지 한랭성 침엽수와 자작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하는 단조로운 식물군락이 번성했다. 현재 강원 고산지역에서 자라는 종비나무,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 같은 한랭성 침엽수와 비교해 보면 당시 기온이 현재보다 4~5°C 정도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습지퇴적층의 맨 윗부분에서 추출된 꽃가루 화석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식생 변화가 지문처럼 남아 있다. 습지에 있던 식물들은 죽으면 퇴적되고 물에 젖어 산소가 차단된 상태로 있다가 점차 마르면서 석탄과 비슷한 이탄(토탄)이 된다. 예전에 넓은 습지였던 평택에서도 4~5m 두께의 이탄층이 분포했다. 하지만 1960~1970년대 산업 발전 과정에 무수한 이탄을 화력 에너지원으로 소비했고 결국 퇴적층의 맨 위층이 없어졌다. 그래서 꽃가루 화석으로 과거 2000년 동안의 기후와 식생을 복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유적 발굴지(서울 청계천, 경기 이산포와 파주, 충북 진천)와 호수 퇴적물(충북 의림지, 강원 향호)에서 발견한 꽃가루 화석(메밀, 옥수수, 쑥, 질경이 등)을 분석해 지난 2000년간의 기후와 식생을 복원하려고 노력 중이다.

논농사, 밭농사보다 1500년 앞서

과거 어떤 식물이 살았는지 알려주는 꽃가루 화석을 분석하면 농경생활이 언제 시작됐는지도 알 수 있다. 2007년 영국 더럼대 종 용키앙 교수는 습지퇴적층에서 찾아낸 꽃가루 화석으로 논농사는 약 8000년 전 중국 양자강 하구 유역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아내 ‘네이처’에 발표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논농사와 밭농사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시작됐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논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알아내는 결정적인 증거는 꽃가루 화석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식물규소체다. 주로 벼과(科) 식물에서 볼 수 있는 식물규소체는 물에 녹아 있던 규산이 잎에 있는 세포벽에 부채 모양의 결정으로 축적된 덩어리다. 식물규소체와 꽃가루 화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논농사는 대략 3500년 전에 시작됐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을 참고하면 아열대기후는 약 5000년 전까지 계속됐고 논농사는 지금의 중국 길림 지역까지 전파됐다. 3000년 전쯤 신빙하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논농사에 적합한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했다. 또 그 시대의 지층에서 벼 이삭을 자를 때 사용했던 청동기 시대 유물인 반달돌칼과 삼각형 돌칼도 발견했다. 그때쯤 논농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는 꽃가루 화석으로 알아낸 논농사 시작 시기(약 3500년 전)와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결과다.

또 지난 2004년부터 4년 동안 경기 파주, 일산, 서울 청계천 등지에서는 밭농사의 지표식물인 메밀, 옥수수, 쑥, 질경이 등의 꽃가루 화석이 발견됐다. 이에 따르면 밭농사는 한랭 건조한 시기였던 약 2000년 전에 시작됐다. 결국 우리나라 논농사 시기가 밭농사보다 1500년 정도 앞서는 셈이다.

밭농사는 아메리카와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됐는데, 해상과 육상 교역으로 중국에 먼저 들어온 뒤 우리나라에 전파됐다. 그 예로 옥수수는 멕시코에만 있었으나 약 1500년 전 당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온 뒤 한반도로 전파됐다. 이를 토대로 밭농사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추정한 시기는 꽃가루 화석으로 알아낸 시기와 비슷하다.

지금도 기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는 꽃가루 화석을 통해 과거 온도와 강우량을 수치로 계산하는 ‘한반도형 표준 꽃가루 화석 지수’를 찾고 있다. 이것으로 과거 1만 년 동안 1000년마다 변화한 온도와 강우량을 분석해 현재와 비교할 수 있다. 앞으로 꽃가루 화석 지수가 우리나라의 기후 변화를 예측하는 기후변화모델링 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해 본다.


이상헌 연구원은 영국 셰필드대에서 꽃가루 화석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미생물학자이다. 꽃가루 화석을 이용해 동북아시아의 과거 기후변화와 식생변화, 한반도의 농경생활 시작시기와 이동경로를 연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홀로세 기후와 식생 변화를 복원하고 있다.

200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상헌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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