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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열성

적도지방에서 푸른 눈과 흰색 피부는 살아남지 못했다

향수 ‘샤넬 No.5’ 광고. 깃털로 장식된 드레스를 휘날리며 파파라치를 피해 택시에 올라타 한순간에 로드리고 산토로의 마음을 빼앗은 니콜 키드먼.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클레어 포라니의 눈길을 사로잡고 그녀가 카페를 나서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게 만든 브레드 피트.

의류 브랜드인 ‘빈폴’ 광고.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런던의 거리에서 다니엘 헤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기네스 팰트로.

이 세 할리우드 배우의 공통점을 3가지만 찾아라. 답은 모두 ‘푸른 눈’과 ‘흰 피부’를 가진 ‘금발’ 스타라는 점이다. 그런데 푸른 눈도, 눈처럼 하얀 피부도, 금발도 유전적으로는 모두 열성이다. 시인 서정주가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한 말을 빗대면 ‘이들을 세계적 스타로 키운 건 8할이 열성의 힘’인 셈이다.
 

백인과 흑인이 결혼하는 비율이 늘면서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줄고 있다.


100년 사이 푸른 눈 3분의 1로 줄어

푸른 눈이 줄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전체 미국인 중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100년 전에 비해 3분의 1 이상 줄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로욜라대 마크 그랜트 박사는 “20세기 초 미국인의 2분의 1 정도가 푸른 눈을 가졌으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미국인의 약 6분의 1만이 푸른 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백인이 황인이나 흑인과 결혼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지난 300년 동안 백인과 흑인의 유전자가 30% 정도 섞였다”고 말했다. 열성과 우성이 짝짓기를 하면 자손 대에서 갈색 눈이 겉으로 드러나고 푸른색 눈은 우성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다. 김 교수는 “이 때문에 세대를 거듭할수록 푸른 눈의 비율은 줄고 갈색 눈의 비율은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은 홍채에 분포하는 멜라닌 색소의 양에 따라 파란색, 초록색, 갈색을 띤다. 눈이나 머리 색을 결정하는 데는 보통 유전자쌍이 여러 개 관련된다.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 데는 유전자 3쌍이 관련되는데, 이 색소의 양에 따라 홍채의 색이 달라진다. 유전자는 항상 쌍으로 존재하므로, 두 유전자가 모두 우성이면 AA, 한 개만 우성이면 Aa, 모두 열성이면 aa로 표시한다.

눈 색을 결정하는 3쌍의 유전자를 ‘AABBCC’라고 하자. 유전자 A는 a에 대해, B는 b에 대해, C는 c에 대해 우성이다. 6개 중 우성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멜라닌이 많이 만들어진다. 6개의 유전자에 우성 유전자가 하나라도 끼어들면 푸른 눈이 될 수 없다. 푸른 눈이 나타나지 않을 확률은 $\frac{63}{64}$으로 거의 1에 가깝다. 하지만 푸른 눈이 나오는 경우는 오직 유전자 6개 모두가 열성일 때뿐이므로 출현 확률은 $\frac{1}{64}$(=$\frac{1}{{2}^{6}}$) 로 매우 작다. 이것이 푸른 눈이 드문 이유다.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원용진 교수는 “열성과 우성 유전자의 조합에 따라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데 작용하는 티로시나제 효소의 활성도가 달라진다”며 “우성과 열성은 해당 유전자에 관련된 효소가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하는지의 차이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우성 유전자가 있으면 효소 활성도가 높아져 멜라닌을 많이 만들고, 열성 유전자가 있으면 효소 활성도가 낮아져 멜라닌을 적게 만든다는 것이다. 유전자 6개가 조합하면 이 원리에 따라 홍채의 색이 결정된다.

미국에서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점점 줄고 있는 이유는 다른 인종과 결혼한 부모가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 우성 유전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때문이다. 부모 중 한쪽만 푸른 눈을 가지면 다른 한쪽으로부터 멜라닌을 만드는 우성 유전자가 자식에게 전달돼 자녀의 눈은 푸른색이 될 수 없다.

 

유전자형의 조합과 눈의 색
 

피부색은 햇빛에 적응한 결과

주변을 둘러보면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외국인은 있어도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한국인은 찾기 힘들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지구상의 다양한 인종은 위도에 따른 적응 반응일 뿐’이라고 말했듯이 인종에 따라 열성을 가진 비율이 다른 이유는 인간이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했기 때문이다.

원 교수는 “인종마다 열성을 가진 비율이 다른 이유는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선택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15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현생인류, 즉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을 떠나 정처 없는 여정을 시작했다. 북부지방으로 이동한 사람들 중에서는 푸른 눈과 흰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주로 살아남았다. 멜라닌은 피부 표면에 있는 색소로 자외선을 흡수해 이것이 체내로 들어가는 현상을 막는다. 멜라닌 색소의 양이 많을수록 피부색이 짙어진다.

푸른 눈과 흰색 피부는 멜라닌 색소가 적어 햇빛에 있는 자외선이 체내로 잘 흡수된다. 자외선은 체내에서 비타민D를 만들어 칼슘이 뼈로 흡수되는 현상을 돕는다. 따라서 이들은 햇빛이 약한 환경에서도 튼튼한 뼈를 가져 생존에 유리했다. 반면 갈색 눈과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고위도 지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들의 멜라닌 색소가 자외선을 거의 흡수해버려 체내에서 비타민D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이들은 뼈가 약해져 생존에 불리했다.

거꾸로 적도지방에서는 푸른 눈과 흰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살아남지 못했다. 적도 지방의 강한 햇빛에 견뎌내기엔 이들의 피부가 너무 약했다. 멜라닌 색소의 양이 적어 많은 양의 자외선이 몸속으로 바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한 햇빛을 받아 피부질환에 걸리기 일쑤였다. 갈색 눈과 짙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은 충분한 양의 멜라닌 색소가 피부를 보호했다. 한마디로 적도지방 사람들은 강한 햇빛에 적응해 살아남은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백인은 빛이 약한 극지방에 적응하기 유리했고, 흑인은 빛이 강한 적도지방에 적응하기 유리했다.

 

피하고 싶은 우성, 대머리와 육손

인간이 환경에 적응한 결과 생겨난 열성과 우성을 우리는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는가. 그윽한 눈빛에 힘을 실어주는 쌍꺼풀과 ‘살인미소’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보조개는 누구나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우성’이지만 광대뼈 위에 내려앉은 주근깨는 감추고 싶은 ‘열성’이다. 흔히 우성은 좋은 것으로, 열성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 교수는 “대머리와 육손, 새끼손가락이 약지 쪽으로 굽거나 손가락이 보통 사람보다 한마디 이상 짧은 것도 우성”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쌍꺼풀이나 보조개와는 달리 감추고 싶은 ‘비호감’ 우성이다. 반면 푸른 눈, 금발은 ‘호감’형 열성이다. 즉 우성 중에서도 피하고 싶은 것이 있고, 열성 중에서도 탐나는 것이 있다. 우성과 열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열반의 ‘우열’(優劣)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원 교수는 “열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성보다 나타날 확률이 낮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혈액형이다. 혈액형에서 AB형은 우성으로, O형은 열성으로 유전된다.

그는 “전체 한국인 중 O형은 28%인데 반해, AB형은 11%에 불과하다”며 “열성으로 유전되는 사례 가운데 많은 수가 우성보다 나타날 확률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혈액형의 예에서 보듯이 열성은 무조건 우성보다 적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육손이거나 새끼손가락이 약지 쪽으로 굽는 것도 우성이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비율이 낮다. 비록 우성으로 유전되지만 이 우성 유전자를 갖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전체 인구로 보면 육손이나 기형 새끼손가락이 나타날 확률이 아주 낮다.
 

잡종 유전자형(Tt)의 부모가 낳은 자식의 유전자형은 TT, Tt, tt 세 가지다. 유전자형이 TT면 빈혈은 없지만 말라리아에 걸리기 쉽다(01). 유전자형이 tt인 사람은 빈혈이 심해 어릴 때 죽는다(03). 유전자형이 Tt면 약한 빈혈이 있지만 말라리아가 창궐해도 감염되지 않는다(02). 아프리카 북부지방에서 최고의 배우자감은 유전자형이 Tt형인 사람이다.
환경에 적응한 결과 인종마다 피부, 눈, 머리 색이 달라졌다.

 

금발, 유럽 전역으로 퍼진 사연


배우자 선택에서 열성이 유리하게 작용할 때가 있다. 영국 세인트 앤드류대 피터 프로스트 교수는 지난해 2월 인류학 저널인 ‘진화와 인간행동’에 유럽인의 머리와 눈 색이 성 선택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빙하기 말 북부 유럽에서 금발 돌연변이가 처음 출현한 뒤 1만년 내에 금발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며 “금발이 남성을 유혹하는데 더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당시 남성은 전쟁과 사냥 때문에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았다. 따라서 남성에게 여성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남성은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여성을 선호했다. 이에 따라 ‘탐나는 열성’을 가진 여성이 1만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많은 한국 여성은 영화배우 전지현 같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갖고 싶어한다. 생머리는 곱슬머리에 대해 열성이므로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곱슬머리면 자식이 생머리를 가질 확률은 20% 이하다. 상대적으로 생머리는 곱슬머리에 비해 출현확률이 낮은 것이다. 한때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가 유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금발이나 생머리같이 매력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열성이 있다. 바로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이다. 적혈구는 원래 가운데가 볼록한 원반 모양으로 온몸으로 산소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반면 낫처럼 길쭉한 모양인 적혈구는 산소를 제대로 실어 나르지 못한다. 전체 적혈구 가운데 일부가 낫 모양인 사람은 빈혈로 고생하지만 말라리아 병원균에 저항성을 갖는 장점도 있다.

낫처럼 길쭉한 모양의 적혈구는 외부 물질이 적혈구 세포막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 이 때문에 말라리아 병원균이 적혈구 속으로 침입할 수 없다. 따라서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앓는 사람은 말라리아가 창궐해도 살아 남을 수 있다. 아프리카 중북부 지방에서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 환자를 배우자로 선호하는 이유다.

아프리카 중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앓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열성은 성 선택에서 유리한 것부터 생존의 문제까지 연결된다. 프로스트 교수는 “푸른 눈과 금발, 생머리 같은 열성은 대부분 우성보다 낮은 비율로 나타나지만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런 열성을 탐내는 한 말이다.
 

1만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금발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금발인 부모가 낳은 자식은 금발일 확률이 높다.
 

열성
잡종 유전자형(Tt)의 부모가 낳은 자식에게 나타나지 않는 형질. 금발, 생머리, 외꺼풀, 푸른 눈은 열성으로 유전된다.

우성
잡종 유전자형(Tt)의 부모가 낳은 자식에게 나타나는 형질. 검은색 머리, 곱슬머리, 쌍꺼풀, 갈색 눈은 우성으로 유전된다.

유전자형의 조합과 눈의 색
눈은 홍채에 분포하는 멜라닌 색소의 양에 따라 갈색, 초록색, 파란색을 띤다.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데는 유전자 3쌍이 관련돼 있다. 이 3쌍의 유전자 조합에 따라 6종류의 눈 색이 만들어진다

200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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