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호랑이 없는 한반도는 담비가 王







호랑이가 없는 숲, 담비가 왕 됐다
지금 호랑이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담비가 생태계 최고 포식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담비가 호랑이처럼 다 큰 멧돼지를 사냥하지는 못하지만 고라니, 노루, 어린 멧돼지를 직접 사냥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표범이나 스라소니가 했던 최고 포식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본래 고라니나 노루같은 대형 초식동물은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대형 맹수의 사냥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맹수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대형 초식동물을 직접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은 담비가 유일합니다. 담비와 체구가 비슷한 육식동물인 삵, 너구리, 오소리는 들쥐, 새, 뱀, 개구리와 같은 작은 동물과 고라니와 새끼 노루 정도를 사냥할 뿐입니다.

담비가 자신보다 다섯 배나 큰 고라니와 노루를 사냥할 수 있는 비법이 궁금해집니다. 담비의 사냥 비법은 바로 ‘협동’입니다. 보통 2~3마리가, 많게는 6마리가 함께 다닙니다. 담비는 매우 영리하고 특정 장소를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고라니가 낮에 쉬고 있을 만한 장소를 기억하고 찾아다닙니다. 쉬고 있던 고라니를 발견하면 한 마리는 고라니의 뒤를 쫓아갑니다. 고라니는 따라오는 담비가 자신을 물지 못하도록 갈지자(之)를 그리며 달아납니다. 이 때 또다른 담비가 지름길로 고라니를 따라잡아 덮칩니다. 무리가 커서 또다른 담비가 있다면 한 마리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얼굴을 물어서 고라니가 앞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달아나는 데 실패한 고라니가 주저앉으면 담비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지요. 혼자서 생활하는 삵이나 오소리, 암수 쌍을 이루지만 날렵하지 못한 너구리는 흉내낼 수도 없는 사냥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한국 담비
담비는 전세계에 아종을 포함해 8종이 있는데요, 우리나라(남한)에는 단 한 종의 담비(Martes flavigula)가 살고 있습니다. 머리, 다리, 엉덩이, 꼬리는 검은색이며, 등과 옆구리는 노란색이고, 아래턱과 배는 흰색에 가까워 다른 동물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색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희고 노란 털 덕분에 ‘대륙목도리담비’ 또는 ‘노랑목도리담비’라고도 불립니다. 인도, 대만,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에서도 살고 있습니다. 다른 담비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담비는 나무를 잘 타고 날렵해 사냥을 잘 합니다. 게다가 전체 담비 중에서 몸집이 가장 크고, 나무 열매도 많이 먹는 잡식성입니다.

담비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꼬리입니다. 몸길이가 1m인데 꼬리가 40cm가 넘습니다. 담비는 이 꼬리를 이용해 나뭇가지 위에서 중심을 잡습니다. 마치 서커스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긴 장대를 가지고 중심을 잡는 것과 비슷하지요.

날랜 몸으로 나무까지 잘 타는 담비가 호랑이를 대신해 숲의 제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무리까지 이루지요. 담비 한 무리는 어미와 새끼로 이루어집니다. 새끼라고 무시하면 큰일납니다. 어미가 4월에 1~3마리(보통은 2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9월이면 새끼몸집이 어미만큼 커집니다. 이때부터 어미와 새끼가 무리를 이뤄 함께 돌아다닙니다. 겨울 내내 어미로부터 사냥 기술을 배우고, 돕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어미가 다른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어미를 떠나서 멀리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갑니다. 반면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시기를 제외하면 일 년 내내 2~3마리가 함께 무리를 이루고 다닙니다. 이들 수컷 무리는 가끔 어미·새끼 무리들과 힘을 합해 더 큰 무리를 만들어 사냥을 다니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포유동물은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지만 담비는 활동의 92.7%를 아침 6시부터 오후 7시 사이에 하는 주행성입니다. 담비 먹이의 절반이 다래, 머루, 으름, 감과 같은 과일이기 때문이거든요. 담비의 배설물을 분석해 보면 동물성 먹이가 50.6%, 식물성이 49.4%로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그만큼 나무 열매를 많이 먹는데, 높은 나무 위의 잘 익은 과일을 찾고 고르는 일이 어두운 밤보다는 낮에 훨씬 쉽습니다. 게다가 담비가 사냥하기 좋아하는 멧토끼, 고라니와 같은 동물들이 낮에는 덤불에 몸을 숨기고 누워 쉬기 때문에 몰래 찾아가 덮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동물성과 식물성 먹이를 반씩 섞어 먹는 것을 보면 담비는 타고난 미식가로 보입니다. 동물성의 경우 포유류가 29.1%, 조류 11.7%, 꿀 6.2%, 곤충 2.4%, 양서류와 파충류가 1.1%를 차지하였으며, 식물성은 다래, 머루, 으름, 버찌, 감, 고욤 등의 과일을 먹고 지내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담비가 꿀, 다래, 머루, 감과 같이 사람들도 매우 좋아하는 것들을 먹이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담비와 덩치가 비슷한 너구리, 삵, 오소리 등의 야생동물이 쥐, 지렁이, 딱정벌레와 같은 작은 동물들을 주로 먹고 사는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처럼 맛있고 몸에 좋은 먹이를 찾아 다니기 위해서일까요? 담비는 다른 동물에 비해 행동권이 수십 배로 넓습니다.

국립환경과학원 과학자들이 담비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전파발신기를 이용해 지리산과 속리산에서 연구한 결과, 담비는 22.3~59.1km2의 넓은 행동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약 56km2)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정도입니다. 행동권은 동물이 잠자리, 쉼터, 먹이터, 새끼를 키우는 굴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 안에서만 살아가도 불편함이 없는 면적의 크기입니다. 다른 동물은 행동권이 몇 km2정도 밖에 안됩니다. 멧돼지 5.1km2, 삵 3.7km2, 오소리 1.2km2, 너구리 0.8km2에 불과하니 담비는 어마어마한 넓이를 행동권으로 삼는 셈입니다. 게다가 봄철에 어미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삶터를 찾을 때는 40km도 넘게 이동한답니다.


 


생태계 건강, 담비가 해결사될까
요즘에 뉴스를 보면 멧돼지의 숫자가 늘어나서 도시에도 출몰하고 농촌에서는 벼와 옥수수와 같은 농작물에 피해를 많이 줘 농민들의 원망을 많이 사기도 합니다. 멧돼지가 늘어난 것은 멧돼지를 잡아먹는 포식자인 호랑이나 표범 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담비가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 등극한 지금,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또 담비가 있기 때문에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대형 육식동물이 없어도 우리나라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담비가 고라니와 어린 멧돼지를 사냥하며 생태계를 일부 조절할 수 있지만, 혼자만으로는 힘이 듭니다. 담비 한 무리는 일 년에 다 큰 고라니와 어린 멧돼지를 9마리 정도 사냥합니다. 반면에 표범 한 마리는 1년에 약 40마리의 고라니와 노루를 사냥하고, 호랑이는 몸무게가 100kg가 넘는 어른 멧돼지 40마리를 잡아 먹습니다. 물론 담비 수가 표범이나 호랑이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담비가 잡아먹는 고라니나 멧돼지의 수가 표범이나 호랑이가 잡아먹은 것보다도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담비가 감당할 수 있는 사냥감은 새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담비뿐만 아니라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대형 맹수가 함께 살아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수렵 등을 통해 인간이 이들의 역할을 대신 해줘야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적절하게 유지될 수 있답니다.

그렇다고 담비가 전체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담비의 행동권을 보호하면 행동권 안에서 살아가는 멧돼지, 삵, 오소리, 다람쥐와 같이 행동권이 작은 다른 야생동물 역시 함께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담비가 펼쳐주는 큰 우산 아래에서 다른 동물들이 함께 비를 피하는 것과 같은데요. 이처럼 큰 우산의 역할을 하는 동물을 우산종(umbrella species)라고 합니다. 즉, 담비는 우리나라의 다른 야생동물도 함께 지켜주는 훌륭한 우산종입니다.

현재 담비는 국립공원이나 백두대간 산줄기처럼 큰 산과 넓은 면적의 숲이 남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넓은 행동권을 갖기 위해서는 당연한 결과지요. 그러나 행동권이 넓기 때문에 도로와 밀렵에 매우 취약합니다. 넓은 면적을 돌아다니면 많은 도로를 건너야 하며, 훨씬 많은 밀렵꾼과 마주치게 됩니다. 따라서 담비가 안전하게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도로 위에 생태통로를 많이 설치하고, 담비가 사는 지역에는 새로운 도로를 무분별하게 내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밀렵꾼이 올무나 덫을 놓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렇다면 언젠가 우리 주변에서도 담비와 담비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다른 동물이 함께 있는 건강한 자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201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오가희 | 글 최태영 기자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도시·지역·지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