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팔음(八音)에 해당하는 악기의 소리는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www.dongaScience.com/DS)
에서 감상할 수 있다.
꽹과리와 북, 장구, 소고 같은 타악기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소리가 무채색이라고 한다면, 태평소(太平簫)의 구성진 가락과 농음 이 더해지면 유채색으로 변한다고 할까. 태평소는 신명나는 농악놀이에 감칠맛을 더한다. 팔음 분류법 가운데 ‘목’(木)부에 속하는 태평소는 농악이나 탈춤, 굿, 불교의식인 재(齋), 무용 반주 등에 널리 쓰이며 현재 대표적인 향토악기로 불린다. 하지만 본래 태평소는 화란(禍亂)이나 질병을 물리치고 풍년이 드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기원하는 의식에 쓰이던 악기였다.
조선시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거나 군영의 총대장이 출입할 때 연주됐던 군악(軍樂) ‘대취타’(大吹打)에서 태평소는 홀로 선율을 담당했다.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에서도 태평소는 중요한 악기로 쓰였다.
왜병 물리친 ‘오랑캐 피리’
국악기 가운데 태평소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악기가 또 있을까. 태평소는 쇄납 또는 새납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태평소의 기원이 되는 ‘스루나이’란 악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중동과 서인도 지역에서 쓰였던 관악기인 스루나이가 중국에 전해지며 중국인들은 이 악기를 ‘쏘나’라고 부르며 쇄납(??) 또는 소이나(蘇爾奈)라 적었다. 그런데태평소를 받아들인 것은 한족(漢族)이 아닌 변방의 이민족인 회족(回族)이었기에 태평소는 ‘호
적’(胡笛, 오랑캐의 피리라는 뜻)으로도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전해졌을까. 태평소는 유목민족인 몽골인이 세운 원(元)나라에서 고려 말기에 전해졌으며 이때 호적이란 이름도 함께 들어왔다. ‘악학궤범’은 태평소를 우리 고유의 악기( 향악기 )가 아닌 중국에서 전해진 ‘ 당악기 ’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태평소는 우리말 표기법은 같지만 한자표기가 다른 ‘호적(號笛)’이라고도 불렸다. 국악기 가운데 가장 큰 음량을 가진 태평소는 먼 거리에 있는 부대원에게 신호를 보낼 때 쓰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은 조선시대 야사를 정리한 책인 ‘연려실기술’에서 태평소로 왜병을 물리친 일화를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는 태평소를 불 줄 아는 이들을 뽑아 붉은 옷을 입힌 뒤 왜병이 나타나면 산꼭대기에서 태평소를 불게 했다. 사방에서 갑자기 울려 퍼지는 태평소 소리에 왜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곽재우가 의병을 이끌고 나가 왜병을 물리쳤다. 이로써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날아갈 듯 가벼우면서도 애절한 음색 때문에 민간에서는 ‘날라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태평소의 애절하면서도 신명나는 독특한 음색에 현란한 가락이 더해져 최근에는 태평소 시나위라는 새로운 독주곡 장르도 생겼다.
‘서’와 ‘동팔랑’이 만드는 맑고 시원한 소리
태평소는 몸통 부분인 관대를 대추나무나 뽕나무로 만들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름이 점점 커지는 원뿔 모양이다. 관대 위쪽에는 마우스피스 역할을 하는 ‘서’를 꽂아 사용하는데, 서는 갈대를 잘라 납작하게 만든 뒤 두 겹을 겹친 형태의 ‘겹서’다. 태평소의 맑고 애절한 소리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악기가 맑은 소리를 내려면 불규칙한 파동 중에서 특정 진동수를 갖는 파동을 걸러내야 하는데, 서가 그 역할을 한다. 파형이 불규칙한 파동이 모이면 귀에는 바람소리처럼 잡음으로 들린다. 숭실대 배명진 교수는 “바람을 ‘후’하고 불면 그 속에는 여러 진동수의 파동이 뒤섞여 있다”며 “이를 백색잡음이라 하는데 서는 불규칙한 파동 중 특정 진동수의 파동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관대 끝에는 놋쇠나 구리, 주석으로 만든 나팔모양의 ‘동팔랑’이 있다. 태평소의 소리가 큰 이유는 바로 동팔랑 덕분이다. 동팔랑은 같은 진동수를 갖는 파동을 중첩시켜 소리를 크게 하는 공명현상을 일으킨다. 국악기 중 태평소처럼 울림통 역할을 하는 장치를 가진 악기는 거의 없다.
대대로 태평소는 구전방식으로 피리 연주자들에게 전해져 왔다. 운지법이나 서를 이용해 부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악학궤범에도 ‘태평소의 음역이 향피리와 같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태평소는 초기 형태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피리연주자 정운종 씨는 “태평소는 향피리가 아니라 당피리와 운지법과 악기 형태가 비슷하다”며 “연주에 자주 사용하는 음역이 향피리와는 서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향피리는 첫 번째 지공이 관대 아래쪽에 있지만 당피리와 태평소는 두 번째 지공이 관대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향피리는 한 옥타브 반 정도 음역을 사용하지만 태평소는 배중려에서 청중려까지 2옥타브에 걸쳐 좀 더 높은 음역까지 사용한다
(접두사 ‘배’는 가장 낮은 옥타브를, 접두사 ‘청’은 가장 높은 옥타브를 나타낸다).
피리는 음높이에 따라 입술로 서를 누르는 세기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태평소보다 불
기 어려운 측면도 있어 피리를 먼저 배운 뒤 태평소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모두에게 알리는 동시에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악기 태평소. 태평소는 그 이름처럼 때로는 왜병을 물리치고, 때로는 농악 판에서 백성들의 신명을 돋우며 태평성대를 부르는 악기였다.
팔음(八音)에 해당하는 악기의 소리는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www.dongaScience.com/DS)
에서 감상할 수 있다.
꽹과리와 북, 장구, 소고 같은 타악기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소리가 무채색이라고 한다면, 태평소(太平簫)의 구성진 가락과 농음 이 더해지면 유채색으로 변한다고 할까. 태평소는 신명나는 농악놀이에 감칠맛을 더한다. 팔음 분류법 가운데 ‘목’(木)부에 속하는 태평소는 농악이나 탈춤, 굿, 불교의식인 재(齋), 무용 반주 등에 널리 쓰이며 현재 대표적인 향토악기로 불린다. 하지만 본래 태평소는 화란(禍亂)이나 질병을 물리치고 풍년이 드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기원하는 의식에 쓰이던 악기였다.
조선시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거나 군영의 총대장이 출입할 때 연주됐던 군악(軍樂) ‘대취타’(大吹打)에서 태평소는 홀로 선율을 담당했다.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에서도 태평소는 중요한 악기로 쓰였다.
왜병 물리친 ‘오랑캐 피리’
국악기 가운데 태평소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악기가 또 있을까. 태평소는 쇄납 또는 새납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태평소의 기원이 되는 ‘스루나이’란 악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중동과 서인도 지역에서 쓰였던 관악기인 스루나이가 중국에 전해지며 중국인들은 이 악기를 ‘쏘나’라고 부르며 쇄납(??) 또는 소이나(蘇爾奈)라 적었다. 그런데태평소를 받아들인 것은 한족(漢族)이 아닌 변방의 이민족인 회족(回族)이었기에 태평소는 ‘호
적’(胡笛, 오랑캐의 피리라는 뜻)으로도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전해졌을까. 태평소는 유목민족인 몽골인이 세운 원(元)나라에서 고려 말기에 전해졌으며 이때 호적이란 이름도 함께 들어왔다. ‘악학궤범’은 태평소를 우리 고유의 악기( 향악기 )가 아닌 중국에서 전해진 ‘ 당악기 ’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태평소는 우리말 표기법은 같지만 한자표기가 다른 ‘호적(號笛)’이라고도 불렸다. 국악기 가운데 가장 큰 음량을 가진 태평소는 먼 거리에 있는 부대원에게 신호를 보낼 때 쓰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은 조선시대 야사를 정리한 책인 ‘연려실기술’에서 태평소로 왜병을 물리친 일화를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는 태평소를 불 줄 아는 이들을 뽑아 붉은 옷을 입힌 뒤 왜병이 나타나면 산꼭대기에서 태평소를 불게 했다. 사방에서 갑자기 울려 퍼지는 태평소 소리에 왜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곽재우가 의병을 이끌고 나가 왜병을 물리쳤다. 이로써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날아갈 듯 가벼우면서도 애절한 음색 때문에 민간에서는 ‘날라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태평소의 애절하면서도 신명나는 독특한 음색에 현란한 가락이 더해져 최근에는 태평소 시나위라는 새로운 독주곡 장르도 생겼다.
‘서’와 ‘동팔랑’이 만드는 맑고 시원한 소리
태평소는 몸통 부분인 관대를 대추나무나 뽕나무로 만들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름이 점점 커지는 원뿔 모양이다. 관대 위쪽에는 마우스피스 역할을 하는 ‘서’를 꽂아 사용하는데, 서는 갈대를 잘라 납작하게 만든 뒤 두 겹을 겹친 형태의 ‘겹서’다. 태평소의 맑고 애절한 소리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악기가 맑은 소리를 내려면 불규칙한 파동 중에서 특정 진동수를 갖는 파동을 걸러내야 하는데, 서가 그 역할을 한다. 파형이 불규칙한 파동이 모이면 귀에는 바람소리처럼 잡음으로 들린다. 숭실대 배명진 교수는 “바람을 ‘후’하고 불면 그 속에는 여러 진동수의 파동이 뒤섞여 있다”며 “이를 백색잡음이라 하는데 서는 불규칙한 파동 중 특정 진동수의 파동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관대 끝에는 놋쇠나 구리, 주석으로 만든 나팔모양의 ‘동팔랑’이 있다. 태평소의 소리가 큰 이유는 바로 동팔랑 덕분이다. 동팔랑은 같은 진동수를 갖는 파동을 중첩시켜 소리를 크게 하는 공명현상을 일으킨다. 국악기 중 태평소처럼 울림통 역할을 하는 장치를 가진 악기는 거의 없다.
대대로 태평소는 구전방식으로 피리 연주자들에게 전해져 왔다. 운지법이나 서를 이용해 부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악학궤범에도 ‘태평소의 음역이 향피리와 같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태평소는 초기 형태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피리연주자 정운종 씨는 “태평소는 향피리가 아니라 당피리와 운지법과 악기 형태가 비슷하다”며 “연주에 자주 사용하는 음역이 향피리와는 서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향피리는 첫 번째 지공이 관대 아래쪽에 있지만 당피리와 태평소는 두 번째 지공이 관대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향피리는 한 옥타브 반 정도 음역을 사용하지만 태평소는 배중려에서 청중려까지 2옥타브에 걸쳐 좀 더 높은 음역까지 사용한다
(접두사 ‘배’는 가장 낮은 옥타브를, 접두사 ‘청’은 가장 높은 옥타브를 나타낸다).
피리는 음높이에 따라 입술로 서를 누르는 세기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태평소보다 불
기 어려운 측면도 있어 피리를 먼저 배운 뒤 태평소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모두에게 알리는 동시에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악기 태평소. 태평소는 그 이름처럼 때로는 왜병을 물리치고, 때로는 농악 판에서 백성들의 신명을 돋우며 태평성대를 부르는 악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