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콘크리트학회가 주는 2009년 최우수논문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서울대 건축학과 박홍근 교수. 박 교수가 받은 이 상은 토목공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만큼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다.
전 세계 21개국의 콘크리트 구조설계 기준을 제정하는 미국 콘크리트학회는 현재 108개국에서 2만여 명의 연구자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매머드급 규모다.
올해 5월 초 그의 연구실에서 만난 박 교수에게 “이번 논문이 일반인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섬유보강 콘크리트 보에 대한 변형도 기반 전단 강도 모델 개발’이라는, 이해하기 녹록지 않은 제목에 대한 ‘보통 사람’의 어깃장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명확하게 보통 사람을 향해 있었다.
“철근을 집어넣지 않아도 충분히 튼튼한 콘크리트를 만드는 기술입니다. 더 낮은 비용으로 더 안전한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방법을 제시한 거죠. 격렬한 지진 속에서 좀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올해로 12년째 서울대에 재직 중인 박 교수의 연구 분야는 건축 구조다. 그가 이끄는 건축구조시스템연구실에서 ‘안전성’을 토픽 중 하나로 삼는 이유다. 연구 대상이 되는 재료는 콘크리트와 강재(鋼材)다.
철근 대신 섬유 섞은 콘크리트
그가 논문에서 제안한 방법은 건물의 기본 구조를 뒤바꿀 만큼 혁신적이다. 핵심은 철근 콘크리트에 철근 대신 섬유를 넣는 것. 현재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철근을 세운 뒤 주위에 거푸집을 만든다. 그리고 거푸집 속에 콘크리트를 부은 뒤 굳기를 기다린다. 거푸집을 제거하면 건물의 뼈대가 완성된다.
콘크리트 속에 철근을 넣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멘트, 모래, 자갈에 물을 개서 만드는 콘크리트는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힘, 즉 인장력에 취약하다. 콘크리트만 사용해 건물을 짓는다면 지진과 같은 충격에 여지없이 붕괴된다. 이 약점을 보강하려고 콘크리트 속에 집어넣는 게 바로 철근인데, 이번 논문은 철근 대신에 섬유를 넣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박 교수는 “이 기술의 원리는 우리 조상들이 한옥의 벽 재료로 쓰던 진흙에 볏짚을 섞던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허술해 보이는 한옥의 벽이 세찬 비바람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은 것은 볏짚으로 인해 인장에 견디는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 상을 받은 논문의 공동 저자 가운데 주저자는 원광대 토목환경도시공학부 최경규 교수다. 그런데 최 교수와 박호근 교수의 인연이 흥미롭다. 1997년 서울대에 부임한 박 교수는 그동안 박사 4명을 키워냈다. 그 가운데 3명이 현재 교수다. 그리고 3명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최 교수인 것이다.
“이 논문은 최 교수가 자신이 쓴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작성한 것이었어요. 박사후과정을 위해 건너갔던 미국 미시건대의 지도 교수와 함께 모두 세 명의 이름으로 제출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이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죠.”
박 교수는 자신의 제자가 주도해 받은 이번 상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전에도 한국인 가운데 이 상을 받은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모두 연구의 터전은 외국이었다. 연구자가 한국인이긴 했지만 연구의 성과는 한국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연구 결과를 수출한 셈입니다. 특히 외국 대학이 아니라 서울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학생이 만든 연구 성과가 이렇게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제2의 삼풍백화점’ 사고 막는다
박 교수가 지금까지 일군 성과는 이외에도 많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건축 방식 가운데 하나인 무량판 구조의 안전성을 강화한 연구 결과다. 무량판 구조는 기둥에 보를 얹지 않고 직접 상판을 올리는 공법이다. 실내 높낮이를 조절하기 쉬워 인기가 많지만 건물을 지지해 줄 보가 없어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상판이 내려앉아 기둥에 뚫릴 수 있다. 1995년 6월 29일 붕괴돼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낸 삼풍백화점이 바로 무량판 구조였다.
“상판 안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철근을 넣어 줍니다. 이를 가리켜 라티스 철근이라고 하죠. 건물의 강도가 높아져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박 교수는 이 기술을 2000년대 초반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기술 사용료를 받을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기술 사용료에 욕심을 내는 순간 신기술의 확산 속도가 느려질 것 같아서였다. 안전성을 높이는 기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면 무엇보다 확산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에도 유사한 효과를 내는 기술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그 기술을 쓰려면 비싼 기술 사용료를 내야 하죠. 제가 만든 기술이 로열티를 대체하고 안전성을 높이는 데 널리 활용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먼 미래 아닌 현재에 충실해야
인정받는 학자가 된 비결을 물었다. 박 교수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비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하루하루에 충실했다고 설명했다.
“장래에 대한 고민이요? 물론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만든 원대한 꿈을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과 연계 짓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에요. 매일 일상에 충실하면서 실력을 쌓아가는 게 훨씬 생산적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는 그동안 주위를 관찰한 결과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대부분이 성공 확률을 높인다며 이 일 저 일 전전하는 특징을 보였다고 말했다. 학교든 회사든 한 군데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지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을 찾는 행동이 오히려 실패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도 좋은 학자, 좋은 기술인, 좋은 기업가는 적어도 20년 이상 한 우물을 판 사람들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앞으로 그는 이 분야의 최고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수준 높은 교육 여건을 만들어서 세계 최고 엔지니어와 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긴다.
“앞으로는 친환경 연구에도 박차를 가할 겁니다. 콘크리트와 강재를 만드는 데 드는 에너지를 줄여 결과적으로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감소시키는 거죠. 앞으로도 건축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 제가 가진 역량을 쏟아 부을 겁니다.”
고수의 비법전수
장래 계획을 세울 때, 적게 노력해도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를 찾겠다고 생각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수확을 거둔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