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따다다다, 딱따다다다…”
입구에 들어서자 딱따구리 떼가 한 나무에 모여 신나게 기둥을 쪼아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오는 6월 30일까지 ‘세밀화, 과학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전시회가 열리는 인천 서구 국립생물자원관 특별전시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 받은 인상이다. ‘한국의 딱따구리’(정용훈)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한국 자생생물 세밀화 공모전’ 제1회(2006년) 대상작이다.
“국내에 사는 큰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까막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크낙새, 쇠딱따구리가 한 데 모인 모습을 그린 세밀화죠. 6종의 딱따구리가 금방이라도 일제히 나무를 쪼려는 기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국립생물자원관 이병윤 연구관과 유영남 박제사가 함께 작품 설명을 내놓는다. 유 박제사는 “국내에는 이 6종 외에 붉은배오색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쇠오색딱따구리가 산다”며 “딱따구리는 진이 많지 않고 속이 빈 참나무류와 밤나무가 많은 산림에 서식한다”고 덧붙였다.
이곳 특별전시실에는 ‘한국 자생생물 세밀화 공모전’ 역대 수상작이 가득하다. 동식물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해 그 특징을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내는 세밀화의 세계에 빠져보자.
추위 막는 잔털에서 수술 개수까지 표현
“북슬북슬한 털, 타원형 홍채, 뒤로 휘어진 뿔, 아래로 늘어진 꼬리 같은 산양의 전체적 특징을 잘 표현했어요. 특히 추위를 막는 잔털까지 어깨뼈인 견갑골과 다리뼈인 대퇴골과 같은 방향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죠.”
이번에는‘한국 자생생물 세밀화 공모전’ 제2회(2007년) 대상작인 ‘산양’을 놓고 찬사가 이어졌다. 멸종위기종인 산양을 담은 이 그림은 야생동물연구가 최현명 씨의 작품이다. 최 씨는 “야생 산양 사진 수십 장을 검토해 보름간 겨울 산양의 모습을 그렸다”며 “추운 한겨울 산양은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어 파카를 입은 것 같다”고 밝혔다. 한국 산양은 동남아시아까지 사는 종의 북방아종이다.
“현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야생동물 조사사업에 참여하며 틈틈이 세밀화를 그리고 있어요.” 그는 충남 청양 백마강 지류인 지천에서 고립된 수달을 확인했고 서울 난지도 쓰레기장과 강서습지생태공원에서는 환경부 지정 2급 멸종위기종인 살쾡이를 각각 발견했다. “이들은 환경이 좋아서 생겼다기보다 기존에 서식했는데 모르다가 최근 조사에서 확인한 것이죠. 야생동물이 대도시 주변에는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는 “특히 강서습지생태공원에 서식하던 살쾡이 수컷은 얼마 전 로드킬을 당해 김포 쪽에서 다른 수컷이 남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그는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꾸준히 독학으로 그림 실력을 닦았다. 2007년 1월에는 자신이 그린 세밀화를 담은 ‘야생동물 흔적도감’이란 단행본도 내놓았다. 요즘은 강원도 화천군 민통선 내부에서 천연기념물이자 1급 멸종위기종인 사향노루를 촬영하려고 노력 중이다.
지난해에 열린 제3회 ‘한국 자생생물 세밀화 공모전’의 대상은 동물이 아닌 식물에 돌아갔다. 서울대 미대에 다니는 이주영 씨가 그린 ‘두메부추’다. “두메부추(Allium senescens)는 양파와 비슷하게 매운 향이 강하다”는 이 연구관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특유의 매운 향이 코를 찌르는 것 같다. 꽃과 열매 자체뿐 아니라 꽃 피는 모습도 세밀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특히 수술이 6개 그려져 있어 수술 개수가 3의 배수라는 백합과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디자인 전공인 이 씨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어머니 친구인 동덕여대 구지연 교수한테 식물세밀화를 배웠는데, 그러다가 정밀하게 묘사하는 세밀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구 교수는 원래 전공이 동양화였지만 뉴욕식물원에서 식물세밀화(botanical art)를 공부했으며 1999년 ‘아트 인 사이언스’ 국제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한국식물세밀화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년 전시회를 개최하며 국내에 식물세밀화를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씨는 “학교에 연구용이나 관상용으로 자라고 있는 자생식물 덕을 많이 봤다”며 “재작년부터 매미꽃, 두메부추 등을 스케치하고 식물체를 채집해 현미경으로 암술과 수술 구조도 관찰했다”고 밝혔다. 그는 제2회 공모전에서 국내에 자생하는 희귀식물인 ‘매미꽃’을 그린 작품으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디자인을 배워서 그런지 남들보다 빨리 그려요. 보통 한 달 걸려 한 작품을 그리는데, 매미꽃은 2주 만에 완성했죠. 국내에서 대상까지 받았으니 이제 세밀화 국제대회(헌트 전)에 도전하고 싶어요.”
펜으로 그린 학술묘사
특별전시실에는 대상작 이외에도 눈에 띄는 작품이 많다. 당장이라도 굵은 뒷다리로 폴짝 뛰어오를 것 같은 ‘계곡산개구리’(박형진), 메뚜깃과 곤충으로 팥밭에서 산다고 해 그 이름이 붙은 ‘팥중이’(정재국),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이를 움켜쥔 ‘송골매어린새’(이우만), 줄기를 꺾으면 액이 나오는 덩굴성 식물인 ‘박주가리’(신혜우) 등이 돋보인다.
“송골매어린새는 털갈이를 시작해 2년생 성조로 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랍니다. 여기 회색 털이 성조의 특징이거든요. 또 박주가리에는 뿌리가 시들어가는 모습부터 줄기에서 액이 나오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죠.”
컬러가 돋보이는 작품들의 한쪽에는 채색하지 않은 채 펜으로 그린 그림도 있다. 이른바 ‘학술묘사’(scientific drawing) 작품이다. ‘한국 자생생물 세밀화 공모전’은 3회부터 학술묘사 작품을 따로 심사했는데, 정인영 씨의 ‘참작약’이 학술묘사 부문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미술 전공인 정 씨는 아버지(안동대 생약자원학전공 정형진 교수)의 학과 동료한테 추천을 받아 식물세밀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부터는 국립수목원에서 세밀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지난해 국립수목원이 경북에서 발견한 참작약 군락지에서 표본을 얻었다”며 “생체도 관찰하고 알코올에 넣어 보관했던 식물을 다시 꺼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3달간 그려 작품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봉우리부터 꽃 피는 과정을 스케치하고 열매와 씨도 구해 함께 그려 넣었다.
“기쁘게도 참작약 그림은 곧 논문에 실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국립수목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귀화식물 도감’에도 대여섯 작품이 포함될 겁니다. 앞으로 제 작품만으로 가득 찬 책을 내고 싶어요.”
19세기 말 우리 식물 세밀화, 전 세계에 소개
세밀화의 역사는 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의사였던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가 50~70년경 당시 치료에 쓰던 식물들을 모아 출판한 ‘의약물질’이라는 책에 식물세밀화가 처음 등장한다. 그 뒤에도 의약학 교육재료로 식물의 특징을 잘 전달하기 위해 세밀화를 이용했다. 다만 주로 목판화였기 때문에 그림의 정확성은 다소 떨어졌다.
15세기 탐험시대가 열리면서 전 세계에서 들여온 다양한 생물을 그리기 위해 세밀화의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식물원 정원사와 수채화가가 화훼식물의 세밀화에 주목했다. 당시 왕과 귀족들은 세계 곳곳에서 신기한 풀과 나무를 가져와 정원을 만들었는데,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부인인 조세핀도 장미정원을 비롯한 여러 정원을 꾸몄고 벨기에 출신 화가를 고용해 자신이 아끼는 풀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게 했다.
17세기 이후에는 현미경이 발달하면서 곤충이나 생물의 미세한 구조도 그릴 수 있게 됐다. 특히 18세기 들어 과학의 발달로 식물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여 식물세밀화가 다시 주목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와 페르디난트 바우어 형제가 현미경을 동원해 그렸던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온다.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가 동양화법을 가미해 식물세밀화를 선보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즈완 팔리빈이 우리나라 식물 600여 종을 세밀화와 함께 소개하는 ‘조선식물개요’를 발표했다. 이 연구관은 “이 책을 통해 한국에 사는 매자나무(Berberis koreana Palibin)를 전 세계에 처음 소개했다”고 말했다.
“이 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새를 본 적이 있습니까? … 이 새는 일반적으로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4년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서 3마리가 발견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직 이 종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아래의 번호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982년 10월 경희대 조류연구소가 원앙사촌(Tadorna cristata)을 찾으려고 제작해 전국에 배포한 광고 엽서의 뒷면 문구다. 영어 문구도 들어갔고 35만 원의 사례금도 밝힌 이 엽서의 앞면에는 원앙사촌의 세밀화가 포함됐다. 원앙사촌은 원앙보다 2배정도 큰 몸집에 머리에 투구를 쓴 것처럼 긴 장식깃을 달고 있는 오리과의 새다. 18세기 말 일본에서 나온 책 ‘관문금보’에는 이 새를 ‘조선원앙’이라고 표현하며 자세히 소개할 정도로 원앙사촌은 우리나라에 살던 귀한 새였다.
현재 원앙사촌은 전 세계에 단 3마리, 그것도 표본으로만 남아 있다. 그 3마리 중 2마리가 금강과 낙동강에서 채집됐는데, 이들 표본은 모두 일본 도쿄 야마시나조류연구소에 있어 정작 우리는 세밀화로만 원앙사촌을 감상할 수 있을 뿐이다.
국립생물자원관에서는 자생 생물 세밀화 공모전을 개최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자생 생물의 분류 정보를 담은 생물지를 출간하고 있다. 생물지에는 자생 생물의 형태, 서식지, 분포, 생태 등에 대한 정보와 함께 주요 종의 세밀화가 수록돼 있다. 2007년에는 ‘한국 속 식물지’를 영문판으로 출간했다. 여기에는 열매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은 미선나무(Abeliophyllum distichum)처럼 우리나라에만 사는 나무가 세밀화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토종 동식물이 세밀화와 함께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