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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굽어 살피는 어진 소리 편경

백아(白鵝, 흰기러기)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내는 청아한 울음소리. 팔음 분류법 가운데 ‘석’(石)부에 속하는 편경의 소리를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묘사했다. 흰기러기의 비상(飛上)과 함께 편경의 맑은 소리가 널리 퍼지길 바란 걸까. 편경의 밑받침에는 흰기러기 두 마리가 아로 새겨져 있다. 흰기러기는 시베리아 북동부에 서식하며 겨울철에 드물게 우리나라를 찾는 새로 예부터 길조로 불렸다.

편경은 흰기러기만큼이나 희귀한 악기였기에 조상들은 모든 악기 중 편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시대 법식과 제도를 정리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편경을 망가뜨리는 자는 곤장 100대와 유배 3년에 처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편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경석(磬石) 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질그릇이나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진흙을 구워 만든 와경(瓦經)으로 편경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 음색이 좋지 않았다.

절대음감 지닌 세종대왕이 만들다
편경은 송나라 궁중에서 연주된 제례음악인 ‘대성아악’과 함께 고려 예종 11년(1116년)에 전해졌다. 고려에 전해진 아악은 선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에 지내는 제사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社稷), 타국에서 온 사신이나 국빈을 대접하는 잔치인 ‘연향’(宴享)에 쓰였다.

편경은 이런 의식에서 모든 악기를 조율하는 데 쓰이는 중요한 악기였다. 돌로 만든 편경은 온도와 습도에 따라 팽창하거나 수축하지 않아 일정한 음색과 음높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경이 없는 악기 편성에서는 대금이 편경을 대신해 조율에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금은 취구와 입술의 위치가 바뀌면 음높이가 달라진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같은 현악기는 온도나 습도에 따라 명주실이 수축하거나 팽창할 뿐 아니라 줄을 지탱하는 ‘안족’의 위치가 변할 때 음높이가 바뀌기 때문에 조율 악기로 사용할 수 없다.

조선시대 들어 편경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기본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공자의 예악(禮樂)사상 을 반영한 종묘제례악 같은 아악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편경을 자체 제작한 이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편경 제작과정과 관련해 세종실록에는 재밌는 일화가 전해진다. 1425년 경기도 남양 지역에서 표면의 무늬가 아름답고 소리가 맑은 경석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대왕은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편경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크게 기뻐하며 박연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뒤 세종대왕은 ‘9번째 음(이칙)이 높다’고 지적했다. 경석을 살펴본 박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석의 한 쪽 끝을 완전히 갈지 않아 먹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먹줄의 남은 부분을 모두 갈고 다시 연주하자 그때서야 음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종대왕은 미묘한 음의 차이까지 구분해낼 수 있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12율 음정 정하는 삼분손익법
편경은 경석을 ‘ㄱ’자 모양으로 깎아서 상단의 나무틀에 8개 하단에 8개의 경석을 매달은 형태이며 소뿔로 만든 ‘각퇴’라는 작은 망치로 경석의 끝부분을 쳐서 소리를 낸다. 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 이숙희 학예연구사는 “편경은 12율4청성(十二律四淸聲)을 내며 두께가 두꺼울수록 음이 높다”고 설명했다. 두께가 두꺼울수록 편경의 진동수가 높기 때문이다. 12율은 국악의 기본이 되는 음으로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을 말한다. 4청성은 청황종, 청대려, 청태주, 청협종으로 일반음보다 높은 4음이다.

편경을 만들 때 12음을 어떻게 결정했을까. 박연은 중국에서 전해진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따라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 관인 ‘율관’을 12개 만들었다. 둘레가 약 2.7cm인 관에 검은 기장 낱알 1200개를 넣으면 관의 길이가 약 27cm가 되는데, 이 관을 황종 율관으로 삼았다. 이렇게 만든 황종 음의 진동수는 528Hz로 서양음계의 높은 도(C, 523.25Hz)와 거의 같다.

삼분손익법은 ‘삼분손일’(三分損一)과 ‘삼분익일’(三分益一)을 교대로 적용해 음을 얻는 방법이다. 황종 율관을 3등분한 뒤 3분의 2만 남기면 완전5도 위 음인 임종을 얻을 수 있다. 다시 임종 율관의 3분의1을 더해(삼분익일) 3분의 4를 만들면 완전4도 아래인 태주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한 번은 삼분손일 다시 한 번은 삼분익일을 반복하면 12율을 모두 얻을 수 있으며 가장 높은 청협종은 진동수가 1260Hz에 이른다.

편경은 왜 ‘ㄱ’자 모양일까. 악학궤범에는 편경의 모양이 하늘을 굽어 땅을 덮는 형상이라고 적혀있다. 어진 임금이 되려면 항상백성을 굽어 살피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담긴 셈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편경과 더불어 대금, 피리 같은 악기로 연주하는 ‘여민락’(與民樂)이란 곡을 작곡했다. 여민락은 ‘백성과 함께하는 즐거움’ 이라는 뜻을 지닌 아악곡으로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어진 마음이 담겨있다.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팔음(八音)에 해당하는 악기가 지닌 특징과 전통 음악사 속에 담긴 재밌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각 악기의 소리는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www.dongaScience.com/DS)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팔음(八音)
팔음은 국악기 분류법이자 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지칭하는 용어로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바가지), 토(土), 혁(革), 목(木)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법은 영조 때 편찬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고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문물을 정리한 책)에 기록돼 있다.

경석(磬石)
석회암과 대리석이 섞인 형태로 옥돌이라고도 불린다.

예악(禮樂)사상
예와 음악은 백성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하기 때문에 한시라도 몸에서 멀리해선 안 된다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예기’(禮記)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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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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