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사회생활이나 산업활동에 의해 토양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토양에 사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거나 식물에 흡수되며, 때로는 빗물에 의해 씻겨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토양은 자연적으로 원상태로 깨끗하게 회복되는데, 이를 토양의 완충능력(buffering capacity)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완충능력의 한계 이상으로 오염물질이 생기면 토양이 자체적으로 정화를 해도 오염물질은 남아 있어 농·축산물이나 인간에게 여러모로 피해를 줄 수 있다.
이처럼 토양의 정화능력을 벗어나는 오염의 주요 원인으로 주유소에서 새는 기름이 지목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미 주유소 누유현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근래 들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토양이 기름에 오염되는 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비해 이 토양을 다시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일은 매우 많은 시간과 경비가 든다. 또한 기름이 지하수와 만나 흘러가면 기름의 이동이 광범위해지고 정화하기도 훨씬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미 오염된 토양을 회복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염물질이 토양으로 이동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사전 예방이 더욱 중요하다.
1백만달러 보험 가입
미국에서는 1983년부터 주유소나 화학공장의 지하탱크에서 기름이 누출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에서 발간한 ‘지하탱크 누출에 관한 상황보고’ 는 전체 지하저장탱크의 약25% 정도에서 기름이 새는것으로 추정했다.
누유현상은 지하저장탱크의 사용수명과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누유가 확인된 지하저장탱크 중 10-13%는 사용수명이 12-13년, 42%는 15-20년, 그리고 30%는 30년 이상 지난 것으로 조사됐다. 오래 사용할수록 누유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누유를 방지하기 위해 1988년 EPA는 지하탱크설비에 관한 기준을 정했다. 1998년까지 모든 주유소의 지하배관을 포함한 지하탱크설비를 연방정부의 기준에 맞게 개선하며, 이 기준을 따르지 않는 주유소는 폐쇄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 내용 중 특이한 것은 주유소 소유주가 의무적으로 1백만달러의 보험을 가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지하저장탱크로부터 오염물질이 누출될 경우 주유소는 심한 자금 압박을 받게 돼 결국 폐쇄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EPA규정에 따라 누출을 일으킨 주유소는 벌금을 내야 하고,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는데 적어도 20만달러 이상이 필요하며, 오염 피해를 입은 제3자에 대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아울러 주유소는 누유가 발생했을 경우 대처할 정화방법를 비롯해 누유에 대한 모든 기록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1988년 이후 미국에서는 보호장치 없는 지하저장탱크 60-70만개가 폐기되거나 새로운 탱크로 대체되고 있으며, 향후 80만개 이상이 더 교체될 전망이다. 또한 토양오염을 예방하기 위해 대규모 석유회사는 이중탱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대형 주유소는 지상에 기름을 저장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소규모의 주유소를 많이 세우기보다 대형 주유소를 적게 신설해 오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주유소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국의 전체 주유소 수는 1만7천여개다. 이 중 약 3분의 1이 기름이 샌 경험이 있으며, 11%는 심각한 토양 오염을 낳았다.
1974년 영국은 대기, 수질, 토양과 관련된 모든 폐기물에 대해 실행 가능한 최대 수준까지 규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오염방지법을 제정했다. 1990년에는 잠재적으로 오염될 가능성이 있는 용도로 이용되는 토지를 지방 당국에 등록할 의무가 부과됐다. 하지만 부동산 업계를 비롯한 경제계의 불황과 불경기 때문에 시행이 연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업계에서도 여러 가지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방 당국에서 설정한 토양오염 기준을 준수하는 한편 지하저장탱크를 상세히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주유소 급증, 조사는 이제 시작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의 생활수준이 높아져 자동차 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주유소를 비롯한 유류저장시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1991년 11월 개정된 석유사업시행령에 따라 주유소 간 거리제한이 종전의 2분의 1로 축소됐다. 그 결과 서울은 3백50m, 광역시와 시·읍지역은 5백m, 기타 지역은 1km이상으로 제한이 완화돼 주유소가 무분별하게 증가했다. 1988년 총 2천7백79개소였던 주유소가 1995년에는 8천3백개소 이상으로 약 3배가 늘어났다.
하지만 토양오염에 대한 고려는 미흡했다. 우선 지하저장탱크에서 누유되는 현상이 체계적으로 조사된 적이 없다. 단지 미국에 비해 지하저장탱크의 재질이나 안전관리가 뛰어나지 않은 여건을 생각해볼 때, 설치가 오래된 20% 정도의 탱크에서 누유의 우려가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이외에도 산업폐기물이 직접 토양에 투기되기도 했고, 폐광산, 유해물질저장시설 등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 또한 토양에 계속적으로 누적됐다. 결국 1987년 전국토의 1.5% 정도로 측정되던 ‘토양오염 우려 지역’은 매년 증가해 2000년에는 4.8%, 2010년도에는 6.6%로 늘어날 전망이다.
정부의 관심은 비교적 최근에 모아지기 시작됐다. 그 동안 토양환경보전에 대한 업무는 정부 내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었다. 그래서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토양환경보전정책이 추진되기 어려웠다.
1995년 1월 환경부는 기존에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토양보전에 관련된 법적 규정을 분리하고 보완해 ‘토양환경보전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킬 우려가 있는 토양오염유발시설을 규정해 이를 조사하고 있다. 이제 모든 주유소는 올해 내로 지하저장탱크의 누유로 인한 토양오염검사를 받아야 하며, 만일 오염사실이 확인되면 2년 이내에 토양정화방법을 사용해 토양생태계를 복원시켜야 한다.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자연의 만물을 잉태하는 흙인 토양은 물, 대기와 더불어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한 농산물과 축산물, 즉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터전이다. 게다가 우리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의, 식, 주의 자원을 공급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더 늦기 전에 이 터전이 기름으로 뒤덮이는 일을 막아야 한다.
누유에 의한 토양오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전방지체계와 사후처리체계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 사전방지를 위해 적절한 오염 기준이 설정돼야 하고 오염방지시설이 각 주유소에 설치돼야 한다. 또한 사후관리체계로는 전국의 토양오염도를 상시적으로 측정하고 오염된 지역을 체계적으로 지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현재 '토양환경보전법'에는 이런 사실들이 잘 명기돼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의 제정이 아니고 실행이다. 따라서 정부는 법안에 제시된 구체적인 목표와 방향에 따라 우리나라의 토양환경을 보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토양오염의 경종 울린 러브캐널 사건
유해폐기물을 토양에 묻어 오염을 유발시킨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국의 러브캐널(Love Canal)사건이다. 러브캐널은 미국 뉴욕주 나이아가라시에 있는 운하 이름이다. 이 운하는 후커화하고히사에 의해 1940년대에 사용된 이후 1950년대에 폐쇄됐다. 이때 회사에서 배출된 각종 유해폐기물 6백만t이 매립돼 흙으로 덮여졌다.
이후 이 지역에는 초등학교와 수백가구의 주택들이 들어서 많은 어린아이들이 살았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각 집의 지하실에서 이상한 화학물질의 냄새가 자주 발생하면서 아이들의 침실까지 퍼졌는데, 이 냄새는 바로 유해폐기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냄새 성분에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다이옥신까지 포함돼 있었다.
어린 학생들 중 수백명이 신장질환이나 천식 등 만성적인 질환을 앓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하수도가 검은 화학물질로 뒤덮여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78년 뉴욕주와 미국정부는 이 지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모든 주택에 배상금을 주어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이 지역의 접근을 막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이 생겼고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됐다. 이 사건은 유해폐기물을 무분별하게 처분해 토양이나 인체에 엄청난 해를 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도 심각한 교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