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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서 큰소리치는 조기

“앞장선 조기들은 못내 가슴이 설레었다. 지느러미를 곧추세우고 아가미를 벌름거리면서 꿈에도 그리운 냄새를 맡았다. 어머니의 품 같은 황해, 야트막한 대지에 물이 찰랑거리고 조수간만의 움직임으로 하루에 정확히 두 번씩 운동을 반복하는 황해, 그때마다 흑갈색 개펄이 벌 떼처럼 일어서서 물색을 흐리는 황해, 자신이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가 작별을 고했던 황해,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이 그리웠던 황해. 그 바다의 개펄 냄새가 밀려들었다. 뭍이로구나.”

민속학자 주강현 박사가 쓴 책 ‘조기에 관한 명상’ 가운데 일부를 보면 조기가 황해(서해)에서 나는 대표적인 생선임을 알 수 있다. 동해의 대표 생선인 명태와 비교해 ‘동해 명태, 서해 조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에 자린고비 이야기가 있다. 극성맞게 재물을 아끼는 구두쇠가 천장에 굴비를 매달아 놓고, 밥 한 술 뜨고 굴비 한 번 쳐다보며 찬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굴비란 통째로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말한다. 조기란 생선이 얼마나 맛있기에 쳐다보기만 봐도 군침이 흘러 밥이 술술 넘어간단 말인가.

조기 예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는 ‘난호어목지’(蘭湖魚牧志)에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이를 좋아하며 해족(海族) 중에서 가장 많고 맛있다”라고 기록해 조기를 해산물 중 최고로 꼽은 바 있다. 이쯤 되면 조기 역시 국민 생선의 반열에 올려도 되지 않을까.

조기의 인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조기는 말리거나 절여도 모양이 탐스럽게 보여 식욕을 자극한다. 비늘이 잔잔해 따로 벗겨낼 필요가 없고 창자도 가려내지 않고 그대로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맛이 좋다. 마른 상태에서 그냥 먹어도 좋고 살짝 구우면 더욱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가짜 조기 구별법
우리가 조기라고 말하는 종은 정확히 말하면 ‘참조기’(Pseudosciaena polyactis)다.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참조기는 황금빛을 띠고 있어 노랑조기, 황조기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는 참조기를 포함해 민어, 보구치(백조기), 흑조기, 수조기(반어), 부세, 황강달이(황새기) 등 약 13종의 민어과 물고기가 살고 있다.

민어과 물고기들은 전체적인 몸꼴, 두 갈래로 나뉘지 않고 뭉툭한 꼬리지느러미, 떨어지기 쉬운 비늘 등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 구별하기 어렵다. 어촌 사람들 중에도 이들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해마다 가짜 조기 파동이 벌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진짜 조기를 구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조기와 혼동할 만한 종으로는 부세, 황강달이, 보구치, 흑조기, 수조기 등이 있다. 우선 보구치, 흑조기, 수조기는 배 쪽이 황금색을 띠지 않아 참조기와 구별된다. 참조기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종은 부세다. 맛도 참조기 다음으로 치는 부세는 참조기처럼 배 쪽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위까지 비늘이 덮여 있다. 그러나 부세
는 참조기보다 대형종일 뿐 아니라 몸이 야위고 꼬리부분이 가늘다. 뒷지느러미 줄기 수도 참조기의 경우 9~10개인데 반해 부세는 7~8개다. 황강달이는 몸빛깔이 노랗고 맛이 좋아 지금도 곳에 따라서는 참조기라 불리며, 몸이 작아 가끔 조기 새끼로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머리 부분이 크고 위쪽에 닭 볏 모양의 돌기가 있으며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위에 비늘이 없다는 점에서 참조기와 다르다.

머리에 든 돌의 정체
조선 후기의 문신 이의봉은 ‘고금석림’(古今釋林)이란 책에서 “조기는 머리에 돌이 들어 있어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한다. 석수어는 조기의 머리(首)에 뼈가 변해 돌(石)처럼 된 것이 들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기는 이것을 마찰시켜 울음소리를 낸다”라고 기록했다. 조기를 먹다 보면 가끔 머리 속에서 매끈한 우윳빛의 돌조각 같은 것이 나오는데, 머리 속의 돌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돌의 정체는 바로 이석(耳石)이다. 이석은 물고기 내이에 있는 탄산칼슘 덩어리로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감지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뇌에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다른 물고기도 이석이 있지만 민어과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에 비해 이석이 큰 편이다.

조기가 이석을 마찰해 소리를 낸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조기가 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울어댄다. 그러나 이석을 사용해 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석을 마찰시켜서가 아니라 커다란 부레를 수축시켜 소리를 낸다.
민어과 물고기는 대체로 눈이 어두운 대신 청각이발달했다. 서해의 탁한 물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물속에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떼를 짓기 위한 신호음으로 삼기 위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추측된다. 어군탐지기가 없던 시절, 어부들은 민어과 물고기의 이런 습성을 고기잡이에 활용했다. 물속에 마디를 튼 대나무를 집어넣고 귀를 대어 조기떼의 위치와 이동방향을 알아낸 다음 그 길목에 그물을 내렸던 것이다.

조구만도 못한 놈
조기는 해마다 정확한 시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죽하면 시간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조구(조기)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할까.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나다가 봄이 다가오면 산란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한다. 2월에는 흑산도 근해를 지나고 3~4월에는 칠산도 바다에 도착해 산란하며, 4~5월에는 연평도 근해에 이르고 6월에는 발해만까지 올라갔다가 산란을 마치고 나면 다시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온다. 선조들은 일찍부터 조기의 회유경로를 손금 보듯 머릿속에 그려가며 조기잡이에 나섰다. 어민들은 ‘2월 천둥은 조기를 물어온다’, ‘건너섬에 살구꽃이 필 때 조기가 몰려온다’ 등의 말을 만들어냈고, 조기는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무리 지어 몰려들었다.

조기는 많이 잡히는 대표적 어종이었다. 영광굴비의 본고장이며 한때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 어장 중 하나였던 법성포 앞바다를 예로 들어 보자. 19세기 말에 편찬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鎖錄)에서는 법성포 부근의 조기잡이를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들이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팔며, 오고 가는 거래액은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 이때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조기로 팔도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다”라고 묘사했다. 조기가 그물에 많이 들면 사람이 올라타도 가라앉지 않았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이 잡히는 일도 허다했다. 일확천금을 노린 어선들이 모여들었고, “이여차 디여차 닻 둘러메고 칠산 바다에 돈 실러 간다”라며 흥에 겨운 노동요가 울려 퍼졌다. 어장 부근에 파시라고 불리는 큰 시장이 들어섰고, 날마다 노래판과 술판이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뤘다.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란 책에서 “연평 바다에서 조기 우는 소리가 우레처럼 은은하게 서울까지 들려오면 만 사람이 입맛을 다신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석수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환경오염과 남획 탓에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우리나라를 찾는 조기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었고, 시장에 유통되는 조기도 동중국해의 월동장까지 찾아가서 잡아온 어린 개체들뿐이다.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이 잡혔다는 조기 떼는 전설이 돼 버린 것이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무리 지어 몰려온 조기 떼가 황금빛 비늘을 번뜩이며 우리 바다를 다시 찾을 날은 과연 언제일까.

이태원 교사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세포생물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우리나라 전통 문헌에 나타난 과학 관련 내용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의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기행문식으로 정리한 ‘현산어보를 찾아서1~5’(청어람미디어) 등이 있다.

이자겸의 전설이 어린 영광굴비
조기는 거의 대부분이 굴비로 가공돼 유통된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굴비를 만들어 왔다. 조기를 소금에 절인 채 말려 굴비로 만드는 가공방식은 떼를 지어 회유하는 조기의 생태적 특성과 우리나라 특유의 기후가 어울려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조기는 대체로 고온 다습한 시기에 대량으로 잡힌다. 이를 보존하고 먼 내륙지방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가공기술이 필요한데, 그 해결책이 바로 굴비였다.

굴비는 저장하기 좋을 뿐만 아니라 맛 또한 뛰어나다. 통째로 구워 먹거나 갖은 양념을 발라 쪄 먹기도 하며, 매운탕이나 찌개로 끓여 먹어도 좋다. 통보리쌀에 마른 굴비를 층층이 묵혀 뒀다 고추장에 찍어 먹는 열성파도 있다. 굴비는 다른 종류의 건어물과 달리 전혀 손질을 하지 않고 온몸을 통째로 바닷바람에 말린 생선이기 때문에 제수용으로도 값진 대우를 받는다. 옛날 행상들의 보따리 속에는 항상 굴비가 주요품목으로 들어 있었고, 삼베나 한지로 정성껏 싸서 시골로 찾아다니면 관혼상제를 만난 집에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사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굴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자겸은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돼 정주, 즉 지금의 영광지방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자겸은 이곳에서 굴비를 먹어보고는 그 독특한 맛에 반해 임금에게 정주굴비(靜洲屈非)라는 네 글자와 함께 굴비를 올렸다. 자신이 결백하며 그릇됨(非)에 굴(屈)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임금은 이에 감복해 유배를 풀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실제 이자겸은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또 전해 오는 이야기 중 내용이 다른 것도 많다. 굴비를 보낸 대상은 왕이 아니라 자신의 두딸이라는 내용이 한 예다. 이자겸에 대한 일화는 영광굴비의 다른 이름인 정주굴비에 후대 사람들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해 만든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영광굴비가 이미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200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태원 서울세화고 생물 교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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