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PM 11:00
도서관에서 보고서를 쓰고 나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 보니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대충 씻고 자고 싶지만 그래도 뜨뜻한 물로 샤워는 해야겠지.
윙~.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건조한 더운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나니 피로가 확 풀리면서 기분도 한결 낫다.
꼬르륵.
배에서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오후 6시에 학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4시간 정신노동(보고서 작성!)을 했더니 몸속 포도당이 고갈됐나 보다.
사실 뇌야말로 ‘포도당 도둑’이다. 뇌 신경세포의 시냅스가 활동할 때 포도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비법 가운데 하나가 머리를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아무튼 뭘 좀 먹고 자야겠다. TV를 켜니 라면 광고가 나온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다.
찬장을 뒤진 끝에 겨우 라면 한 봉지를 찾았다. 건강을 생각하면 한밤에, 그것도 라면을 끓여 먹는 건 금기겠지만 오늘 하루만은 넘어가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물_왜 평상시 액체일까
라면 하나를 끓이려면 냄비에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할까. 얼큰한 맛이 일품인 ‘S라면’의 포장지에 있는 조리법(요리에 자신이 없을 땐 조리법을 충실히 따르면 적어도 먹을 만한 결과물은 나온다!)을 보니 3컵 정도란다.
1컵이 180ml쯤 되니 540ml 정도다.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버튼을 돌린다.
타다닥.
불붙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올라온다. 물이 끓으려면 몇 분 걸리겠지. 문득 물이 대단한 물질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물은 주변의 액체 가운데 가장 흔한 분자다. 당장 우리 몸만 해도 70%가 물이다. 하지만 흔하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물 덕분이 아닌가.
알다시피 물은 수소원자(H) 2개와 산소원자(O) 하나로 이뤄진 작은 분자로 H2O라고 표시한다. 물분자 생김새를 보면 양팔을 벌린 산소원자를 수소원자가 한 팔씩 잡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분자량이 18인 물분자처럼 작은 분자는 상온에서 대부분 기체다. 예를 들어 크기가 물분자와 비슷한 메탄(CH4, 분자량 16)은 상온에서 기체다. 액체 상태의 메탄을 보려면 온도를 영하 164℃ 밑으로 내려야 한다! 즉 메탄의 끓는점이 영하 164℃란 말이다. 물의 끓는점이 100℃니까 둘의 끓는점 차이는 264℃나 된다. 도대체 물은 왜 덩치에 안 맞게 무게를 잡을까.
원자나 분자가 액체 상태로 있는 이유는 원자나 분자가 서로 끌려 완전히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물은 왜 메탄보다 이런 경향이 더 클까.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원자가 왜 분자를 만드는지 알아야 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돼 있다(물론 양성자 하나뿐인 수소의 원자핵은 예외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고, 전자는 음전하를 띠고 있다. 중성자는 말 그대로 중성으로 전하가 없다! 보통 원자를 그리라면 가운데 원자핵을 전자가 타원형 궤도로 도는 그림을 상상한다. 멋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약간 다르다. 전자는 태양계의 행성처럼 도는 게 아니라 원자핵 주변의 공간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아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 쥐불놀이를 할 때 깡통을 빨리 돌리면 불꽃 링으로 보이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원자가 수소인지 산소인지를 구별하게 하는 건 양성자의 수다. 양성자가 하나면 수소원자, 8개면 산소원자다. 원자의 양성자 개수가 바로 그 원자의 원자번호다. 한 원자에서 전자 개수는 바뀔 수 있다. 수소원자에 전자가 하나 있으면 중성인 원자이지만, 하나도 없으면 전하가 +1인 양이온(H+)이 된다. 마찬가지로 산소원자에 전자가 8개 있으면 중성이지만, 2개를 더 얻어 10개가 되면 전하가 -2인 음이온(O2-)이 된다.
원자가 늘 중성 상태를 지키지 않고 원자에 따라 양이온이나 음이온이 되는 이유는 원자에 전자가 들어가는 방식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0과 2, 8이라는 숫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수소원자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며 하나뿐인 전자를 떼버리고 양이온이 되기 쉽다. 또는 다른 수소원자와 전자를 공유해(공유결합) 수소분자(H2)를 만든다.
원자번호 2인 헬륨을 보자. 헬륨원자(He)는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가 각각 2개다. 전자가 2개니 이 상태로 대만족이다. 실제로 헬륨기체는 원자상태로 남들과 어울리기 싫어하고 공간을 혼자 배회하기 때문에 ‘비활성기체’라고도 부른다. 원자 동네의 나르시스트라고나 할까.
원자번호 3인 리튬(Li)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서로 짝을 만난 전자 2개는 둘만의 시간을 즐기기 때문에 3번째 전자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여기선 8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다. 전자는 0이 되거나 8이 돼야 안정을 찾는다. 리튬과 원자번호 4인 베릴륨(Be)은 전자를 내보낸다. 리튬은 하나를 내보내 Li+이온이, 베릴륨은 2개를 내보내 Be2+이온이 된다. 결국 두 이온 다 전자가 2개만 남아 헬륨원자와 같은 상태다.
원자번호 6인 탄소(C)에 이르면 고민에 빠진다. 짝을 이뤄 안정화된 전자 2개를 빼면 4개가 남는데, 다 버리기에는(C4+) 너무 많다. 그렇다고 4개를 얻기도(C4-) 벅차다. 원자핵과 전자 개수 차이가 너무 나도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소원자는 다른 원자와 전자를 공유해 분자를 만드는 경향이 강한데, 원자 하나가 최대 4개의 다른 원자와 짝을 이룰 수 있다. 원자세계의 마당발인 셈이다.
원자번호 8인 산소는 짝을 이뤄 안정화된 전자 2개를 빼면 6개가 남기 때문에 전자 2개를 얻어 이온이 되거나(O2-) 다른 원소와 전자를 공유해 8을 만족한다. 이제 분자량이 비슷한 메탄과 물의 끓는점이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수소와 탄소는 전자를 끌어당기는 정도가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전자도 둘 사이에 골고루 분포한다. 그런데 산소의 경우는 전자를 끌어당기는 성질(전기음성도)이 크기 때문에 수소와 공유결합에 참여하는 전자가 산소 쪽에 치우쳐 있다. 그래도 수소 2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하기 때문에 대칭구조를 취하면 H-O-H처럼 일직선 구조가 돼 전자의 치우침이 상쇄돼 버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물분자는 일직선 구조가 아니라 ‘ㄱ’자처럼 꺾여 있다. 왜 그럴까. 전자를 8개 갖고 있는 산소원자에서 전자 2개는 헬륨의 안정한 구조까지 사용되고 6개가 남는데, 6개의 전자에 2개가 더 있어야 안정한 상태(8)를 이룬다. 산소는 수소원자 2개와 공유결합을 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전자 2개는 수소 2개와의 결합에 각각 참여하고 남은 전자 4개는 2개씩 짝을 이룬다. 전자쌍은 중심에 산소원자가 있는 4면체의 꼭짓점에 위치한다. 꼭짓점에 위치하지만 결합에 참여하지 않는 전자쌍을 비공유전자쌍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소와 수소의 결합은 굽은형 구조가 된다.
굽은형의 물분자는 산소쪽이 부분적으로 음전하를 띠고 수소 2개가 있는 쪽은 부분적으로 양전하를 띤다. 물분자의 산소와 다른 물분자의 수소 사이에는 인력(수소결합)이 작용해 물분자들은 서로 얼기설기 엮여 뭉치려는 경향이 크다. 반면 메탄은 4면체 꼭짓점에 모두 수소원자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상호작용이 없다.
공기_투명할 뿐 비어 있지는 않아
부글부글.
물분자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물이 끓기 시작한다. 덮어둔 냄비 뚜껑이 들썩인다. 냄비 속에 팔이 있는 것도 아닌데 중력을 이기고 뚜껑이 들린다니 신기하다. 100℃가 넘어 물이 끓기 시작할 때 액체에서 기체로 바뀌는데, 뚜껑이 덮고 있으니 수증기가 갈 곳이 없다. 그러다 보니 냄비 속 공간의 기체 압력이 커져 중력을 이기면 뚜껑을 밀어내면서 수증기가 빠져나간다.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공기는 사실 기체분자가 꽤 들어 있다. 공기 1m3에 1.2kg이나 된다. 공기의 대부분은 질소(N2)로 78%를 차지하고 산소(O2)가 21%다. 나머지 1%의 대부분은 아르곤(Ar, 0.93%)이고 그 밖에 이산화탄소(CO2), 수증기가 소량 있다.
당구공을 치면 당구대 쿠션을 맞고 방향이 바뀌듯이 냄비 속의 기체분자도 냄비 안쪽 표면에 끊임없이 부딪치며 진행 방향이 바뀐다. 물론 냄비 바깥쪽도 공기 중의 기체분자가 계속 부딪치고 있다. 단위 면적당 기체분자로부터 받는 힘을 압력이라고 한다.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생기면서 냄비 속의 기체밀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냄비 뚜껑 아래쪽은 위쪽보다 더 많은 기체분자가 부딪친다. 이 압력의 차이 때문에 냄비 뚜껑이 열린다.
물이 끓을 경우는 수증기가 계속 생기지만 풍선 속에 들어 있는 기체처럼 분자 개수가 정해진 경우 온도(T)나 압력(P), 부피(V)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 즉 온도가 일정할 때 부피를 줄이면 압력이 올라간다. 온도는 기체의 평균속도와 비례하는데, 단위 면적당 더 많은 기체가 부딪치므로 수긍이 간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 이 관계를 발견했기 때문에 ‘보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압력이 일정할 때 기체의 온도를 높이면 부피가 는다. 기체의 평균속도가 빨라지면 충격량도 커지는데, 면적이 늘어나야 압력이 유지되므로 역시 당연한 얘기다. 18세기 과학자 자크 샤를이 발견해 ‘샤를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을 합치면 ‘압력과 부피를 곱한 값을 온도로 나누면(PV/T) 일정한 값이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를 ‘보일-샤를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기체분자는 무시할 만하지만 부피도 있고 분자 사이에 인력도 있어서 이 법칙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식이 들어맞는 ‘이상기체’라는 가상 기체를 고안했다. 기체 분자의 수가 일정할 때 이 식을 계산하면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한 값이 나온다.
기체분자는 너무 작아 하나씩 셀 수 없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수를 가리키는 단위가 필요하다. 원자나 분자 6.02×1023개를 1몰(mole)이라고 하고 이 숫자 6.02×1023을 아보가드로수라고 한다. 앞의 식에서 기체분자 1몰에 대해 압력, 부피, 온도의 관계를 계산한 값(PV/T)이 기체상수 R이다. 몰 수가 n일 때로 식을 확장하면 PV=nRT라는 멋진 식이 된다. 이를 ‘이상기체방정식’이라고 부른다.
아까 냄비에 넣은 물 3컵은 540ml 정도다. 물의 비중이 1이므로 540g이다. 여기에는 물분자가 몇 개나 들어 있을까? 물 18g이 1몰이므로 30몰, 즉 1.806×1025개다. 어느 정도 숫자인지 상상이 잘 안 간다고? 지구의 인구 68억 명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6.8×109이다. 물 3컵에는 글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의 물분자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 6.02×1023이라는 숫자를 쓸까?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장 가벼운 원자인 수소원자(H)를 모아서 질량 1g이 되게 하려면 수소원자가 바로 6.02×1023개 필요하다. 수소원자 6.02×1023개, 즉 1몰의 질량이 1g인 것이다. 그 1이라는 숫자가 수소의 원자량이다. 원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분자도 마찬가지다. 수소분자(H2) 1몰은 수소분자 6.02×1023개를 말한다. 수소분자는 수소원자 2개로 이뤄져 있으므로 수소분자 1몰에는 2×6.02×1023개의 수소원자가 들어 있다.
금속_라면엔 양은냄비가 제격
“앗 뜨거!”
라면을 넣다가 냄비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사실 라면은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야 맛이다. 라면처럼 금방 만들어 금방 먹는 요리(라면도 엄연히 요리다!)에는 양은냄비가 제격이다. 된장찌개에 뚝배기가 어울리듯이.
양은은 구리(Cu)에 니켈(Ni)과 아연(Zn)을 더해 만든 합금이다. 가볍고 열에 잘 견디면서도 열을 잘 전달하므로 식기에 적합하다. 가마솥을 만드는 쇠도 튼튼하지만 솥에 라면을 끓여 먹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인류가 문명을 꽃피운 계기는 금속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부터다. 먼저 구리를 쓰다가 뒤에 철을 이용했다. 구리는 녹는점이 1085℃로 비교적 낮기 때문에 인류가 암석에 들어 있는 구리가 불에 녹아내리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철의 녹는점은 1538℃다. 금속은 실처럼 뽑을 수 있는 연성과 두드려 판처럼 펼 수 있는 전성이 있다. 특히 금이나 은은 연성과 전성이 좋고 귀하기 때문에 각종 장신구를 만드는 귀금속이 됐다.
또 금속은 열뿐 아니라 전기도 무척 잘 통한다. 특히 구리는 연성도 좋고 전기전도도도 높은데다 흔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널리 쓴다. 대신 좀 무르기 때문에 양은처럼 다른 금속과 섞어 강도를 높여 쓴다. 금속이 전기를 잘 통하는 이유는 자유전자 때문이다. 금속은 전자를 버리고 양이온이 되려는 경향이 큰데, 양이온 금속끼리 결합돼 있는 사이를 전자들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닌다. 이들을 자유전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금속은 이런 금속결합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금속광택을 내며 전기전도성을 나타낸다.
탄소 화합물_면발이 부드러운 이유
흐르르. 치이익.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내용물이 끓어 넘쳐 레인지 위에 떨어졌다. 아무래도 뒤처리가 더 문제일 것 같다. 조리법을 보니 4분 30초간 끓이란다. 지금쯤이면 되지 않았을까. 파마한 머리카락처럼 꼬불꼬불한 라면은 국수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 난다. 라면의 재료는 밀가루인데, 주로 녹말로 이뤄져 있다. 녹말은 포도당 분자가 끝없이 이어진 사슬처럼 생긴 고분자다. 라면의 비밀은 면발을 기름에 한 번 튀겨 녹말 고분자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둔 것. 물론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점도 라면의 매력이다.
라면을 끓는 물에 넣으면 물분자가 녹말 고분자 사이의 공간에 들어간다. 물론 차가운 물에 넣어도 결국은 물분자가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온도가 뜨거워야 물분자 움직임이 활발해 빨리 침투하기 때문이다. 면을 끓일수록 면발이 부드러워지므로, 적당한 시점(조리법에 따르면 4분 30초!)에서 중단해야 한다. 계속 끓이면 더 많은 물분자가 들어가 결국 면발이 ‘불게’ 돼 쫄깃쫄깃한 맛이 사라진다.
녹말의 단위체인 포도당은 대자연의 축복이다. 아무 맛도 없는 물(H2O)과 보이지도 않는 이산화탄소(CO2)가 햇빛을 받으면 산소(O2)를 방출하면서 포도당(C6H12O6)으로 바뀐다. 물론 아무데서나 이렇게 되는 건 아니고 식물의 엽록체에서 수많은 효소의 도움을 받아 이런 역사(役事)가 이뤄진다. 이런 반응을 광합성이라고 한다. 포도당을 비롯해 수많은 분자들이 탄소원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탄소 화합물이다.
포도당(녹말이 소화되면 포도당이 된다)을 먹고 산소(숨쉬는 공기의 21%)를 호흡하면 우리 세포의 미트콘드리아란 곳에서 식물의 엽록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나 포도당이 물과 이산화탄소로 바뀐다. 물론 이때 햇빛을 내지는 않고 대신 에너지원인 ATP란 분자가 만들어진다. 먹음직스런 면발을 한 젓가락 쥐기 전에 미국이나 호주 들판 어딘가에서(라면 봉지의 원산지란을 보니 ‘면/소맥분(미국산, 호주산)’이라고 써 있다) 자랐을 밀과 곡식을 영글게 한 태양과 물, 공기를 생각해 본다.
라면 봉지도 탄소 화합물이다. 역시 고분자인데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덩어리를 플라스틱, 종이처럼 얇은 걸 비닐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비닐은 고분자를 이루는 단위체가 되는 화합물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많은 플라스틱이 비닐을 단위체로 만들어진다.
요즘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플라스틱 재활용이 화두다. 효과적인 재활용을 하려면 플라스틱을 종류별로 분리배출해야 하는데, 플라스틱 제품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에 화살표 3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서로 꼬리를 물고 있고 가운데 플라스틱 종류가 써 있는 식별 표시가 있다. 라면 봉지를 보니 ‘OTHER’라고 써 있는데, 이것은 ‘기타 플라스틱’이라는 뜻이다. 이 표시가 된 플라스틱을 모아 두꺼운 갈색 대야를 만들거나 고체연료로 재활용한다. 1.5L 콜라병을 보면 그 삼각화살표 안에 ‘1’이 써 있다. PET라는 뜻으로 빈 병을 모아 PET병으로 재활용한다.
생활 속의 화합물_기름 닦는 계면활성제
꺼어억.
이런 나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다. 모처럼 얼큰한 라면을 잘 먹었다. 거울을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밥 한 공기 말아 먹고 싶지만 여기서 자제해야겠다.
자 이제 설거지를 해볼까. 아무래도 기름에 튀긴 음식이다 보니 냄비 여기저기에 기름기가 남아 있다. 이럴 경우 그냥 물로 씻어서는 잘 안 닦인다. 주방세제가 필요하다.
꿀처럼 찐득하고 투명한 주방세제를 머금은 수세미를 냄비에 대고 문지르자 거품이 일면서 기름기가 사라진다. 맹물일 때는 그렇게 힘을 줘서 박박 닦아도 안 없어지더니 이 마법의 액체를 넣으면 슬슬 문질러도 깨끗해진다. 주방세제의 주성분은 계면활성제다. 계면활성제란 물과 기름 사이에 들어가 둘이 잘 섞이게 해주는 물질이다.
기름은 탄소와 수소가 주성분인 분자로 극성이 작은 분자다. 반면 물은 극성이 크다. 따라서 기름은 기름끼리, 물은 물끼리 있으려고 한다. 그래서 물에 젖은 수세미로 아무리 문질러도 냄비 표면에 묻어 있는 기름이 잘 안 닦인다. 그런데 계면활성제는 한 분자에 한쪽은 극성이 작고 반대쪽은 극성이 큰 부분을 같이 갖고 있다. 동물로 치면 박쥐와 같다고나 할까. 계면활성제 분자의 기름 같은 부분이 기름 표면에 달라붙고 물처럼 극성이 크거나 물을 좋아하는 이온인 부분이 물을 향해 있으면서 냄비 표면에서 기름을 떼어낸다. 설거지를 한 물을 확대해 보면 계면활성제에 둘러싸인 미세한 기름방울이 퍼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설거지도 끝났다. 시계를 보니 막 자정이 지났다. 바로 자면 소화가 안 될 테니 한 시간 정도는 뭘 해야 할 텐데…. TV를 다시 켜기도 그렇고 보고서를 들여다볼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면을 끓여 먹은 과정을 화학의 관점에서 써 보면 어떨까. 화학을 싫어하는 동생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편집자주
과학과 수학을 잘 하는 비법은 목차를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학동아는 2009년 1월부터 ‘교과서에 길이 있다’ 연재를 물리, 수학,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순으로 5회에 걸쳐 대형 브로마이드와 함께 제공한다. 이번 화학편에서는 고등학교 화학Ⅰ에서 배우는 핵심 내용을 대학생이 라면을 끓이면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었다.
전창림 교수는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국립대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있다. 고분자화학과 미술재료의 화학적 연구에 관심이 많다. ‘알고 쓰는 미술재료’(1996), ‘생활은 화학이다’(2000), ‘색의 비밀’(2003), ‘미술관에 간 화학자’(2007) 등을 저술했다.
도서관에서 보고서를 쓰고 나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 보니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대충 씻고 자고 싶지만 그래도 뜨뜻한 물로 샤워는 해야겠지.
윙~.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건조한 더운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나니 피로가 확 풀리면서 기분도 한결 낫다.
꼬르륵.
배에서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오후 6시에 학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4시간 정신노동(보고서 작성!)을 했더니 몸속 포도당이 고갈됐나 보다.
사실 뇌야말로 ‘포도당 도둑’이다. 뇌 신경세포의 시냅스가 활동할 때 포도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비법 가운데 하나가 머리를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아무튼 뭘 좀 먹고 자야겠다. TV를 켜니 라면 광고가 나온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다.
찬장을 뒤진 끝에 겨우 라면 한 봉지를 찾았다. 건강을 생각하면 한밤에, 그것도 라면을 끓여 먹는 건 금기겠지만 오늘 하루만은 넘어가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물_왜 평상시 액체일까
라면 하나를 끓이려면 냄비에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할까. 얼큰한 맛이 일품인 ‘S라면’의 포장지에 있는 조리법(요리에 자신이 없을 땐 조리법을 충실히 따르면 적어도 먹을 만한 결과물은 나온다!)을 보니 3컵 정도란다.
1컵이 180ml쯤 되니 540ml 정도다.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버튼을 돌린다.
타다닥.
불붙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올라온다. 물이 끓으려면 몇 분 걸리겠지. 문득 물이 대단한 물질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물은 주변의 액체 가운데 가장 흔한 분자다. 당장 우리 몸만 해도 70%가 물이다. 하지만 흔하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물 덕분이 아닌가.
알다시피 물은 수소원자(H) 2개와 산소원자(O) 하나로 이뤄진 작은 분자로 H2O라고 표시한다. 물분자 생김새를 보면 양팔을 벌린 산소원자를 수소원자가 한 팔씩 잡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분자량이 18인 물분자처럼 작은 분자는 상온에서 대부분 기체다. 예를 들어 크기가 물분자와 비슷한 메탄(CH4, 분자량 16)은 상온에서 기체다. 액체 상태의 메탄을 보려면 온도를 영하 164℃ 밑으로 내려야 한다! 즉 메탄의 끓는점이 영하 164℃란 말이다. 물의 끓는점이 100℃니까 둘의 끓는점 차이는 264℃나 된다. 도대체 물은 왜 덩치에 안 맞게 무게를 잡을까.
원자나 분자가 액체 상태로 있는 이유는 원자나 분자가 서로 끌려 완전히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물은 왜 메탄보다 이런 경향이 더 클까.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원자가 왜 분자를 만드는지 알아야 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돼 있다(물론 양성자 하나뿐인 수소의 원자핵은 예외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고, 전자는 음전하를 띠고 있다. 중성자는 말 그대로 중성으로 전하가 없다! 보통 원자를 그리라면 가운데 원자핵을 전자가 타원형 궤도로 도는 그림을 상상한다. 멋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약간 다르다. 전자는 태양계의 행성처럼 도는 게 아니라 원자핵 주변의 공간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아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 쥐불놀이를 할 때 깡통을 빨리 돌리면 불꽃 링으로 보이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원자가 수소인지 산소인지를 구별하게 하는 건 양성자의 수다. 양성자가 하나면 수소원자, 8개면 산소원자다. 원자의 양성자 개수가 바로 그 원자의 원자번호다. 한 원자에서 전자 개수는 바뀔 수 있다. 수소원자에 전자가 하나 있으면 중성인 원자이지만, 하나도 없으면 전하가 +1인 양이온(H+)이 된다. 마찬가지로 산소원자에 전자가 8개 있으면 중성이지만, 2개를 더 얻어 10개가 되면 전하가 -2인 음이온(O2-)이 된다.
원자가 늘 중성 상태를 지키지 않고 원자에 따라 양이온이나 음이온이 되는 이유는 원자에 전자가 들어가는 방식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0과 2, 8이라는 숫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수소원자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며 하나뿐인 전자를 떼버리고 양이온이 되기 쉽다. 또는 다른 수소원자와 전자를 공유해(공유결합) 수소분자(H2)를 만든다.
원자번호 2인 헬륨을 보자. 헬륨원자(He)는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가 각각 2개다. 전자가 2개니 이 상태로 대만족이다. 실제로 헬륨기체는 원자상태로 남들과 어울리기 싫어하고 공간을 혼자 배회하기 때문에 ‘비활성기체’라고도 부른다. 원자 동네의 나르시스트라고나 할까.
원자번호 3인 리튬(Li)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서로 짝을 만난 전자 2개는 둘만의 시간을 즐기기 때문에 3번째 전자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여기선 8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다. 전자는 0이 되거나 8이 돼야 안정을 찾는다. 리튬과 원자번호 4인 베릴륨(Be)은 전자를 내보낸다. 리튬은 하나를 내보내 Li+이온이, 베릴륨은 2개를 내보내 Be2+이온이 된다. 결국 두 이온 다 전자가 2개만 남아 헬륨원자와 같은 상태다.
원자번호 6인 탄소(C)에 이르면 고민에 빠진다. 짝을 이뤄 안정화된 전자 2개를 빼면 4개가 남는데, 다 버리기에는(C4+) 너무 많다. 그렇다고 4개를 얻기도(C4-) 벅차다. 원자핵과 전자 개수 차이가 너무 나도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소원자는 다른 원자와 전자를 공유해 분자를 만드는 경향이 강한데, 원자 하나가 최대 4개의 다른 원자와 짝을 이룰 수 있다. 원자세계의 마당발인 셈이다.
원자번호 8인 산소는 짝을 이뤄 안정화된 전자 2개를 빼면 6개가 남기 때문에 전자 2개를 얻어 이온이 되거나(O2-) 다른 원소와 전자를 공유해 8을 만족한다. 이제 분자량이 비슷한 메탄과 물의 끓는점이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수소와 탄소는 전자를 끌어당기는 정도가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전자도 둘 사이에 골고루 분포한다. 그런데 산소의 경우는 전자를 끌어당기는 성질(전기음성도)이 크기 때문에 수소와 공유결합에 참여하는 전자가 산소 쪽에 치우쳐 있다. 그래도 수소 2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하기 때문에 대칭구조를 취하면 H-O-H처럼 일직선 구조가 돼 전자의 치우침이 상쇄돼 버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물분자는 일직선 구조가 아니라 ‘ㄱ’자처럼 꺾여 있다. 왜 그럴까. 전자를 8개 갖고 있는 산소원자에서 전자 2개는 헬륨의 안정한 구조까지 사용되고 6개가 남는데, 6개의 전자에 2개가 더 있어야 안정한 상태(8)를 이룬다. 산소는 수소원자 2개와 공유결합을 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전자 2개는 수소 2개와의 결합에 각각 참여하고 남은 전자 4개는 2개씩 짝을 이룬다. 전자쌍은 중심에 산소원자가 있는 4면체의 꼭짓점에 위치한다. 꼭짓점에 위치하지만 결합에 참여하지 않는 전자쌍을 비공유전자쌍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소와 수소의 결합은 굽은형 구조가 된다.
굽은형의 물분자는 산소쪽이 부분적으로 음전하를 띠고 수소 2개가 있는 쪽은 부분적으로 양전하를 띤다. 물분자의 산소와 다른 물분자의 수소 사이에는 인력(수소결합)이 작용해 물분자들은 서로 얼기설기 엮여 뭉치려는 경향이 크다. 반면 메탄은 4면체 꼭짓점에 모두 수소원자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상호작용이 없다.
공기_투명할 뿐 비어 있지는 않아
부글부글.
물분자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물이 끓기 시작한다. 덮어둔 냄비 뚜껑이 들썩인다. 냄비 속에 팔이 있는 것도 아닌데 중력을 이기고 뚜껑이 들린다니 신기하다. 100℃가 넘어 물이 끓기 시작할 때 액체에서 기체로 바뀌는데, 뚜껑이 덮고 있으니 수증기가 갈 곳이 없다. 그러다 보니 냄비 속 공간의 기체 압력이 커져 중력을 이기면 뚜껑을 밀어내면서 수증기가 빠져나간다.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공기는 사실 기체분자가 꽤 들어 있다. 공기 1m3에 1.2kg이나 된다. 공기의 대부분은 질소(N2)로 78%를 차지하고 산소(O2)가 21%다. 나머지 1%의 대부분은 아르곤(Ar, 0.93%)이고 그 밖에 이산화탄소(CO2), 수증기가 소량 있다.
당구공을 치면 당구대 쿠션을 맞고 방향이 바뀌듯이 냄비 속의 기체분자도 냄비 안쪽 표면에 끊임없이 부딪치며 진행 방향이 바뀐다. 물론 냄비 바깥쪽도 공기 중의 기체분자가 계속 부딪치고 있다. 단위 면적당 기체분자로부터 받는 힘을 압력이라고 한다.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생기면서 냄비 속의 기체밀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냄비 뚜껑 아래쪽은 위쪽보다 더 많은 기체분자가 부딪친다. 이 압력의 차이 때문에 냄비 뚜껑이 열린다.
물이 끓을 경우는 수증기가 계속 생기지만 풍선 속에 들어 있는 기체처럼 분자 개수가 정해진 경우 온도(T)나 압력(P), 부피(V)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 즉 온도가 일정할 때 부피를 줄이면 압력이 올라간다. 온도는 기체의 평균속도와 비례하는데, 단위 면적당 더 많은 기체가 부딪치므로 수긍이 간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 이 관계를 발견했기 때문에 ‘보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압력이 일정할 때 기체의 온도를 높이면 부피가 는다. 기체의 평균속도가 빨라지면 충격량도 커지는데, 면적이 늘어나야 압력이 유지되므로 역시 당연한 얘기다. 18세기 과학자 자크 샤를이 발견해 ‘샤를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을 합치면 ‘압력과 부피를 곱한 값을 온도로 나누면(PV/T) 일정한 값이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를 ‘보일-샤를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기체분자는 무시할 만하지만 부피도 있고 분자 사이에 인력도 있어서 이 법칙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식이 들어맞는 ‘이상기체’라는 가상 기체를 고안했다. 기체 분자의 수가 일정할 때 이 식을 계산하면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한 값이 나온다.
기체분자는 너무 작아 하나씩 셀 수 없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수를 가리키는 단위가 필요하다. 원자나 분자 6.02×1023개를 1몰(mole)이라고 하고 이 숫자 6.02×1023을 아보가드로수라고 한다. 앞의 식에서 기체분자 1몰에 대해 압력, 부피, 온도의 관계를 계산한 값(PV/T)이 기체상수 R이다. 몰 수가 n일 때로 식을 확장하면 PV=nRT라는 멋진 식이 된다. 이를 ‘이상기체방정식’이라고 부른다.
아까 냄비에 넣은 물 3컵은 540ml 정도다. 물의 비중이 1이므로 540g이다. 여기에는 물분자가 몇 개나 들어 있을까? 물 18g이 1몰이므로 30몰, 즉 1.806×1025개다. 어느 정도 숫자인지 상상이 잘 안 간다고? 지구의 인구 68억 명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6.8×109이다. 물 3컵에는 글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의 물분자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 6.02×1023이라는 숫자를 쓸까?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장 가벼운 원자인 수소원자(H)를 모아서 질량 1g이 되게 하려면 수소원자가 바로 6.02×1023개 필요하다. 수소원자 6.02×1023개, 즉 1몰의 질량이 1g인 것이다. 그 1이라는 숫자가 수소의 원자량이다. 원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분자도 마찬가지다. 수소분자(H2) 1몰은 수소분자 6.02×1023개를 말한다. 수소분자는 수소원자 2개로 이뤄져 있으므로 수소분자 1몰에는 2×6.02×1023개의 수소원자가 들어 있다.
금속_라면엔 양은냄비가 제격
“앗 뜨거!”
라면을 넣다가 냄비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사실 라면은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야 맛이다. 라면처럼 금방 만들어 금방 먹는 요리(라면도 엄연히 요리다!)에는 양은냄비가 제격이다. 된장찌개에 뚝배기가 어울리듯이.
양은은 구리(Cu)에 니켈(Ni)과 아연(Zn)을 더해 만든 합금이다. 가볍고 열에 잘 견디면서도 열을 잘 전달하므로 식기에 적합하다. 가마솥을 만드는 쇠도 튼튼하지만 솥에 라면을 끓여 먹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인류가 문명을 꽃피운 계기는 금속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부터다. 먼저 구리를 쓰다가 뒤에 철을 이용했다. 구리는 녹는점이 1085℃로 비교적 낮기 때문에 인류가 암석에 들어 있는 구리가 불에 녹아내리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철의 녹는점은 1538℃다. 금속은 실처럼 뽑을 수 있는 연성과 두드려 판처럼 펼 수 있는 전성이 있다. 특히 금이나 은은 연성과 전성이 좋고 귀하기 때문에 각종 장신구를 만드는 귀금속이 됐다.
또 금속은 열뿐 아니라 전기도 무척 잘 통한다. 특히 구리는 연성도 좋고 전기전도도도 높은데다 흔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널리 쓴다. 대신 좀 무르기 때문에 양은처럼 다른 금속과 섞어 강도를 높여 쓴다. 금속이 전기를 잘 통하는 이유는 자유전자 때문이다. 금속은 전자를 버리고 양이온이 되려는 경향이 큰데, 양이온 금속끼리 결합돼 있는 사이를 전자들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닌다. 이들을 자유전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금속은 이런 금속결합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금속광택을 내며 전기전도성을 나타낸다.
탄소 화합물_면발이 부드러운 이유
흐르르. 치이익.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내용물이 끓어 넘쳐 레인지 위에 떨어졌다. 아무래도 뒤처리가 더 문제일 것 같다. 조리법을 보니 4분 30초간 끓이란다. 지금쯤이면 되지 않았을까. 파마한 머리카락처럼 꼬불꼬불한 라면은 국수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 난다. 라면의 재료는 밀가루인데, 주로 녹말로 이뤄져 있다. 녹말은 포도당 분자가 끝없이 이어진 사슬처럼 생긴 고분자다. 라면의 비밀은 면발을 기름에 한 번 튀겨 녹말 고분자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둔 것. 물론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점도 라면의 매력이다.
라면을 끓는 물에 넣으면 물분자가 녹말 고분자 사이의 공간에 들어간다. 물론 차가운 물에 넣어도 결국은 물분자가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온도가 뜨거워야 물분자 움직임이 활발해 빨리 침투하기 때문이다. 면을 끓일수록 면발이 부드러워지므로, 적당한 시점(조리법에 따르면 4분 30초!)에서 중단해야 한다. 계속 끓이면 더 많은 물분자가 들어가 결국 면발이 ‘불게’ 돼 쫄깃쫄깃한 맛이 사라진다.
녹말의 단위체인 포도당은 대자연의 축복이다. 아무 맛도 없는 물(H2O)과 보이지도 않는 이산화탄소(CO2)가 햇빛을 받으면 산소(O2)를 방출하면서 포도당(C6H12O6)으로 바뀐다. 물론 아무데서나 이렇게 되는 건 아니고 식물의 엽록체에서 수많은 효소의 도움을 받아 이런 역사(役事)가 이뤄진다. 이런 반응을 광합성이라고 한다. 포도당을 비롯해 수많은 분자들이 탄소원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탄소 화합물이다.
포도당(녹말이 소화되면 포도당이 된다)을 먹고 산소(숨쉬는 공기의 21%)를 호흡하면 우리 세포의 미트콘드리아란 곳에서 식물의 엽록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나 포도당이 물과 이산화탄소로 바뀐다. 물론 이때 햇빛을 내지는 않고 대신 에너지원인 ATP란 분자가 만들어진다. 먹음직스런 면발을 한 젓가락 쥐기 전에 미국이나 호주 들판 어딘가에서(라면 봉지의 원산지란을 보니 ‘면/소맥분(미국산, 호주산)’이라고 써 있다) 자랐을 밀과 곡식을 영글게 한 태양과 물, 공기를 생각해 본다.
라면 봉지도 탄소 화합물이다. 역시 고분자인데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덩어리를 플라스틱, 종이처럼 얇은 걸 비닐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비닐은 고분자를 이루는 단위체가 되는 화합물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많은 플라스틱이 비닐을 단위체로 만들어진다.
요즘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플라스틱 재활용이 화두다. 효과적인 재활용을 하려면 플라스틱을 종류별로 분리배출해야 하는데, 플라스틱 제품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에 화살표 3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서로 꼬리를 물고 있고 가운데 플라스틱 종류가 써 있는 식별 표시가 있다. 라면 봉지를 보니 ‘OTHER’라고 써 있는데, 이것은 ‘기타 플라스틱’이라는 뜻이다. 이 표시가 된 플라스틱을 모아 두꺼운 갈색 대야를 만들거나 고체연료로 재활용한다. 1.5L 콜라병을 보면 그 삼각화살표 안에 ‘1’이 써 있다. PET라는 뜻으로 빈 병을 모아 PET병으로 재활용한다.
생활 속의 화합물_기름 닦는 계면활성제
꺼어억.
이런 나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다. 모처럼 얼큰한 라면을 잘 먹었다. 거울을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밥 한 공기 말아 먹고 싶지만 여기서 자제해야겠다.
자 이제 설거지를 해볼까. 아무래도 기름에 튀긴 음식이다 보니 냄비 여기저기에 기름기가 남아 있다. 이럴 경우 그냥 물로 씻어서는 잘 안 닦인다. 주방세제가 필요하다.
꿀처럼 찐득하고 투명한 주방세제를 머금은 수세미를 냄비에 대고 문지르자 거품이 일면서 기름기가 사라진다. 맹물일 때는 그렇게 힘을 줘서 박박 닦아도 안 없어지더니 이 마법의 액체를 넣으면 슬슬 문질러도 깨끗해진다. 주방세제의 주성분은 계면활성제다. 계면활성제란 물과 기름 사이에 들어가 둘이 잘 섞이게 해주는 물질이다.
기름은 탄소와 수소가 주성분인 분자로 극성이 작은 분자다. 반면 물은 극성이 크다. 따라서 기름은 기름끼리, 물은 물끼리 있으려고 한다. 그래서 물에 젖은 수세미로 아무리 문질러도 냄비 표면에 묻어 있는 기름이 잘 안 닦인다. 그런데 계면활성제는 한 분자에 한쪽은 극성이 작고 반대쪽은 극성이 큰 부분을 같이 갖고 있다. 동물로 치면 박쥐와 같다고나 할까. 계면활성제 분자의 기름 같은 부분이 기름 표면에 달라붙고 물처럼 극성이 크거나 물을 좋아하는 이온인 부분이 물을 향해 있으면서 냄비 표면에서 기름을 떼어낸다. 설거지를 한 물을 확대해 보면 계면활성제에 둘러싸인 미세한 기름방울이 퍼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설거지도 끝났다. 시계를 보니 막 자정이 지났다. 바로 자면 소화가 안 될 테니 한 시간 정도는 뭘 해야 할 텐데…. TV를 다시 켜기도 그렇고 보고서를 들여다볼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면을 끓여 먹은 과정을 화학의 관점에서 써 보면 어떨까. 화학을 싫어하는 동생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편집자주
과학과 수학을 잘 하는 비법은 목차를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학동아는 2009년 1월부터 ‘교과서에 길이 있다’ 연재를 물리, 수학,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순으로 5회에 걸쳐 대형 브로마이드와 함께 제공한다. 이번 화학편에서는 고등학교 화학Ⅰ에서 배우는 핵심 내용을 대학생이 라면을 끓이면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었다.
전창림 교수는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국립대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있다. 고분자화학과 미술재료의 화학적 연구에 관심이 많다. ‘알고 쓰는 미술재료’(1996), ‘생활은 화학이다’(2000), ‘색의 비밀’(2003), ‘미술관에 간 화학자’(2007)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