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징어를 먹지 않는 나라들이 많다지만 우리나라에서 오징어는 흔하게 즐겨먹는 식재료다. 아울러 오징어의 친척인 문어나 낙지도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분류학 용어로는 두족류)은 모두 몸 안(장과 항문 사이 등쪽)에 먹물 주머니가 있어 요리를 할 때 떼 내야 한다. 실수로 놔두고 요리를 하다간 먹물주머니가 터져 음식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오징어 먹물이 인기다. 검은깨, 검은콩 같은 ‘블랙 푸드’(black food) 열풍에 편승해 오징어 먹물도 몸에 좋다며 먹물이 들어간 요리를 메뉴에 올리는 식당이 늘고 있다. 급기야는 오징어 먹물을 넣었다는 염색약도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이 ‘허위과대광고’라며 공개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오징어 먹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머리카락 색소와 같은 멜라닌이 주성분

오징어나 낙지 먹물의 검은색은 멜라닌 때문이다. 멜라닌은 두족류뿐 아니라 동물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색소로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피부색도 멜라닌 때문이다. 멜라닌은 아미노산인 타이로신이 변형된 분자에 여러 가지 분자와 단백질이 달라붙은 복잡한 고분자로 아직까지 정확한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멜라닌은 짙은 갈색인데 고농도로 존재하면 검게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흰 머리카락이 하나 둘 생기는데 이는 멜라닌을 만드는 세포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징어 먹물의 멜라닌을 공급해 머리의 색을 찾아준다는 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기존의 염색약은 멜라닌과 전혀 관계가 없는 화학물질로 머리카락에 들어가 검은색을 낼 뿐이다. 그럼에도 식약청은 왜 이런 ‘천연 염색약’에 철퇴를 가했을까.
“오징어 먹물은 착색제(색소)일 뿐 염모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징어 먹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식약청 의약외품과 김미정 연구사의 설명이다. 머리카락의 색도 멜라닌 때문인데 왜 외부에서는 멜라닌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일까.
“머리카락의 구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발은 멜라닌이 들어 있는 모피질을 비늘 같은 구조의 모표피가 감싸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모표피 사이의 틈이 0.6nm(나노미터, 1nm=10-9m)밖에 안 되기 때문에 멜라닌 같은 큰 분자는 들어갈 수가 없지요.”
염모제 전문 업체인 동성제약 연구소 조봉림 이사는 모발염색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염색을 해봤다면 알겠지만 염모제 자체는 색이 없다. 여기엔 p-페닐렌디아민 같은 염모제 성분이 들어 있는데 크기가 작은 분자여서 모표피 사이를 뚫고 들어가 모피질에 침투할 수 있다. 여기에 과산화수소 같은 산화제를 처리하면 모피질에 들어간 p-페닐렌디아민 분자 사이에 결합이 생겨 고분자가 되면서 색이 나온다. 결국 ‘오징어먹물 염색약’은 일부 업체들이 오징어 먹물의 검은색을 이용해 염색 메커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호도한 셈이다.
짙은 갈색 ‘세피아’는 오징어란 뜻

지금은 다양한 화학 색소가 많이 개발돼 오징어먹물 색소는 거의 쓰지 않지만 세피아는 ‘회색 기운이 있는 짙은 갈색’의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사진 분야에서도 세피아란 용어가 쓰이는데 사진이 오래돼 변색된 것 같은 효과를 의미한다. 다양한 기능을 지닌 디지털 카메라의 경우 ‘세피아 모드’로 사진을 찍어 한껏 멋을 낼 수 있다.
한편 오징어먹물은 우리나라에서도 색소로 쓰였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동명 원작 소설을 보면 “오징어 먹물집의 먹물을 말려 가루로 만들고 잿물에 끓여 가라앉힌 뒤 낮은 온도에서 말려도 짙은 갈색을 얻을 수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오징어 먹물로 염료를 만들기도 했으나 색이 불안정해 즐겨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근 타르계식용색소의 안전성이 문제가 되면서 오징어먹물을 식용색소로 쓰기도 한다.
이유 있는 블랙 푸드 열풍

그런데 같은 블랙 푸드라도 오징어먹물의 효과는 색깔(짙은 갈색을 내는 멜라닌) 때문만은 아니다. 오징어먹물에는 멜라닌이라는 색소 외에도 뮤코다당류가 들어있다. 뮤코다당이란 주로 동물의 결합조직에 존재하는 점성을 띠는 다당류로 여러 종류가 있는데 히아루론산 같은 물질은 보습성분으로 화장품에 많이 쓰이고 있다.
1990년대 초 일본 아오모리산업연구센터 마츄에 하지메 박사팀은 원양산 오징어(Illex argentinus)의 먹물에 들어 있는 뮤코다당류인 일렉신(illexin)이 종양억제활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쥐에게 암세포를 주사한 뒤 그냥 둘 경우 2~3주 뒤 모두 죽지만 매일 일렉신 화합물 0.2mg을 주입할 경우 65%가 살아남았다. 일렉신은 암세포를 공격하는 대식세포를 활성화해 항암효과를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연구결과가 방송된 1995년 이후 일본에서는 오징어먹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국수나 라면, 스파게티 같은 면류는 물론 오징어먹물 김치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연구자들은 일렉신이 타이로시나제라는 효소 단백질과 복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타이로시나제는 타이로신으로 멜라닌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처음 작용하는 효소다. 연구자들은 “두족류는 위기 상황에서 먹물을 사용한 뒤 다시 채우려면 멜라닌 색소를 대량으로 빨리 만들어야 한다”며 “일렉신은 타이로시나제와 함께 복합체를 형성해 이런 작용이 가능케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타이로시나제가 먹물의 항암효과에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앞으로 오징어 요리를 할 때는 다음 문구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오징어를 다듬을 땐 먹물주머니를 떼어내지 마세요. 여기엔 항암 물질이 들어있답니다!”
오징어 구조
두족류에는 장과 항문 사이 등쪽에 먹물주머니가 있다. 두족류들은 천적을 만났을 때 주머니를 수축해 먹물을 내뿜으며 연막을 펴 위기를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