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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인 1609년 가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 최고 성능의 20배율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해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는 인류의 지식 체계를 뿌리째 뒤흔든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달 같은 천체는 매끈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갈릴레이 시대 이후 망원경이 점점 대형화되면서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우주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획기적 성과가 줄을 이었다. 앞으로 허블우주망원경에 이은 차세대 우주망원경이 뜨고 30m급 지상 망원경이 들어설 전망이다. 2009년 UN이 선정한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우주로 향한 거대한 눈’ 망원경의 세계로 떠나보자.

망원경이 우리 눈을 속이는 거 아냐? 망원경을 직접 제작해 맨눈에 보이지 않던 진짜 우주를 발견한 갈릴레이. 당시 팽배했던 지구중심설의 아성을 힘들게 깨뜨려 나간 그의 발자취를 쫓아가 보자.

“달에도 산과 계곡이 있고, 우유빛으로 뿌옇게 보이는 은하수의 정체는 수많은 별들의 모임이며, 특히 목성 주위에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4개의 ‘떠돌이별’(지금의 위성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돌고 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손수 제작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누비며 처음 발견한 결과를 담아 출간한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별의 전령사, 천문소식)의 일부다. 이 책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천체는 흠 없이 완벽하다는 당시 통념을 깨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나오자마자 초판 550부가 다 팔렸다.

달에 있는 산 높이를 재다
그 전해 5월 이탈리아 파도바대 수학 교수인 갈릴레이는 멀리 있는 사물을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구(망원경)가 있다는 소문에 귀가 번쩍 뜨였다. 1608년 9월 한스 리페르셰이라는 네덜란드 안경업자가 발명한 이 기구는 만들기 어렵지 않아 프랑스 안경업자도 제작해 판매할 정도였다. 갈릴레이는 이 기구의 원리를 알아낸 뒤 대롱 모양의 긴 통에 일반 안경용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립해 3배율 망원경을 손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배율이 더 높은 망원경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렌즈를 직접 갈아야 했다. 그는 힘겨운 노력 끝에 1609년 8월말 배율이 8~9배인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망원경을 베네치아 당국에 가져갔더니 의원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의 봉급도 2배 이상 올랐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3개월 만에 배율을 20배까지 높인 망원경을 제작해 달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망원경이 우주로 향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측했다고 하지만 그가 최초는 아니다. 1608년 가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고, 갈릴레이가 베네치아 당국에 망원경을 전달하기 몇 주 전 영국의 토머스 해리엇이 6배율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 뒤 그 모습을 그렸다는 그림이 남아 있다.

해리엇의 그림 속 달은 맨눈으로 본 모습과 비슷했지만 갈릴레이가 20배율 망원경으로 달을 보며 세밀하게 그린 그림은 차원이 달랐다. 1609년 갈릴레이는 11월 30일부터 12월 18일까지 달이 차고 기우는 변화를 관찰하며 8장의 그림을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달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지구 표면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데 있다. 심지어 그는 달에서 크고 둥근 중앙 계곡(알바테그니우스 크레이터)을 보헤미아 분지와 비교했고 달에 있는 산 높이가 6km 이상이라고 계산까지 하며 지구에 있는 보통 산보다 더 높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발견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예상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달에 산이 많다면 왜 달의 가장자리는 톱니처럼 보이지 않는가에 답했다. 앞뒤에 산들이 늘어서 산과 산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 가장자리가 매끈하게 보인다고. 물론 다소 우툴두툴한 달 가장자리를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망원경이 제작되기까지는 50년이 더 필요했다. 1664년 지오반니 카시니가 이를 처음 관측했다.

갈릴레이 망원경은 시야가 매우 좁은 게 흠이다. 20배율 망원경으로는 달이 절반쯤밖에 안 보이고, 목성을 찾는 일은 물론 계속 포착하기도 힘들다. 그는 관측자의 호흡과 맥박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정된 장소에 망원경을 고정시키고 렌즈를 헝겊으로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마분지로 대물렌즈 둘레를 가려 상을 훨씬 선명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런 방법을 쓰면 곡률이 비교적 일정한 렌즈 중심부로만 빛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망원경 배율을 확인하는 간단한 방법도 소개했다. “먼저 두 장의 종이에 반지름이 20배 다른 두 원을 각각 그린 뒤 두 종이를 멀리 있는 벽에 나란히 붙여 놓고 바라본다. 한 눈으로는 망원경을 통해 작은 원을 보고 다른 쪽은 맨눈으로 큰 원을 본다. 20배율 망원경이 제작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졌다면 두 원은 똑같은 크기로 보일 것이다.” 갈릴레이는 30배율 망원경까지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랑의 어머니는 신티아의 모습을 모방한다”
갈릴레이는 맨눈으로 볼 때보다 망원경으로 10배 이상의 별들을 볼 수 있었고 은하수 어디에다 망원경을 들이대도 빼곡히 몰려 있는 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망원경에서 행성과 붙박이별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행성은 매끄럽고 완벽한 원 모양으로 보이는 반면, 붙박이별은 밝은 광선으로 둘러싸여 몹시 깜박거린다는 것.

1610년 1월 7일에는 드디어 망원경을 목성으로 향했다. 목성 근처에서 ‘별’ 3개를 발견했는데, 목성 동쪽에 2개가, 서쪽에 하나가 있었다. 다음날에는 3개의 ‘별’이 모두 목성 동쪽에 있었다. 10일에는 오직 2개의 ‘별’만 목성 동쪽에 있었고, 13일에는 4개의 ‘별’이 목성 근처에 나타났다. 즉 3개가 목성 서쪽에, 하나가 동쪽에 있었다. 그해 3월 2일까지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측한 그는 4개의 위성이 목성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4개의 위성은 발견 당시 갈릴레이가 ‘메디치의 별’이란 이름을 붙여 토스카나공국(公國)의 메디치 왕실에 바쳤으나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그를 기려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지구만 천체 운동의 유일한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이 팽배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에서는 태양과 지구가 저마다 운동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러면 왜 지구만 달을 갖고 있느냐”고 반박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 덕분에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목성은 적어도 4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고.

‘시데레우스 눈치우스’가 출판됐을 때 많은 이들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유럽에는 이미 망원경이 넘쳐났지만 일반 망원경으로는 달의 현상을 일부만 관찰할 수 있을 뿐 직접 목성의 위성을 볼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공을 들여 만든 60개 망원경 가운데도 겨우 몇 개만 목성의 위성을 볼 만한 성능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성능 좋은 망원경을 여러 사람에게 보냈고 그해 8월말 요하네스 케플러가 이 덕분에 목성의 위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해 7월말에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토성을 관찰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성이 목성처럼 단순한 원형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 것. 그는 토성에 ‘별’ 2개가 거의 붙어 있다고 판단해 이들을 토성의 위성이라고 오해했다. 사실 이는 토성의 고리였으나 그의 망원경으로 토성 고리를 분간하기는 불가능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접 지지하는 관측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 따르면, 금성은 지구에서 멀 때보다 가까울 때 훨씬 크게 보여야 하고 달처럼 위상이 변해야 한다. 그해 10월 저녁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금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12월초에는 금성이 작은 반달 모양으로 줄었다. 그는 12월 11일 토스카나공국 대사에게 “사랑의 어머니(금성)는 신티아(달)의 모습을 모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흥미롭게도 철자를 바꾸는 암호를 이용했다. 12월말 갈릴레이는 금성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하는 걸 확인하자, 비로소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진다는 사실을 관측했다고 자신 있게 발표할 수 있었다.

태양 흑점은 케플러가 1607년 우연히 발견했지만 그는 흑점을 수성이라고 착각했다. 이 덕분에 갈릴레이는 태양 흑점 발견자라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1612년~1613년에 망원경으로 태양 흑점을 스케치하며 태양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태양 흑점이 주변을 도는 위성에 의해 생긴다고 주장한 독일 예수회신부 크리스토프 샤이너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갈릴레이가 태양 흑점을 직접 관찰해 말년에 눈이 멀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흑점을 일몰이나 일출 때만 직접 관찰했고 종이에 투영해 스케치했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남아 있다.

갈릴레이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할 기회도 있었다. 1612년 12월 28일 우연히 천왕성을 처음 관측해 스케치에 남겼으나 붙박이별과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1월 27일 천왕성을 한 번 더 관측했다. 물론 그의 망원경은 천왕성의 움직임을 감지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던 갈릴레이는 가톨릭교회의 핍박에 시달렸다. 벨라르미노 추기경한테 지동설이 교리에 어긋나므로 더 이상 지지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던 것. 하지만 그는 지동설을 은연중에 지지하는 ‘두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책을 1632년에 출판했다. 결국 로마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규정하고 일흔이 다 된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정에 세웠다.

갈릴레이가 믿었던 지동설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실이 됐지만 교회가 그에게 씌운 멍에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그의 책이 금서에서 풀려났고 1990년대에야 바티칸은 그에게 공식 사죄했으며 그 즈음 그의 이름을 붙인 탐사선이 목성으로 향했다. 또 유엔은 그가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 지 400주년을 기념해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정한 일도 갈릴레이에게는 위로가 됐으리라.


갈릴레이가 스케치한 달
1609년 11월 30일부터 12월 18일까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을 관찰하며 8장의 그림을 남겼다. 이 가운데 달 중앙 아래쪽에서 원 모양의 구덩이(알바테그니우스 크레이터)를 강조해 그렸다.


우주론에 따라 다르게 예측된 금성의 모양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왼쪽)에 따르면 금성은 둥근 모양이 될 수 없지만,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오른쪽)에서는 금성은 달처럼 차고 기운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금성을 관측해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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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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